<랩 걸>의 저자인 홉 자런의 친구(?)인 빌이 책을 읽고 있는 홉에게 물었다. 아래 밑줄긋기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이 부분을, 특히 빌이 한 얘기를 여러번 읽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심리적인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데 빌은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만약 장 주네가 도둑질이 아닌 살인을 했다면?

나는 장 주네 Jean Genet(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시인-옮긴이)의 새 전기를 읽고 있었다. 1989년 미니애폴리스에서 <병풍들>을 연극으로 본 후 굉장히 흥미를 갖게 된 작가였다. 내게 있어서 주네는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대 큰 힘을 들이지 않으며,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고, 인정을 받더라도 영향받지 않는 유기적 작가의 전형이었다. 그는 또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독창적인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읽은 수백 권의 다른 책들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게 되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나는 주네의 어린 시절 어떤점이 그가 성공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동시에 성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든 것인지 알아내는 데 거의 집착하고 있었다.
“장 주네에 관한 책이야.” 나는 약간의 경계심을 가지고 대답했다. 내가 책벌레라는 사실을 더는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은 전혀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의 관심까지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서 설명을 시도했다. “한 세대를 풍미한 위대한 작가였어. 무한하고 복잡한 상상력을 지녔고. 그런데 유명해진 다음에도 그 사실을 한편으로 실감하지 못했지.”
나는 마음에 제일 걸리는 사실을 덧붙였다. “성장하면서 주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범죄를 연달아 저질러 복역한 바 있어. 그래서 사뭇 다른 자기 나름의 도덕 체계를 만들어냈지.” 나는 그렇게 설명하면서 누군가와 책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에 놀랐다.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미 죽은 작가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을 하다 보니 가족 생각이 났다. 모든 면에서 이제는 나와 거리가 많이 멀어진 내 가족. 빌이 자기 칼로 흙을 뒤적이는 것을 보다가 엄마와 같이 정원에서 일하던 여름날을 기억했다.
“주네는 남창으로 일하면서 고객들의 물건을 훔쳤고 그러다가 감옥에 갇혀 그 시간 동안 책들을 썼어.”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했다. “묘한 사실은 이미 부자가 된 다음에도 주네는 가게에 들어가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엉뚱한 물건들을 훔치곤 했다는 거야. 한 번은 파블로 피카소가 주네의 보석금을 내주기까지 했어. - 앞뒤가 맞질 않지.” 나는 그렇게 결론 지었다.
“아마 자기 저신에게는 앞뒤가 완벽하게 맞는 일이었겠지.” 빌이 반박했다. “누구나 자기도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는 별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잖아. 단지 아는 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뿐인 거고.” 그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p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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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16: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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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1 0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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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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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준 - 모모

(<사랑 없이는>에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p.120~122)


이 리뷰의 제목은 235페이지 작가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김살로메 작가의 [라요하네의 우산]을 받아서 읽으며 다양한 인물을 그려내는 그분의 솜씨에 당혹한 느낌마저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소설집을 읽으며 가끔은 자상한 언니같고, 때로는 허물없는 친구같고, 때에 따라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주는 엄마 같지만 그분은 나와는 다른 실력의 뿌리가 깊은 작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살로메 작가의 창작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궁금해하며 다음엔 장편소설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거의 매일 직장인 일하듯 일천 글자 쓰기 한 것을 모아 산문집을 출간하셨다. 소설에서는 그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면 산문은 내가 아는 익숙한 작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살로메 작가의 산문은 때로 시 같기도 하고 때로 소설 같기도 하고, 전문칼럼 같기도 해서 읽을수록 어렵고 작가의 깊이에 감동하게 되었다.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문장은 단연 작가의 말 첫 두 문장이었다.

거의 매일 일천 글자 쓰기를 했다. 직장인 일하듯 썼다. 

과장은커녕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저 두 문장을 읽으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멍했다. 더구나 육백여 편에 이르렀을 때 자기 복제의 동어 반복에서 오는 피로감이 두려워 일천 글자 쓰기를 중단했다는 것을 읽고 진중하고 거짓 없는 그녀가 떠올라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이 산문에는 그녀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문체가 간결하지만 그녀의 내면 풍경은 공감을 끌어낸다. 생각깊고, 누구에게든 최선을 다하며, 삶에 성실한 김 살로메 작가의 내면. 그런 척 하지 않은 진실한 내면.


리뷰를 쓰려고 다시 들춰보니 첫 번째 장의 제목과 같은 에세이 <봄비 또는 안개>에는 너무 좋아서 별표를 해놨다. 이 산문은 산문을 가장한 시처럼 읽혔다. 시처럼 읽혔다는 것은 한 폭의 그림이나 사진처럼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을 느끼게 하는 것. 바로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푼크툼의 느낌인 것이다. 5부 5번째 산문 <사진에 대한 단상>에서 

[카메라 루시다]는 사진 읽기에 대한 그(롤랑 바르트)의 독창적인 시선이 담긴 책이다. 그 중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대한 잔상이 떠나질 않는다. 누군가의 사진 한 컷은 객관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경험의 산물이다. 특정 사진에 대해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작가의 의도 등을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를 찔러대는 정서적 감흥을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며, 대중적이고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별적이고 은밀해도 좋은 것이리라.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선 푼크툼은 심연의 창고에서 꺼내는 숨은그림찾기와 같다. 옛날 사진 한 장을 꺼냈을 때, 오롯한 나만의 내면 풍경이 떠오르는 상태가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햇살 가득한 담벼락을 따라 번지던 웃음소리, 모래톱에서 내려다보던 사금파리 박힌 발등, 한 컷의 사진에서 우리는 따뜻한 듯 아린 푼크툼의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 p.234~235

저 사진은 작가가 보내준 이 책과 함께 받았다. 저 사진을 보낸 마음이 느껴져 이 사진을 보는데 코끝이 찡했다. 이 옛날 사진 한 장으로 오롯한 나만의 감정이 살아나듯 저 속에 있는 다른 이들도 그들만의 내면 풍경이 떠오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듯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에 실린 80편의 산문은 각각 독자에게 홀연한 깨달음처럼 묘연하지만 번뜩이는 아우라, 모멘텀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로 푼크툼의 세계이다.


에세이집을 여럿 읽었지만 마지막에 전문가(?)의 해설을 넣은 건 참신한데 요청을 받은 문학평론가이면서 한동대학교 김윤규 교수의 해설에는 김 살로메 작가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내가 하고 싶은 말로 대신하고 싶다.


김살로메의 짧은 산문집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을 읽었다. 며칠이 걸렸다. 큰일 났다. (이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ㅎㅎㅎ) 그이는 나에게 이 글의 평론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면 좋을까. 그이는 알려진 소설가인데 산문집을 낸다. 그이는 자신의 무엇을 고백하려는 것일까. 산문이니까, 대놓고 고백하겠다고 했으니까, 그이는 자기 허리춤의 날선 단도를 살짝 보여주려는가. 혹시 검광을 못 보고 옷깃만 스치면 어쩌나. 낭패다. - P.273

멋지다. 그이는 이런 상태를 '이성보다 감성'이라고 했다. 수필은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산책하는 오솔길이라고 했는데, 여인의 표정은 좀 새초롬해도 좋겠다. 그이의 산책길에 잔잔한 감성이 깔려 있으면 더욱 좋겠다. 더욱이 김살로메는 독자에게 같이 산책하자고 손을 잡아끈다. 우리도 공감하는 감성을 장착해야 될 모양이다. -p.274~275

이 단상들에는 지은이의 소망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막 소리 내어 욕구하지는 못하지만 그이는 분명히 남다른 감각과 체험을 가진 여성이 되고 싶어 한다. 그이의 정서는 프랑스 어디 오래된 도시의 오래된 고원을 걷고 있다. 지은이는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자기 내면에서 오는 고백은 세계와의 충돌을 인식하지만 조화로운 공존을 시도한다. 이 단상집은 그런 소망을 보여주는 쨍한 유리창이다. 

요청에 의해 그랬겠지만, 이제 김살로메의 글이 허리띠를 풀었으면 좋겠다. 이번 단상집으로는 그이가 저장한 모든 생각과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못했다. 풀어 놓으면 그이는 아마 자신의 소망과 성취를 관조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강한 소망에 관조가 더해지면 그이가 하려던 이야기가 거의 다 나올 것이다. 분량과 간격부터 일단 자유로와져야겠다. 그게 김살로메다.- p.285

 

열정적인 끈기의 힘에 대해 연구한 [그릿]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이렇게 적는다.

연습은 어제보다 잘하려고 매일 단련하는 종류의 끈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특정 영역에 관심을 느끼고 발전시킨 다음에는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고 난관을 극복하며 기술을 연습하고 숙달시켜야한다. (중략) 그릿은 현재에 안주하기를 거부한다. 관심이 무엇이든, 이미 얼마나 탁월한 수준에 이르렀든 상관없이 그릿의 전형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보다 나아질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했다. 

영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하지 않는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성실히 끈기 있게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김살로메 작가는 그래서 그릿의 전형이며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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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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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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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8-07-04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리뷰 쓰셨네요~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글이셔라^^
사진ㅎ 제 배가 은근 나와 보이는.
내일 잘 다녀 올게요.
언니의 빈자리 많이 느낄거예요.

라로 2018-07-06 12:54   좋아요 0 | URL
오~~~자기야말로 이런 칭찬을 해주니 춤이라도 춰야 할 것 같아~~.^^
저 사진 자기는 정말 안 나왔어.ㅎㅎㅎㅎㅎ
우리가 찍은 단체 사진중 세실이 안 나온 사진이 없는데 저 사진이 유일한 듯?
카톡 사진 보니까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서 나도 보기 좋았어!!^^
2년후에 제주도에서 보자구!!

프레이야 2018-07-04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큼이나 멋진 리뷰 읽다가 울컥해지는 건 뭐유. 저 사진까지 진짜 ㅠ 송정이었죠 5월말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맞나 잘 모르겠지만 저기서 우리 용궁사까지 갔죠. 몇년도였죠? 사진 보니 보낸 분 마음도 라로 마음도 읽히고. 시간이 꽤 흘렀어요 그죠

라로 2018-07-06 12:57   좋아요 0 | URL
그랬어요~~~.!! 세실님에 이어 프야님의 이런 칭찬이라니~~~!!ㅠㅠ
저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받고 저도 울컥했어요~~~~~!!!
소중했던 오공주와 보냈던 시간이....언제 또 그런 시간을 갖을 수 있겠죠!!^^
송정,,,,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사진을 찍은 우리는 기억이 났는데
어딘지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났어요,,그래서 몇년도인지도 깜깜해요.
사진을 보내신 팜언니는 아시지 않을까요???
그래요,,,우리들의 좋았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어요.^^

2018-07-04 2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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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1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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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7-06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멋진 책에, 멋진 리뷰에, 멋진 오공주 님들이라니...
이 리뷰와 댓글.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라로 2018-07-11 13:27   좋아요 1 | URL
제가 남편과 여행을 하고 어제 돌아와서 이제야 답글을 달아요~~,
그런데 이렇게 과분한 댓글이라뇨~~.^^;
이런 댓글을 달아주시는 페크님도 아름답습니다!!^^

2018-07-07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1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8-07-07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웅, 사진 흐리기 전법
넘 감성적이에요
센스쟁이, 라로님~~

라로 2018-07-11 13:29   좋아요 0 | URL
보내주신 사진을 받고 많이 감동했어요.
언니가 저 사진을 보내시며 함께 보내시고 싶었던 메시지는 뭘까? 생각하면서요.ㅎㅎㅎㅎ
 
[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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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이렇게 큰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 가서 공부도 하구 영화감독두 되구. 힘든 대루 손 벌리지 않고 네 힘으로 살구. 까짓것 다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p.39

할아버지가 우산을 조금 만지자 꼼짝도 않돈 우산대가 활짝 펴졌다.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어줬다. 할아버지가 쓰고 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정류장까지라도 같이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이 빨개졌다. 울고 싶으니까 그냥 풀어달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놓았다. 할아버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p.41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p.41-42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엄마였다. p.51

내가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 능동적인 사람은 더더군다나 아니며 암기식 교육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싫어했던 제도권 교육 안에서 나는 얼마간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동안 매일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서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p.60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 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p.69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p.73-74

혼자 그렇게 오래 있으면 자연히 어두운 생각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다. p.74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투이네 가족도, 우리 가족도 서로 말고는 그렇게 가까운 이들이 없었던 셈이다. p.75

경쟁적으로 서로의 존대를 무시하는 그 두 사람이 한때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중략) 아무 미움 없이 평범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기를, 결코 헤어지지 않기를 나는 매일 빌었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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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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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서 다 옮길 수가 없어.

한 번에 10개씩.

쇼코와 나는 하굣길에 비디오를 빌려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였지만 쇼코와 함께 비디오가게에 가면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비디오를 빌릴 수 있었다. 에단 호크가 화가로 나오는 <위대한 유산>, 야한 베드신이 있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일본 공포영화 <링>, 쥴리아 로버츠의 <노팅 힐> 같은 영화들이었다.

쇼코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겉보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쇼코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내밀한 우정을 쌓는지 알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엇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나는 마루의 끝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쇼코를 만나기 위해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쇼코는 아는 사람도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친구라고 하기에는 낯선 사람이었다. 쇼코는 처음부터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서 의미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만큼 얕은 사람도 아니었다.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는 매사에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사정이 있어서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정같은 건 봐줄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이해나 관용이라는 것은 없었고 뒤끝도 있어서 자꾸만 지난 얘기를 끄집어내며 화를 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잏ㅐ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도 바닥에 앉자 할아버지는 여자는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대면 안 된다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소리를 쳤다.
˝할아버지, 여기서는 조용히 말해야 돼. 방음이 잘 안돼.˝
˝염병할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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