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힘이 세죠. 사람의 세계관을 바꿔 놓기도 할 만큼요."

"우리 아버지는 현대인들이 죽음으로부터 너무 철저하게 격리되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보디워크스를 세웠어요.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죽은 육신을 동력이 끊긴 기계처럼 보도록 강제하는 방법을 써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었던 거예요. 아버지는 죽음을 우스꽝스럽고 절대적이지만 두렵지 않은 것으로 바꾸려 했어요."

"하지만 죽음을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삶이 멈춰 버리기도 해요. 그건 플라스티네이션 자체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존은 진부한 위로는 한마디도 않고 그저 나를 안아 주기만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한참 동안 이어지는 따뜻한 포옹은, 그가 나를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용서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베풀곤 한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어. 그래서 삶이 의미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여기가 스탠퍼드 대학교란 말이지. 그렇게 서른여덟이라는 나이에, 길고 긴 우회로를 굽이굽이 돌아서, 나는 마침내 대학교에 들어갔다.

동기들은 나를 큰언니처럼 대했다. 풋풋한 얼굴들에 잔뜩 둘러싸여 살다 보니 폭삭 늙은 기분과 한껏 어려진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그때껏 얼어붙은 껍데기 속에 삶을 멈춰 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하고 싶었다. 누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해 보고 싶은 것들도 너무나 많았다. 내가 만든 ‘죽기 전에 꼭 해 볼 일’ 목록은 갈수록 길어졌다.

으리으리한 선물을 받아 놓고선 포장지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있게 마련이지.

건강 보험은 특권이지 결코 권리가 아니었으니까.

부자는 사는 법도 죽는 법도 가난뱅이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부와 권세는 얄따란 살갗에 보이는 흔적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일찍이 죽음은 평등의 수호자로 위세가 대단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부자들은 피해 가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분노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당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을 만끽했다. 나를 해방시키고, 죄책감을 안기지 않고, 나를 짓누르는 일 없이 끌어올리는 사랑을. 당연히 행복해야 마땅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무력감과 정체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어디로도 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결코 성숙하지 않았기에, 한편으로는 결코 호기심이 마르지 않았다

나는 역사와 문학, 경제학의 박사 학위를 잇달아 취득하고 나서 의대에 입학했다. 그냥 재미 삼아서 한 일이었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았고, 나의 끝나지 않는 학생 생활은 언제나 시작을 눈앞에 둘 뿐 실제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삶이 아닐까? 나는 잠재력과 가능성과 첫걸음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 악기를 배워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연습할 시간이 100년이라면 거장이 될 법도 했으니까.

그 남자의 나이를 가늠할 방법은 없다. 인종도 알 수 없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는 줄이고 또 줄인 끝에 ‘인간’의 정수만 남은 상태이니까.

애초에 빼앗아갈 속셈으로 영생이라는 약속을 내걸었던 무정한 신을 향하여.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곁에서 마음이 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무렵의 내가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행복을 잃고 나서 뒤늦게 행복했던 것을 알아차리는 경우는 자주 있게 마련이다.

"네 인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기 싫어서."

혹시 지금 내 아들이 자식을 버린 여자를 똑같은 짓을 한 남자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비난하는 것은 아닐까?

미안.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도 있으니까.

당신은 나에게 삶을 줬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사랑은 중력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계속 그렇게 기다릴 게 아니라, 마땅히 내 손으로 삶을 개척해야 했던 거죠.

당신을 잊어버리고 싶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나 스스로를 동정하는 짓도 그만뒀고.

마법처럼 신비한 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에 온기를 느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다.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가녀린 물줄기 같은 사랑이.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삶을 견디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배웠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영원히 아는 사이로 지낼지도 모른다.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내 아들은 어머니가 필요한 시기를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린 어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더 순수하면서도 덜 확실하다고 느꼈다. 볕에 바래어 쉬이 바스러지는 모래톱의 동물 뼈처럼.

"존엄한 죽음이라는 건 우리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지우려고 만든 미신이에요."

세상은 갖가지 크고 작은 방식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중 어떤 것도 나를 바꾸지는 못했다.

어쩌면 나는 속으로 너무 늙어 버렸는지도 몰랐다. 늙지 않게 해 주는 시술을 그렇게 많이 받아 놓고도.

"난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 모두 그렇잖아요."
남자는 그렇게 대꾸했고, 나는 배시시 벌어지는 그의 입술을 보며 마음이 녹아 내렸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방식으로.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나의 차례가 오면 죽음을 맞기로 했다.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이루지 못한 채로,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 채로,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배우지 못한 채로, 그러나 한 여자의 삶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린 채로. 내 인생은 하나의 기다란 호(弧)가 될 터였다. 시작과 끝이 있는.

뜻이었다.당신은 자유로워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돌아보았다. 나의 수월했던 방랑 생활과 험난했던 사랑을. 나의 자랑스러운 작품들과 후회들을. 나의 허장성세와 사소하고 질박한 즐거움들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내 팔다리 속에서 그것이 일으키는 진동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파도를 향해 총총거리며 백사장을 가로지르는 게의 걸음처럼.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 서로를 위해 곁에 있기를 원하는 거지."

"죽음 없는 삶이 변하지 않는 삶이라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도 있고, 사랑에서 벗어날 때도 있어요. 연애든 결혼이든, 우정과 우연한 만남이든, 모든 관계에는 포물선이 있어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살아가는 시간과 죽음이 있는 거죠. 엄마가 찾는 게 상실이라면 그게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했듯이, 나는 영원한 시간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할 운명이었다.

내가 늙어 가다가 죽기로 마음먹은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운명으로부터.

"나는 여러 번의 삶을 살면서 이미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어.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란다."

믿음의 문제란 모름지기 그 끝에 이르면 합리에 기반한 주장으로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서는 도약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마지막 작품은 플라스티네이션이 아니었다. 정체(停滯)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므로.

실존의 적나라한 진실에 덧씌워진 환상을 오랫동안 천천히 벗겨 가는 과정을. 그것은 낭만적이지 않다. 보기에 흐뭇하지도 않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자주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영원한 바다의 포효보다 더 커다랗게 나의 귓속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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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22-04-15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자는 사는 법도 죽는 법도 가난뱅이하고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부와 권세는 얄따란 살갗에 보이는 흔적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여기 밑줄 긋게 되고 아 이것도 정말 증언과 고발(?)이 무한히 나와야 하는 주제다... 했는데 다른 문장들 보니까, 이 작가 여러 주제로 다 독특하고 심오한 작가일 거 같아요! 켄 리우. 사, 사랑합... (보자마자...;;;)

라로 2022-04-15 14:42   좋아요 1 | URL
아! 몰리님은 알아봐주실 줄 알았어요!!! 저 처음에 이 책(단편집)의 첫 이야기를 읽을 때 삐걱대고, 투박하고 평범해,,머 이러면서 불평을 하면서 읽었는데요,,점점 아 이거 정말 괜찮은데!!! 막 이러면서 다른 이야기 다 읽지도 않고 켄 리우의 다른 책을 주문;;;; 저 이젠 울 준비 되었어요,, 사랑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