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 이은 2부는 주로 독자 여러분들의 질문을 통해 진행됩니다.

 앞에꺼 안보신 분들을 위한 1부 가기 링크.




영화라는 우정.




알라딘- QnA의 첫 질문은... 고민상담입니다(웃음). 아무리 진지하고 깊은 내용을 담은 영화라도, 거기에 담긴 사유보다는 우선적으로 영화 자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정성일- 허허허

알라딘- 네, 자신이 인문학도여서 그런걸까라고 자문을 하셨어요(웃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감각으로 사유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감각에서 출발한 사유는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하는 겁니다.

정성일- 우선 지젝 식으로, '당신의 죄의식을 즐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웃음)

감각이 사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세잔은 가능하다고 했어요. 더 가까워진다, '보여진다'는 거죠.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감각과 의미라는 두 단어는 국어에서는 별도이지만, 불어에서는 같은 단어(sens)예요. 같은 단어 속에 감각과 의미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그 두 요소가 이미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그게 불가능하죠.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온 걸까...

영화는 1895년에 파리에서 탄생했어요. 근대화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죠. 당시의 미술이나 음악 등에서 그 기류를 느낄 수 있어요. 특히 인상파 미술을 생각해볼 수 있죠. 영화는 '세상의 공기를 감각으로 캐치하려던 시대'에 태어난 예술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발명된 동기는 예술이 아니었어요. 영화는 그저 기술일 뿐이었죠. 실제로 초기에는 유사 써커스이기도 했고요. 벨이 전화기를 발명한 것과 아무런 미적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19세기의 저 수많은 과학적 발명 중에 유일하게 영화만이 예술이 되었어요.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예술이 되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주1

좀 더 직접적으로 답하면, 영화를 완성된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왜 이것이 예술인가라고 질문하세요. 그러면 감각이 의미를 부여합니다. 묻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의미는 발생하지 않고, 영화는 '그제서야 예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겁니다.

알라딘- 영화에 있어 감각적 요소는 본질적으로 간과할 수 없는 거군요. 질문하신 분께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정성일- (웃음) 저는 한국 사회에서 영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중에 철학자나 사회학자 같은 분들, 영화가 사유의 대상이게끔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저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영화에 대한 좋은 얘기들이 많아요. 들뢰즈나 랑시에르, 푸코, 지젝... 프레드릭 제임슨도 그렇죠. 커다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사실 방금 언급한 사람들이 너무 대가죠(웃음).

저는 책을 탐욕스럽게 읽는 편이에요. 열심히 끌어다 읽어요. 특히 한글로 쓰여진 영화 관련 글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중에 끌리거나 매력 있는 글은 거의 못 봤어요. 자기 전문 분야의 책들을 참 잘 쓰는 분들도 영화 얘기만 하면 이상하게 유치해져요. 그런 걸 읽다보면 가끔은 제가 이 사람에 대해 그간 오해했었나 싶어서 그 사람 전공 분야 책을 다시 봐요. 그런데 그건 정말 잘 썼어요. 이상하지(웃음).

아무래도 영화를 통해서 자기 분야 얘기를 하려고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사회나 역사나 철학을 설명하려고 영화를 갖다 쓰는거죠. 영화 자체를 이해하지 않고 영화를 매개로만 사용하면 좋은 내용이 나올 수가 없죠. 앞서 말한 들뢰즈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영화를 매개로 한, 혹은 영화를 빙자한(웃음) 철학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건 분명한 '영화 책'이에요. 철학을 말하기 위해 영화를 끌어들인 게 아니라, 철학을 이용해서 영화를 말하는 것이죠.

이 사회의 지식인들이 영화를 중요한 예술이라고 말할 거라면, 그에 합당하게, 보다 진지하게 대해 달라는 바람이 있습니다.

알라딘- 앞서 언급하신 들뢰즈 외에 좋은 사례는 뭐가 있을까요.

정성일- 우리나라에는 동경대 총장으로 더 유명한 불문학자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 비평들이죠. 그의 비평은 절대적이에요. 일본에서 영화 평론을 하는 그 누구도 그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했어요. 물론 그 영향력이 지나친 감은 있지만... 그의 오즈 야스지로 비평을 보면 단순한 감독론의 비평 범주를 넘어서 있어요. 그 글은 영화 자체의 가능성과 일본 영화계 전체의 속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반성하도록 하는 힘이 있어요. 결국 일본 영화의 새 세대가 나오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죠.




알라딘- 트위터에 글을 쓰실 때 <시>와 <하녀>, <인셉션>과 <엉클 분미>처럼 두 개의 영화를 비교하는 형식을 자주 이용하시는데요. 특별히 그런 방법을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정성일-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서요(웃음). 트위터는 140자 안에 결판을 내야 하는 거니까 바로 얘기를 해야 돼요. 그때 하나의 영화만 말하면 기준점을 잡기가 힘든데, 다른 영화가 상대 기준점이 되는거죠.

저는 생각이란 곧 접속사라고 생각합니다. A와 B를 연결할 수 있고, A와 C를 연결할 수도 있어요. 그 연결하는 방법이 곧 그 사람의 애티튜드가 됩니다. 좀 따분하게, 건조하게 얘기하자면 플라톤이 말하던 변증법적 사고의 기초죠.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에요.

사실 이 얘기는 왜 그럴까 하고 방금 생각해본 거예요.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랬어요(웃음).




알라딘- 영화 <해안선>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번에 나온 책에 이 영화의 리뷰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리뷰 후반부에 보면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막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질문을 주신 분 역시 그 자막을 기억하고 계신다는데요, 그런데 DVD판 <해안선>에 그 자막이 빠져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게 감독의 의도라면...

정성일- 어? 아니, 아니예요. 그건 절대 감독의 의도가 아닙니다. 확실해요. 몇 달 전에 김기덕 감독과 만나서 얘기를 했었는데 그때 그 자막 얘기도 나왔어요. 감독이 그 자막은 너무 중요하다고 직접 말했어요. 아마 DVD판에서 그 자막이 삭제된 건 감독도 모르고 있을 것 같아요. DVD 제작과정에서 재편집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물론 판본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춘향뎐>이나 <취화선> 같은 경우에도 국내 개봉판과 깐느 개봉판이 다르죠. 특히 음악에는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죠. 브루크너나 모짜르트 등만 봐도 악보가 여러 판본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같은 경우에는 보다 명확하게 예술가의 의도를 재현한다거나, 보다 나은 미적 성과를 목표한다거나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요. <해안선>의 삭제 편집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 명백한 훼손입니다.

알라딘- 만약에 그 편집이 감독의 의도에 의해서였다면 어떨까요? 달라진 판본에 따라 비평도 수정되어야 할까요?

정성일- 디렉터즈 컷 같은 여러 수정본들이 있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주로 극장 배급용 영화들이 2시간 이내로 편집되어야 하는 압박감 때문이에요. 연출가는 고심하게 되죠. 특히 헐리우드의 경우에는 편집권이 감독이 아니라 배급자에게 있어요. 그때 보통의 경우 감독은 자기 영화가 편집되는 데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그래서 DVD로 출시할 때 감독판을 내는 거죠. 이 경우에 감독이 자기 의도를 복원하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다른 예로는 홍상수 감독 같은 경우인데요. 홍상수 감독은 무조건 처음 내놓는 게 곧 최종본이에요. 불가피한 이유로 편집을 약간 더 손보는 경우는 있었는데, 그 경우도 그러고 나면 그게 최종본이죠. 여기에 정답은 없어요. 감독별 스타일 문제고 그건 다 선의에서 이루어지는 거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수정판본들은 앞선 판본과 다른 영화가 되죠. 저는 앞선 판본의 비평은 개별적인 해석으로써 존중해요. 그러므로 새 판본에 대한 비평은 새로 쓰여져야 합니다. 새로 쓰지 않고 기존의 비평을 새 버전에 맞춰 수정하는 행위는 쓰레기 같은 짓이에요. 새로 편집된 영화는 그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영화이고, 그건 곧 새로 쓰여진 영화라는 말입니다. 매 판본마다 다른 비평이 필요해요. 감독의 '진본'이란 없어요. 두 개의 판본이 있다면 A와 B라는 두 개의 영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게 어떤 판본이냐와는 별개의 문제죠. 감독의 의도이든, 작고한 감독의 복원판을 찍어내는 장사든...

알라딘- DVD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부가영상같은 서플먼트는 잘 보시나요?


정성일- 아뇨. 거의 본편만 봅니다.

알라딘- 아, 약간 의외네요. 영화에 대한 보조 자료들이 들어있어서 잘 챙겨보실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감독 코멘터리 같은 것들요.

정성일- 그 코멘터리들을 보면 대개 잡담하고 있잖아요. 오히려 본 영화의 느낌을 망치는 것 같아서 싫어요. 서플먼트는 신중하게 골라서 봅니다. 개중에는 그 영화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피핑 톰>의 서플먼트가 그랬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프랑스 출시판에 수록된 것도 좋았어요. 끌레어 드니가 코멘터리를 담당하고 있는데, 홍상수에 대한 아주 색다른 이해를 보여줘요. 반면에 마틴 스콜세지가 홍상수 영화에 코멘터리를 단 것도 있는데... 그건 뭐 스콜세지라는 이름 말고는 볼 게 없던데요(웃음).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어요. 잘못하면 영화 자체의 감상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특히 한국의 대다수 코멘터리들을 보면 스태프들의 잡담으로 이뤄져 있어요. 사람들은 소중한, 중요한 얘길 듣고싶어 해요. 저는 쓸데없는 코멘터리를 경멸합니다.




알라딘- 영화를 직접 만들 때와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의 차이를 물어오신 분도 계십니다.

정성일-
영화에 대해 쓸 때는 영화를 마음 속에 두죠. 어떤 객관적인 개체가 아니라 내 마음 속의 영화를 생각합니다. 영화를 찍을 때는 그 모든 순간들을 포함해서 제가 진짜 평론가가 된 것 같았어요. 쇼트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과정들, 거절하고 받고 기다림을 결정하는 매 순간들이 비평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었어요.

알라딘- 원론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과 말하는 것이 겹쳐가는 거군요.

정성일-
네. 영화를 비평할 때도, 찍을 때도 똑같은 시네아스트죠. '비평가였고 감독도 된' 게 아니예요. 뭔가 아주 다른 일을 한 게 아닙니다.




알라딘- 네 마지막 질문입니다. 쓰시는 글이 너무 어렵지 않은가 하는... 말하고 보니 질문이 아니네요(웃음). 다르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정성일의 글을 읽고 싶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난이도를 조절해줄 생각은 없는지? 혹시 본인의 글이 어렵다는 사실을 몰라서는 아닌지(웃음)...


정성일- 이렇게 대답을 하죠. 저는 읽는 이를 설득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게 글이란 내 자신의 생각이 진전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기록일 뿐이에요. 영화를 통해 어떤 사고를 갈데까지 가도록 하는거죠. 제 글은 '내 질문에 내가 답을 하는 과정'입니다. 나와 영화가 대면하는 게 아니예요. 영화를 본 나와 글을 쓰는 내가 대면하는 거죠.

종종 저는 문장 대신에 단어들을 나열할 때가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어떤 생각이 나고 그걸 쫓아가느라 그래요. 그런데 글을 다듬으려는 과정에서 그 생각 혹은 느낌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제겐 처음에 떠올랐던 생각을 붙잡는 게 더 중요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질문만 있는 경우도 있어요.

(잠시 침묵) 질문은 종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영화가 끝나요.

(잠시 침묵) 내 두뇌 안에서 어떤 영화를 종결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을 끝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가 제게는 가장 위대한 영화예요.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고, 더 나아가게 하는 영화입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그 나아감이에요.

독자 여러분들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서 대답 혹은 해답을 구하지 마십시오. 마치 이야기를 나누듯이,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글의 리듬을 통해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리듬을 통해 질문하고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이 제가 쓰는 글입니다. 저는 제가 영화를 생각하는 과정이 그 영화가 가진 리듬에 포개졌으면 합니다. 제 어떤 글을 읽었는데 그 영화의 리듬을 느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제게는 최상의 찬사가 될 겁니다. *주2


알라딘- 오늘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번외 질문들

알라딘- 이번 책을 사랑해주신 독자분들께 딱 한 권의 책만 추천해 주신다면?

정성일- 아까 말씀드렸던 하스미 시게히코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로 하죠. 영화에 관한 위대한 책이에요. 오즈 감독을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를 맹렬히 파고듭니다.

알라딘- 요즘 개봉작 중에 추천하고프신 영화는 뭐가 있나요?

정성일-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 그리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죠. 한번 봐봐요.

알라딘- 넵.




.
*주1)
영화가 발생할 당시, 그리고 영화가 예술로 접어들던 당시의 시대상황이 '예술로써의 영화'에성을 부여했다는 점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께는 영화 역사서와는 별도로 빌리 하스의 <벨 에포크, 세기말과 세기초>, 그리고 자크 오몽의 <영화와 모더니티>를 권해 드립니다. 참고로 '영화는 어떻게 예술이 되었을까'의 답은 같은 문단에 힌트가 있습니다.






*주2)
다소 추상적인 개념인 '리듬'은, 결화가 뿜는 총체적인 감각적-정서적 진동 및 그 박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문장의 리듬'을 예감케 하는 영화 책으로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을, 또한 리듬에 관한 언급을 포함해 인터뷰 전체에 흐르는 들뢰즈의 전류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클레어 콜브룩의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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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09-3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그러니까 본인 글이 독자에게는 어렵거나 말거나 그냥 죽 맘대로 쓰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어렵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신 거고요. 저로서는 숱한 철학자/비평가 이름의 언급보다는 누군가의 자유로운 '생각'을 그것도 영화를 많이 보지 않은 주제에 따라가야 하니 어려울 수 밖에 없는거고. ㅠ 문제는 제가 책에 나온 영화를 다 본 게 아니라서 더 심각해지고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9-30 17:04   좋아요 0 | URL
누구를 독자로 상정하느냐는 결국 저자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어떤 개념이나 현상을 해설해주고 풀이하는 역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목적이 다르다고 봐야겠죠. 어쩌면 그게 '정성일답다'는 그 개성(위력)의 출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이 공부라도 하실까요 ^^;;

... 2010-09-3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고다르의 <알파빌>을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9-30 17:48   좋아요 0 | URL
아, 인터뷰에는 <알파빌>이 없었는데 뭔가 영감을 불러일으켰나보네요 ㅎ.
물론 저도 참 좋아하는 영화임다 T_T

... 2010-09-30 17:55   좋아요 0 | URL
MD님 댓글읽고 보니 제가 쓴 두 문장이 연결이 잘 안 되는군요. 저만의 의식의 흐름...ㅎ
이전 페이퍼 어디선가 정성일씨 책 소개하시면서 알파빌을 알려주셨어요. 책 속에서 장 뤽 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나왔는데 저는 프랑스 고전영화를 많이 보진 못했거든요.

외국소설/예술MD 2010-10-01 00:12   좋아요 0 | URL
아.. 표지 얘기에 알파빌이 있었죠. 사실 저도 그게 SF라는 걸 몰랐다면 볼 생각이 없었을 거예요 ㅎ.
덕분에 불란서 영화들에 대해 더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꼭 알파빌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드는 (불란서) 영화를 딱 만나시기를.

어영부영 2010-09-3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고민을 해결해주셨군요..부..부끄럽..저는 앞으로 저의 죄의식을 즐기겠..ㅋㅋ그리고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괜한 오해와 편견을 안 갖게 되는 듯 싶네요..하아..공부를...ㅡ.ㅡ;;

외국소설/예술MD 2010-10-01 00:17   좋아요 0 | URL
천기누설 무릎팍..;

요즘 다시 이것저것 뒤적이면서 드는 생각은, 세상 어디엔가는 분명히 자신이 도전하고 싶어하는 공부가 있다는 겁니다. 근거없는 예감이지만요. 그걸 찾으면 사는게 더 좋아지겠죠.

부디 좀더 즐겁게 정진하시기를 바랍니다.

Tomek 2010-10-0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D
와라라라락~

외국소설/예술MD 2010-10-04 16:43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셨어야 할 텐데요. 늘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

파인 2011-01-20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인상적이에요, 수첩에 적었습니다 ^^; 좋은 인터뷰 잘 읽었습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1-01-21 09:40   좋아요 0 | URL
네 그죠. 좋은 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의 중요함 말이죠..ㅎ

책사랑 2012-03-03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락의 에티카 구매하러 알라딘 방문했다가 여기까지 오게됐네요~ ㅋㅋ
1, 2부 휘리릭 읽고 댓글 남깁니다ㅋㅋ
평소에 정말정말 궁금했던 질문 & 감독님의 답변이 잘 압축돼 있어서 좋았어요.
정성일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한결같음과 치열함! 가슴이 뜨거워져요.
yo! 좋은 인터뷰 기사 고맙습니당~ㅋㅋ

외국소설/예술MD 2012-03-06 10:16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댓글을 보는 게 제 일을 통틀어 가장 기쁜 일이에요. ㅎㅎ

어떤날 2014-12-2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주석 단락 참고도서를 보니 영화 및 미학 공부를 꼼꼼히 하신 분 같습니다.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4-12-26 11:57   좋아요 0 | URL
저도 덕분에 간만에 본문을 읽었더니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도서 목록에 넣은 책들 중에는 이제 기억에서 가물가물한 것들도 있네요. 다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좋은 계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가다 2022-04-16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들수록 귀찮아져요, 타인이.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싶어진다는. 이해는 상대가 원하면 할 거고 안 원하면 안할 거고. 설득하고 설명하고 이런 게 귀찮아지더라고요. 알아들을 사람, 듣고 싶은 사람은 읽으시고 아니면 지나가세요, 이런 심정이랄까요. 정성일씨는 뭐 젊었을 때부터 첨부터 그랬나 싶긴 한데 첨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셨겠지만 하다보니 사람들이 어렵다 그랬을 거고 근데 자긴 고쳐지지 않았을 거고 그러다보니 걍 알아듣고 싶으신 분은 읽으세요 이런 생각이 되신 게 아닌가 싶네요.
 

 언젠가 영화는 세상이 될 것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인터뷰, 1부.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둘러싼 이미지는 여러 가지입니다. 달필과 달변. 말을 글처럼(!) 사용하는 사람. 엄청 어려운 말을 자주 쓰는 사람. 영화를 쇼트 단위로 분해(혹은 난도질)해버리는 숏커트 매니아. 그래서 영화의 구조 안에서만 사는 것같은 사람. 영화 구조주의자. 영화 순혈주의자. 영화에 대한 낭만도 환상도 없이 온갖 분석에만 몰두하는 외골수. '평론가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것들만 헤집는 것 같다'라고 할 때 누군가에게는 가장 먼저 떠오를 이름.


  이중에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아닐까요. 혹은, 사실이긴 한데 사람들이 그 사실 자체를 오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혹시 그에 대한 어떤 오해는 우리가 영화 자체를 오해하고 있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요.


  답변을 들으면서 더 하고싶은 질문이 계속 생겨나는, 그러나 시간상 참아야만 했던 안타까운 인터뷰였습니다. 그러나 윤곽은 잡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영화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술MD 최원호






알라딘- 책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웃음). 왜 잘 팔릴까요.

정성일- 음... 잘 모르겠어요. 영화가 흥행할 때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잖아요? 영화 <아저씨>가 원빈이 나온다는 이유(웃음) 하나만으로 성공한 건 아니니까요. 그것처럼 이 책에도 그런 여러 요소와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출판계가 돌아가는 건 잘 모르고, 그건 아마 이 분야의 전문가 분들께 여쭤봐야 답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각 분야들의 전문가를 존중합니다(웃음).

사실 영화에 관련된 책을 내는 사람들은 영화 책들이 그렇게 큰 반응을 얻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저도 임권택 감독과 김기덕 감독과의 인터뷰 책을 냈었는데 그게 그렇게 판매가 좋진 않았던 걸로 알아요. 그러고보면 1970년대에는 문학비평집들이 많이 읽혔지요. 김현, 정과리... 많이 사서 읽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안 사게 됐어요. 딱 한 권 예외가 있는데 신형철이 쓴 <몰락의 에티카>예요. 그 외의 평론들은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과 교감이 없이 그냥 자기 얘기만 하는 것 같거든요.

다시 생각해 봤는데, 이번 책을 사시는 분들은 그냥 영화 팬, 나머지는 올드독 팬들이 아닐까 싶은데(웃음).


  단 한 권.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평론집  




알라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제목은 중의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비교적 일반적인 의미, 즉 시뮬라르크의 증대와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대한 것, 즉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분석 혹은 예측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제목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말 그대로 영화의 어떤 진심 혹은 열망이 세상과 결국 소통할 방법을 찾게 되는, 영화가 곧 세상이 되는, 희망이나 목표 같습니다. 그리고 그 두 의미는 서로 역설적이고요. 혹시 그런 중의적 배치를 염두에 두셨나요?

정성일- 음... 우선 감사합니다. 이 책 내고 인터뷰를 여러 번 했지만 그걸 물어봐준 사람은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 제목을 단순히 한 시네필의 호기어린 메시지 아니면 들뢰즈의 맥락대로만 생각해서 좀 실망했었어요.

물론 저 제목은 들뢰즈의 말이죠. 들뢰즈가 썼을 때는 음울한 의미였어요. 실재와 재현이 뒤섞이고 때로 자리가 바뀌기도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죠.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9/11을 말할 때 사람들이 마치 영화 같다고 했었죠. 현실이 영화를 재현하는 것, 스펙터클이 이 세계의 뭔가를 뒤집었어요. 리얼리티가 재현을 재현하게 되는 역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21세기의 유일한 목표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만큼 실재의 위치가 뒤집혀서, 잘못 지정되어있다는 것이고, 그게 시급한 문제라는 거죠. 그래서 철학에 비추어진 영화는 주로 비관적이에요.

(잠시 침묵) 일개 영화 평론가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해야 해요.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방어함으로써 나쁜 것과 구분짓고, 그것으로 긍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해보죠. 언젠가 세상은 '나쁜' 영화가 될 것이다, 가 철학의 이야기라면, 저는 언젠가 세상은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싶다, 좋겠다, 되어야 한다... 시급하고 당면한 과제죠. 영화는 과제입니다. 영화를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로맨틱한 환상 같은 걸로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라딘- 방금 말씀과 책 속의 김선일 비디오, 지아장커와의 대담 등을 종합해보면, 영화는 단순히 스펙터클이나 가상 현실의 체계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적으로 동시대를 표현하고 그와 소통하기 위한 또다른 종류의 어법일 수 있다는,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말씀이신데요. 이건 그간 정성일이라는 이름에 대한 선입견과는 거의 반대되는 이야기들 같습니다. 이를테면 영화 순혈주의자라거나(웃음), 혹은 영화 영성주의자라거나 하는, 영화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사람 같은 이미지 말이죠.

정성일- 하하, 영성주의자라. (웃음)

알라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와 영화가 서로 어떤 합일점 혹은 통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정성일- '이미' 모든 예술 중에 영화가 세상과 가장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잘못하면 이 세상과 영화는 서로 뒤섞이거나 위치가 혼동될 위험을 갖고 있죠. 그와 반대되는 게 음악이 아닌가 싶어요. 루카치는 말년에 음악에 대해 몰두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는 데는 실패했죠. 그만큼 멀리 있어요. 말하자면 현실과 예술의 거리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고, 영화는 가장 가까이에, 음악은 가장 멀리에 있는 것 같아요.

다시 영화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찍어도 그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영화 속에 세상의 흔적이 잠입하고, 그것이 영화에 어떤 동력을 제공하고, 움직이고 활동하게 만들죠. 이런 특성은 세상이 영화에 미치는 힘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영화가 세상을 흡수하는 능력이기도 해요. 그때 중요한 것은 만드는 자의 의지예요. 현실의 어떤 점을 흡수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때로는 현실에 직접적으로 굴복하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치게 심미적으로 흘러가 버리기도 해요. 둘 다 아닙니다. 틀린 방법이에요.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선한 의지' 예요.

자, 이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죠.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부터는 악인가. 이쯤되면 철학의 지점에 다다라요. 따라서 저는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윤리-미학-정치라고 생각해요. 이 요소들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성립할 수 없어요. 이 윤리-미학-정치가 영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흔히 돈이냐 예술이냐라는 식으로 질문하는데, 그건 틀린 질문이에요. 너무 많은 것들을 단순화하죠. 틀린 질문이 틀린 답을 유도하고, 그런 식으로는 절대 어떤 결론에 다다르지 못해요. 예술이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질문의 가능성을 좁혀버려서는 안돼요.



알라딘- 책에서도, 지금 인터뷰에서도 사회와 영화와의 관계, 탐색의 다양성, 이런 주제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CinDi(시네마 디지털 서울 영화제)에 참여하시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인가요?

정성일- 네 참여하죠. 그건 임무예요. 굉장히 큰 임무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의 흐름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동시대에 영화는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줘야만 해요. 단지 그 이유 뿐입니다. 아마추어적이죠. 그런데 영화제는 직업이 아니라 취미여야만 하거든요. 취미에서 한발만 벗어나도 바로 비즈니스-폴리틱스의 세계가 되어 버려요.

영화제에는 돈이 들어가는데, 취미다보니 그냥 돈은 쓰기만 하고 끝나요(웃음). 소위 문화 사업, 돈을 못 버는 일이죠. 여기에 누가 돈을 대면 돈 대신에 명분이나 다른 어떤 것을 가져가고 싶어 해요. 결국 영화제의 비전이나 태도attitude가 후원자들이 부여한 임무와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져요. 고용되는 것, 직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영화제는 취미여야 합니다. 프로페셔널한 아마추어랄까(웃음). 물론 현실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죠. 맞아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비교적 잘 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알라딘- 이쯤 되면 추천도서를 받는데요. 지금 인터뷰 분위기에 맞춰서(웃음), 미학적으로만 분석한 영화 책 말고, 세상과 관계하는 영화에 대해 읽어볼 만한 좋은 책이 있을까요?


정성일- 음,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책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영화 평론가답게(웃음) 60-70년대의 고다르 영화로 하죠. 저는 영화와 정치의 관계, 정치적 테제의 표현, 매체의 미학적 문제, 그리고 그런 메쏘드method들을 실행하는 방식 모두를 고다르에게서 배웠습니다. 거기에 대해 고민이 생길 때면 늘 다시 고다르로 돌아가요.

물론 이건 제 경우이고, 다른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1920년대의 소비에트 영화, 혹은 지젝이라면 레닌이겠죠. 요새 재장전도 하고(웃음). 혹은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 영화들. 68중심의 유럽 영화들. 90년대의 중국 지하전영.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역시 제게는, 영화정치라는 하드한 측면에서만 보자면 고다르죠.


  <레닌 재장전>, 알랭 바디우 외 (물론 지젝도 있음)



알라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 보면 소위 영화광들이 렌즈와 필름과 같은 하드웨어적인 고찰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이어 말씀하셨는데요. 그 중요함이란 어떤 것인가요?

정성일- 결국... 영화에서 봐야 하는 건 영화죠. 무슨 말이냐면, 사람들은 보통 영화에서 줄거리나 배우를 본다는 거예요. 비평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제가 동료들의 비평에서 가장 실망하는 경우는 비평이 영화와 TV를 구별하지 못할 때예요. 그럼 영화에서 영화를 본다란 뭘까. 쇼트를 보는 겁니다. 쇼트의 활동 범위. 활동력. 목적. 미학적 개념. 씬 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그 위치들의 상호 조직과 관계. 즉, 영화 안에서 쇼트라는 세포가 생명을 얻는 과정. 그 쇼트의 질료적 기반은 절대적으로 테크놀러지 그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지금 우리 대화가 영화로 촬영된다고 치면, 그 포맷이 1.33이냐 1.66이냐, 아니면 씨네마스코프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면으로 만들어집니다. 지금 우리를 찍는 장면, 이 씬을 규정하는 건 출연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그 질료인 거예요. 저는 <아저씨>에 원빈이 나오냐 현빈이 나오냐, 무슨 빈이 나오냐는 관심이 없습니다(웃음).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를 1.33으로 찍었어요. 그런데 <게리>는 그가 유일하게 씨네마스코프로 촬영한 영화입니다. 이 포맷 자체가 이미 그 두 영화의 차이를 설명하기 시작해요. 그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씬-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씬을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가능성을 두고 결정을 해야 돼요. 카페 가운데냐 창가냐, 아침이냐 오후냐, 빛의 각도가 어느 정도냐, 여기서 영화의 하드웨어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해요. ASA(필름 감도) 몇 짜리 필름을 쓸 것이냐는 지금 창밖의 풍경을 함께 담을 것이냐, 아니면 노출 차이를 통해 하얗게 날려버릴 것이냐를 결정하는 잣대가 됩니다. 그 감도 차이만으로도 이 쇼트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갖게 돼요. 연출자의 의도가 전적으로 이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이건 모든 영화에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블록버스터든 독립영화든, 제작비가 얼마든, 모든 쇼트는 주어진 환경 하에서 그걸 만드는 사람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네필이라면 거기에 호기심을 보여야 해요. 영화에 대한 질료적 이해 없이는 결코 쇼트의 관계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음악을 예로 들면... 음악을 그냥 많이 듣는다고 해서 음악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씨디 장수와 그에 비례한 지식만 늘어납니다. 누가 작곡하고 누가 연주하고...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아무리 들어도 뭔가 제자리를 도는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죠. 그러다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분과 그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한참 얘기하다가 그 분이 조심스럽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혹시, 악보를 못 읽으시는 건 아니죠?'

그때 진짜 철렁했어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죠. 지금은 아주 잘은 아니지만 악보를 읽을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음악이 더 이해가 되고, 더 많은 걸 느끼게 됐어요.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변화가 이해의 폭을 넓힌 거죠.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아무 생각없이 보는 영화에서 얻는 건 목록들, 그러니까 감독 이름, 배우 이름, 제목 뿐이에요. 어느 순간부터는 양적으로만 팽창할 뿐이죠. 많이 본다는 것, 양적 팽창이 질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moment, 그것이 질료적 기반에서 시작됩니다.





  *글이 길어져(정확히는 답변이 길어져) 이 인터뷰는 2부로 나뉩니다. 지금까지는 MD의 질문이었으며, 2부는 독자 여러분들의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해안선>의 마지막 자막에 대한 해설, DVD와 코멘터리의 세계, 영화로부터 주어진 감각과 그에 대해 사유하기, '정성일 씨는 왜 글을 어렵게 쓰시나요' 등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부 가기는 <여기>를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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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MD김효선 2010-09-1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열하네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9-16 20:07   좋아요 0 | URL
열성같은 걸 막 끼얹나..

poptrash 2010-09-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 준비를 제대로 안하셨나봐요 예술역사엠디님...

외국소설/예술MD 2010-09-17 13:26   좋아요 0 | URL
지적은 이유부터 부탁드립니다.. 어떤 점이 문제인가를 보고, 추가할 사항이면 추가를 하고, 해명할 게 있으면 해명하고, 부족한 점이면 받아들이고 하겠습니다.

aida 2010-09-1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질문과 답변이 특히 재밌네요.
덕분에 잘 봤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9-17 17: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질문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더 들어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잠시 화장실 가서 주먹 꽉 쥐고 돌아왔어요.

독자 2010-09-17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준비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위에 위에 댓글다신 분께서 어떤 점을 보고 준비를 안하셨다고 하는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만 잘 정제해서 질문한 것 같아 보이는데.. 굳이 아쉬움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시간상의 제약에서 비롯된 것일 테여서, 여기서 논해봐야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아 보이구요. 아무튼 전 잘 읽었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9-17 17:5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진짜 고수는 부족해도 아닌 것처럼 마감질을 잘 해야 하겠죠...
2부도 꽤 재밌습니다. 중요한 질문들도 있고요. 애티튜드에 대한 얘기가 중점이 될 것 같습니다.
딱 요거만큼은 기대해주셔도 좋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2010-09-1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성일씨의 행보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인터뷰의 핵심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정성일은 좋은 질문을 한 사람에게는 좋은 답변을 준다'. 물론 앞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답변이 직접적이지 않았다고 좋은 답변이 아니라고하는 할 수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유적인 답변에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있더라구요. 이런 직접적인 질문을 하는 인터뷰만 있는것은 좋은것은 아니지만 앞선 매체와의 인터뷰를 보완하는 인터뷰라고 생각해서 참 좋은 것 같습니다(질문자님의 의도시겠지요?). 질문자님의 직관도 반짝반짝~ 2부가 기대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9-17 20:48   좋아요 0 | URL
앞선 매체들의 인터뷰를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제 의도를 거의 완벽하게 맞추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이전 인터뷰들을 보면서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조차 추상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조차 있어서, 아예 인터뷰에다가 해설과 각주를 붙일까 고민했습니다. 주제넘은 일인 것같아 접었습니다만..

대신에 그의 글과 그 글을 둘러싼 오해들에 대해서는 2부에서 본인의 입장을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2부에서는 여타 매체들의 앞선 인터뷰들의 링크도 수록할 예정입니다.

즐겁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키노 2010-09-2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꼼꼼히 읽고 질문을 찾아 던지신 거 같네요, 잘 읽고 갑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9-27 14: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흡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

별헤는밤 2010-09-2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은 후에 이 글을 읽고나니 한 번 더 요점정리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인터뷰어의 노력이 인터뷰이의 성실한 답변에서 모두 드러나네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ㅎ

외국소설/예술MD 2010-09-27 14:01   좋아요 0 | URL
네 2부도 곧 올라갈 예정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

어영부영 2010-09-2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석이 지났어요. 추석이 지났는데요. 추석이 지났다구요!!!

외국소설/예술MD 2010-09-30 12:01   좋아요 0 | URL
날짜 기약은 드리지 않았지만 기다리셨으니 죄송합니다.;
인터뷰는 부업이다보니..(웃음)

아마 오늘중으로 업로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원래는 (당연히) 제가 질문지를 작성하고 인터뷰를 합니다. 이번에도 그냥 혼자 인터뷰를 진행할까 했습니다만.
왠지 독식하는 듯한 기분. 맛있는 걸 혼자 등 돌리고 먹는 기분. 영화평론가 정성일이라니 말입니다.

당신이 영화 순혈주의자-영성주의자이건, 혹은 그 반대편이건간에 마음 속에 질문 하나쯤은 품고 있을법한 분이니까요.
최소한 그라면 다른 입장, 다른 포지션이더라도 '대화'가 가능할 듯한 기대감. 그건 갈수록 만나기 힘들어지는 미덕이니까.
마치 프로야구 김성근 감독에게 Q&A가 주어지자 모두가 '야구'에 대해 물었던 것처럼.

질문은 13일까지 모집합니다. 모든 질문을 다 전달해 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미리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p.s: 광고말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표지는 영화 알파빌의 한 장면이죠. 저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이미 구입하신 분들은 책을 먼저 읽었다는 이점이 있으니(;;), 뒤늦게 이 책을 찾아오신 분들을 위해 저 두 권을 합친 <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용 경품을 마련했습니다. <언젠가..>의 표지 포스터인데요, 정성일 님의 싸인이 첨가돼 있습니다. 저도 알파빌 좋아해서 정말 갖고 싶습니다. 이미 구입하신 분들께서는 (역시 이미 구입한) 저같은 기분일까요.; 수량 한정이며, 알라딘 단독입니다. 뒤늦게 찾아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이벤트는 다음주쯤 시작할 예정입니다.

p.s2: 추신이 더 길었지만 추신 때문에 쓴 글은 아니고 그냥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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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2010-09-0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진지하고 심원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방점이 찍히는 것 같아서 안 느껴도 되는 이상한 죄의식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요. 이건 제가 골수에 사무친 인문학도라서(는 절대 아닐 것 같고)
감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사유가 가능한 지, 가능하다면 어떤 것일지.. 궁금하네요.

어영부영 2010-09-09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신: 포스터는 안부럽네요 훙! 이쁜여배우가 나오는 포스터따위,

Tomek 2010-09-10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번째 질문.
『필사의 탐독』중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에 관한 질문입니다. 전 이 영화를 극장에서, 비디오로, 그리고 DVD로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끝에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기원합니다.”라는 자막에 대해서 선생님은 장문의 글을 쓰셨습니다. 저는 모든 영화를 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 장면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정확히는 자막)은 제게 기괴한 쇼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극장에서 그리고 비디오로 본 <해안선>에는 이 자막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지만, DVD에는 이 자막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자막이 김기덕 감독의 의도 하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제작사에서 임의로 뺀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일부러 DVD의 음성해설과 부가영상까지 모두 챙겨보았지만, 이 자막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었습니다. 물론 이 자막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되면 영화의 판본이 어느 것이 최종본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해안선>에서 마지막 자막의 누락이 김기덕 감독의 최종 판본이라면, 선생님은 그 자막에 대한 생각을 철회하실 것인지요? 그리고 영화에 대한 최종 판본이란, 결국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요?

두 번째 질문.
트위터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트위터에서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선생님은 예외 없이 두 편씩 비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와 임상수 감독의 <하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 그리고 최근의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물론 이런 글쓰기는 선생님의 오랜 전통(?)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에게 비교를 통한 영화 읽기 혹은 생각하기는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탄식.
바다출판사는 먼저 책을 산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를 진행하라! 진행하라!

치니 2010-09-1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것이 없고 흥미 위주로만 세상을 살다보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는데,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뭔진 알겠는데 그걸 참 어렵게 풀어 썼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좀 있었어요. 글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처럼, 어렵더라도 이해가 좀 안되더라도 자신이 쓰고 싶은대로 쓰고, 그걸 따라오는 건 독자의 몫이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아니면 정성일 선생님 본인은 정작 어디가 어렵다는 건지 당최 모르시다보니 그렇게 된 걸 수도 있겠지만요 ㅠ)

2010-09-12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런던도 인생도 만만치 않아

<런던 일러스트 수업>의 두 저자, 일러스트레이터 먼지mungi & 써니sunni 인터뷰



인터뷰를 몇 번 해 봤지만, 동시에 두 사람을 인터뷰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네, 저자가 두 명이었죠.

나름 놀라운 인터뷰였습니다. 질문이 던져지면 두 분이 서로 논쟁과 토론을 거듭하며 자체 진행을 해 나가는 편리한 방식이었죠(;;). 편집 과정에서 제거된 "아니 내 생각엔",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저를 보며)근데 있잖아요" 등등이 수십 개  있었습니다. 그만큼 거침없고 자유로운 인터뷰였죠. 가끔은 받아적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보다는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다면 참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누님들이셔서 친구먹자는 얘기는 못했습니다)

보시죠. 서로 다른 두 분의, 두 개의 런던입니다. 혹 여러분이 떠나고 싶을 때, 누구에 맞추어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할지 한번 보세요. 아참, 본문 일러스트는 써니/먼지님 꺼니깐 막 퍼가시면 안됩니다~

-예술MD 최원호





써니와 먼지는 달라요


알라딘- 안녕하세요 알라딘입니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써니- 출판사에서 일했었어요. 디자인 파트도 했고, 아트디렉팅도 했고요. 신인 작가들도 발굴하고, 책도 기획하고, 저도 같이 작업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회사 그만두고 영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그림책 <검은 사자>를 냈어요. 이제 다음 책도 준비하고, 전시랑 책 표지작업도 하고 있어요.

먼지- 인터넷에 만화를 연재했었거든요. 웹툰요. 그러다가 카툰북을 냈고, 말아먹었고(웃음) 한참이나 그 상태로만 있다가(웃음) 영국에 갔어요. 애니메이션 과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러스트 작업을 같이 했고요. 그러다 우연히 표지 일러스트 작업을 맡았는데, 하나 하고 나니 계속 의뢰가 들어와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무심코 던진 행운에 개구리가 맞는달까(웃음).


  
먼지님(왼쪽)과 써니님(오른쪽). 아무리 봐도 동안 콤비.



알라딘- 일과 유학이라는 긴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요. 지금의 자기 모습에는 만족하시나요?

써니- 지금이 얼만큼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전 안좋은 것보다 좋은 것들에 더 집중해요. 행복주의자라고 할까. 물론 영국에 있을 때도 불만이나 불안한 점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빠져서 살 수도 있었죠. 그런데 거기 빠져들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신경쓰지 않으려고 해요.

먼지- 저 분은 인상 자체가 벌써 여유로와 보이시잖아요(웃음). 알아서 호감을 불러 일으키는(웃음). 자신감도 있어보이고.

써니- (웃음) 생각해보면 언제나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있잖아요. 작업이든 취미든, 그런 다른 것들에 주의를 돌리면 부정적인 생각이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단점보다는 좋았던 걸 기억하는 편이에요. 회사 다닐 때도 그랬고, 영국에서도 결국 모든 과정이 내가 원하는 작업을 위해 하나씩 쌓아온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먼지- 그런데 언니 그림은 안그렇잖아요. 완전 우울하고(웃음).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랑 다른 그림을 그려요. 자신이 느껴보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매력을 느낀달까. 그래서 제 그림은 밝아요(웃음).

알라딘- 그럼 먼지님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편이신가요?

먼지- 기본적으로는... 과거는 그게 힘들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재밌는 기억으로 남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현실을 보고 있으면 늘 힘들고, 이런저런 작업 다 해보고 싶은데 아무도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같고 그래요. 지금도 표지 일러스트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프리랜서는 힘들거든요. 제가 버는 돈을 연봉으로 치면...(웃음)

써니- (먼지에게) 그래도 좋은 점들도 있지 않아?

먼지-
아, 있어요. 유학 다녀오고 나니 알바생 취급 안한다는 거(웃음). 그런 게 좀 있거든요. 하청받는 느낌이랄까. 유학 다녀와서는 책도 냈고, 첫 책이 잘 돼서 좋았죠. 이거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돼! 했는데 다음 책이 안 나가고(웃음) 하면서 왔다갔다 해요.

써니- 이 친구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먼지- 그게, 잘 됐을 때는 주변에서 막 이것저것 해 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잘 안 되면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해요. 그러면 왠지 망한 것 같고 부족한 것들만 보이고 그래요. 나 좀 예뻐해주지.

알라딘- 그거 진심으로 안타깝네요. 그런데 두 분 정말 다르시군요.;

먼지&써니-
네 그래서 사람들이 재밌대요.


    
Sunni(왼쪽) & Mungi(오른쪽) in London



유학을 앞둔 두 가지 자세


알라딘- 영국에 가기로 확정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써니- 원래 가볍게 다녀올 생각이었어요. 출장 다녀오듯이요. 마음 편히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와야지라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걱정같은 것도 없었고요.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문제였달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다들 아쉬움도 느끼고 걱정도 하는데 저는 아무 두려움도 없었거든요. 제가 원래 겁이 좀 없어요.

먼지- 저는 20대일 때는 아무 두려움도 없었는데(웃음) 서른 즈음이 되면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생겼어요. 언제든지 어떤 일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하고싶은 일이 아니라 사건들이 터지는 거예요. 영국에도 가자마자 별별 일로 엄청 고생했잖아요(웃음). 그런 걸 대비해서 계속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려고 해요. 걱정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네거티브하달까.

써니- 그러고보니 얘가 이 책의 처음 컨셉트에 대해서도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웃음) 그런데 그런 성격 때문에 준비성이 참 좋아요. 이런저런 일에 다 대비를 하는 거죠. 만약의 사태를 다 떠올려 놓는 거예요.

먼지- 제가, 남들이 보기에는 막 아무렇게나 하는 것 같지만요. 혼자서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려요. 예상 상황을 만드는 거죠. 그래서 생각만큼 안되면 괴로워요. 사람들도 제가 20대일 때는 막 잘해주더니, 그 시절 지나니까 나한테 잘해달라고만 하고(웃음).



불친절해서 매력적인(?) 영국 

알라딘- 왠지 이렇게 다른 두 분이면, 영국에서 느낀 것도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특징은 뭐가 있었나요?


써니- 어떻게 보면 정말로 가르쳐주는 건 없어요.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런 가르침 같은 게 없어요. 한 친구한테 얘길 해 줬더니 그 친구는 막 뭐라고 하더라구요. 대체 뭘 가르치냐고.

먼지- 아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스킬을 절대로 안 가르쳐준다는 거예요. MA과정이 그래서 어려워요. 우리나라처럼 툴 사용법 가르쳐주고 하는 게 없어요. 자기가 다 알아서 해야 돼요.

써니- 숙제 내주는 건 딱 하나예요. 프로젝트. 주제를 내 주고 나면 학생들이 전부 알아서 해야 해요. 그 완성도가 유학 생활의 모든 것이에요.

먼지- 미국이랑 그런 점에서 달라요. 미국은 커리큘럼이 아주 꼼꼼하게 짜여져 있어요. 이거 하는 법, 저거 쓰는 법에 대해서 수업이 다 있구요.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수업마다 다 가르쳐 주고요.

써니- 미국에서 배우게 되면 학생들한테 하나 이상의 스킬을 만들어 줘요. 포토샵이든 아날로그 페인팅이든 그 분야에서 어떤 툴을 노련하게 다루게 만들어 주거든요.

먼지- 영국은 반대로 큰 틀만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학생들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제약이 없어요. 그게 자유일 수도 있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요. MA 1년 과정은 짧다면 아주 짧은데, 그 안에 최대한 빨리 적응해야 돼요. 그래서 유학오기 전에 실무를 하던 친구들이 잘 해요. 공부만 하다 온 친구들은 바뀐 시스템에 적응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알라딘- 성격이나 성향은 적응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나요?

먼지- 그런 것들도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성격보다는 태도가 중요해요. 유학 목적이 중요하거든요. 학벌에 목적을 두면 그냥 졸업만 해도 돼요. 실제로 그것 때문에 오는 친구들도 꽤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뭔가 이뤄야 할 목적이 있으면 거기에 모든 걸 쏟아야 돼요. 나이가 있는 유학생들이 그런 걸 잘 하죠. 목적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알라딘- 목적의식이 가장 중요한 거겠네요.

먼지-
(잠시 고민) 사실은 돈이 제일 중요해요. 그게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요. 유학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돈 문제가 많고요. 한국에서 뭘 배우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들이면서 배우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과제를 메꾸기만 하면 안돼요. 그 과제가 나한테 뭘 만들어 줄건가를 늘 생각하는 게 중요해요.

알라딘-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거죠?

먼지- 현실적으로 말하면 중퇴가 최악이에요. 돈은 돈대로 날아가고, 한국에서는 졸업장도 없으니 자리잡기도 힘들어요. 미처 다 배우지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써니-
그 모든 걸, 유학 온 자기자신이 스스로 찾아내야 돼요.

먼지- 영국식의 막강한 단점이기도 하죠.

써니- 맞아요. 자기자신에 대해 많이 알아둬야 해요. 계속 시야를 넓혀야 하고요. 영국에선 일러스트의 응용 범위가 유독 넓어요. 데이빗 슈링글리만 봐도 그래요. 얼핏 보면 낙서같고 장난 같은 일러스트인데 영국에서는 다들 알아주거든요. 경계인이 인정받는 구조예요. 다양성이 존중받고 창의력에 대해 개방적이에요.

먼지-
영국은 주류 미디어가 특히 보수적인 편이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발전할 여지가 있고, 거기서 스타도 생기고 그래요. 언더에서 시작해서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어요.

알라딘- 영국이 개방적인 문화 시스템을 갖고 있나봐요?

먼지- 네, 근데 작아서...(웃음)

써니-
시장이 작은 건 어쩔 수 없어요. 특히 어린이 쪽이 그래요. 그런데 잠시 프랑스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거긴 완전 다른 세상이었어요. 그림책 독자 중에 성인들이 아주 많고, 어릴 때부터 일러스트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나이 들어 다시 작가가 되는 식의, 아름다움이 재생산되는 시스템이 거기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어요. 영국은 일러스트의 실험성에는 열려 있지만, 자국 작품 위주로 돌아가는데다가 분야가 딱 나뉘어 있어요. 왠만한 작품은 번역도 잘 안 해요. 시장이 좁은데 그게 프라이드하고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음, 프랑스가 더 나은가? (웃음)



프랑스가 더 나은가? (농담)


먼지-
대신 영국은 미디어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의 위력이 커요. 마치 일본에서 만화가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거랑 비슷해요. 그 사회의 사고방식에 스며들어 있달까? 말은 안하지만 생활 속에서 느끼고 있는 거예요. 영국에서 공부하다 보면 그게 느껴져요. 불친절함의 매력이죠(웃음). 말없이 직접 보여주는 스타일이니까, 옆에서 도와주는 것 없고, 대신 뭐라고 하지도 않는.



남다른 영국에서 살아남는 두 가지 방법


알라딘- 그 자유 말인데요. 적응 못하는 사람들이 꽤 될 것 같은데, 책에는 나오지 않거든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되나요? 유학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걸까요?

먼지- 음, 모든 건 결과가 말해줘요. 과제도 결과가 말해주고요. 다 끝났을 때, 뭘 갖고 왔느냐가 중요해요. 조기유학 1세대 출신의 사회인들 설문을 봤어요. 그 중에서 70%가 유학을 잘 갔다고 생각했더라고요. 투자비용 대비해서 이득을 봤다고. 그런데 그 설문에는 진짜 실패한 사람들은 없다고 봐요. 실패한 사람들이 설문에 참여할 리가 없잖아요. 결국 자기가 마지막 결과를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성공인지 실패인지 알려면 그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써니-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과정이 즐거우면 의미가 있다고 봐요. 학교에서 1등했다고 해서 그게 뭔가를 보장해주지는 않거든요. 유학이라는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느끼고 배운 게 있으면 가치가 있어요. 결과에만 연연하면 정말 나중에 '진짜 결과'가 필요할 때 안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공부가 아닌 유학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독립이에요. 도와줄 사람은 물론이고 푸념을 들어줄 친구들조차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까요. 거기서는 혼자 이겨내야 돼요. 그것만으로도 배우는 거예요. 작은 문제 하나하나를 극복하고 이겨나가는 거예요. 그 매 과정마다 더 성장하느냐 아니면 무너지느냐의 갈림길이 되는 거죠.




갈림길들. 혹은 창문들.



알라딘- '런던 일러스트'와 '유학'에 대해 할 말이 정말 많으셨네요(웃음).

먼지- 네 그게, 원래는 학교의 프로젝트 소개를 하는 책으로 만들 계획이었어요. 사람들이 각자 프로젝트를 할 때도 도움이 될 수 있고, 한국에서도 그런 수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써니- 그런데 제가 그러지 말자고 했어요. 프로젝트 위주로만 보여주면 모자란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커리큘럼만 가지고 보여줄 수 없는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는 과정 전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먼지- 사실 혼자 작업하는 게 정말 힘들어요. 그냥 '이런 게 있으니까 해 보세요'만 가지고는 힘들어요. 호기심으로 해 보는 작업이 아니라, 열심히 작업하다 보면 어떤 전환점이 올 때가 있거든요? 그때 어떤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발견하라, 무엇이든



미래는 일러스트의 것이다!

알라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들께, 혹은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 여러분께 덕담 한마디.

먼지-
개인적인 희망인데요. 일러스트랑 관련된 책들은 주로 전공자들이 봐요. 그런데 전공자들이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재밌어 했으면 좋겠어요. 요즘 취미로 그림 그리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잖아요. 그 중에서 특히 일러스트가 인기가 좋고요. 책 표지에 이렇게 일러스트를 많이 쓰는 나라가 없어요. 그 외에도 문화 전반에서 이렇게 일러스트가 많이 쓰이는 나라는 드물 거예요. 아마 디자인이나 각종 시각적 작업에서 기본 토대처럼 여겨질 때가 오지 않을까 해요. 잘 될 거예요(웃음).

써니- 일러스트 왕국이 되면 좋겠어요(웃음). 일본만 해도 성인들에게서 만화가 어떤 원초적인 호응을 받잖아요.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림책이랑 일러스트, 그리고 다른 시각 예술들도 그렇게 서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보고, 그러고 나서 더 많이 만들고 그렸으면 좋겠어요. 좀 더 세상이 아름다워지는거죠(웃음). 그리고 그렇게 더 아름다워진 곳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커 갔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그렇게 되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 같아요. 앞으로 더 커 나갈 거예요.

알라딘- 희망하시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긴 시간동안 인터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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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이 사람을 죽이는 책을 어째서 추천하게 되었는가... 마지막 추천도서.


청소년 추천도서 이벤트 바로 가기입니다.



MD추천



푸른 불꽃
  / 기시 유스케 지음 / 이선희 옮김 / 창해


  이번 추천 시리즈의 마지막은 가장 망설였던 책으로 선택했다. 청소년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라서다. 우발적인 범행도 아니고 완전범죄를 노려 치밀한 계획 하에 사람을 죽였다. 요즘 어지간한 소재들이 청소년 소설로 잘 나오고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 치밀한 살인극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권하기에는 좀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 망설임이야말로 추천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슈이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이 17세의 고교생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불량 청소년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자전거 타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가족을 사랑한다. 여자친구도 있고 학교에서도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죽였으므로, 원인-문제를 찾아야 한다. 슈이치의 문제는 가족을 너무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점점 불행해져가는 자신의 가족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로 똑똑했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소중한 엄마와 여동생을 괴롭히는,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 엄마의 전남편을 어떡할 것인가. 그럭저럭 행복했던 가족은 이제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인데 세상에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심지어 법도 경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 틀리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남자에게서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본들 아무런 위안도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여차저차 해서 천신만고 끝에 폭력죄로 감옥에 간들, 길어야 몇 년 뒤에는 더 악랄해져서 돌아올 것이었다.

  자,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아직 가진 사람은 당신 뿐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못한다. 심지어 당신조차 그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이 물음은 다른 식으로도 가능하다. '이제, 정의란 무엇인가.'
 
  물론 슈이치의 선택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다. 죽어 싼 인간이 있는 것과 그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작가는 이 소년의 눈높이로 글을 쓰지만, 결코 그에게 동화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 자신조차 판단할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대체 뭘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질문은 후회의 다른 말일 뿐이다. 과거에는 만약이라는 게 없다. 돌이킬 수도 없다. 비극은 목을 죄어 들어온다. 당연히 모든 책임은 본인이 진다.

  <푸른 불꽃>을 추천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살다보면 사방이 벽으로만 둘러싸인 듯한 날이 분명히 온다는 거다. 결코 답이 없을 것 같고,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니가 나쁜 사람 아니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헤쳐 나가라는 소리가 아니다. 슈이치가 그 증인이다. 나는 이 책을 말하면서 '그러니까 이렇게 하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런 출구 없는 현실과 맞딱드렸을 때, 일단은 포기하지 말고 이를 악다물고 버텨달라고 말하고 싶다. 잘잘못은 세상이 정해준다(늘 옳지도 않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한 일에 책임을 지고, 혹 억울하더라도 일단 계속 버티는 것이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저렇게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사실 청소년들을 생각하면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미안하다. 현실은 일종의 계급사회다. 계급은 경제력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현실반경을 정의한다. 묘수도 기적도 없는 세상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년소녀들은 어딘가에 부딪힐 것이다. 나는 그 벽을 둘러싼 수많은 전략들 중에 뭐가 좋은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앞에서 주저앉지만은 말라고 부탁하고 싶다.

  엄마의 전남편을 죽이기 전에, 그래도 이 가족을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자각하던 순간의 슈이치는 마치 갑작스레 터져나온 폭죽처럼 빛났다. 푸른 불꽃은 결국 모든 걸 태워버렸지만, 그 발화하는 순간만큼은 더없이 아름다웠던 것이다. 불꽃이 되지는 말고 그 불꽃의 색깔만 기억해두자.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둘러싸고,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순간의 소년을. 이 책을 읽게 될 소년소녀들이 그것만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청소년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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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예술MD 2010-08-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는 20일 자정을 기점으로 종료됩니다.

aida 2010-08-2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추천글이라 그런가 왠지 더 감동적이네요.ㅎ
드디어 대장정을 마치셨군요. 애쓰셨습니다. 또 축하드리고요.ㅋ
덕분에 그동안 좋은 책들 많이 접했고 또 꽤 샀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0-08-23 09:08   좋아요 0 | URL
네, 출근하고보니 마치 당연히 있어야 할 스케쥴이 하나 사라진 듯한 느낌이네요.
많이 보아주시고 많이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체오페르 2010-08-2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몇일 이런 주제와 질문을 던지는 책들을 보다보니 마음이 싱숭생숭 하네요.^^;
이런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이군요?
청소년은 넘어섰지만ㅋ 저도 덕분에 즐겁게 봤습니다. 감사합니다,MD님^^

외국소설/예술MD 2010-08-23 09:08   좋아요 0 | URL
잘 보셨나요 ^^;
그것만으로 충분하네요 저에게는요. 아마 칼 세이건 본좌님 때문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ㅎ

치니 2010-08-2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이야 다르지만 이 글을 읽자니 구스반산트의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가 생각나요. 아들이 열일곱이 되어 그 영화를 최근에 봤는데, 제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올리던 걸요. ^-^ 그렇다고 애가 누굴 그렇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라 믿어요. 당연히 푸른 불꽃만 기억하겠지요.

다락방 2010-08-20 16:50   좋아요 0 | URL
파라노이드 파크 말씀하시는 거지요 치니님. 파크, 파라노이드 파크. 저 그 영화 포스터만으로 일단 좋아하기 시작해서 혼자 극장 가서 본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본 성인 1人

니나 2010-08-20 16:53   좋아요 0 | URL
이히. 나도요 나도. 미로 스페이스에서 봤어요.
그 영화의 스케이트 보드 타는 푸른빛 장면들이 왠지 푸른 불꽃이라는 제목과 잘 겹쳐져요...

오늘 글은 진짜 더 울컥, 하네요. 당일배송은 이미 오고 있는데... 보관함으로 가자 아가야...

치니 2010-08-20 17:16   좋아요 0 | URL
<파라노이드>는 <파라노이드 파크>로 일단 수정했고요, (고마와요 다락방님)
아이 참 최원호 피디님이 이렇게 우리끼리 노는 거 다 보고 있을텐데, 왠지 수줍. ㅋㅋㅋ

다락방 2010-08-20 17:31   좋아요 0 | URL
아 치니님. 최원호 엠디님 말씀하시는거죠? 피디에서 또 빵 터졌어요. 아 나 자꾸 이런거 말해줘서 치니님이 나 미워하겠다. 그치만 파라노이드 파크로 말해주라는 건 니나님이 시킨거에요. ㅠㅠ

니나 2010-08-20 17:52   좋아요 0 | URL
아, 시켰...다...라고도 할 수 있지만
파라노이드 파크, 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망설였..더여... ㅠㅠ

치니 2010-08-22 15: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피디님이라고 쓴 건 그냥 놔둘래요. 왠지 피디님 포스인 최원호 엠디님이기에. 이힛, 저의 실수로 여러분들이 즐거우신 거 같기도 하고.

외국소설/예술MD 2010-08-23 09:11   좋아요 0 | URL
네 뭐 피디면 어떻고 엔엘이면 어떻습니까.. 엠디보다는 피디가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요;
저도 구스 반 산트 좋아합니다. 특히 엘리펀트요.

다락방 2010-08-2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삶과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든 함부로 단정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위에 쓰신것처럼 우리는 종종 "대체 뭘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라는 질문을 곧잘 맞닥뜨리니까요. 너라면 다른 어떤 선택을 하겠니? 라고 했을때 과연 옳고 현명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나 역시도, 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라면요?

묵직할 것 같아서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루체오페르 2010-08-20 19:43   좋아요 0 | URL
옷 다락방님~
제가 위의 댓글을 쓰게 한 책과 주제가 담긴 페이퍼를 주신 장본인(?) 등장이시군요.ㅎㅎ

외국소설/예술MD 2010-08-23 09:19   좋아요 0 | URL
단언하건대,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으므로, 명백한 오류가 아닌 이상 누구도 타인의 선택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끔은 명백한 오류를 저질러서 그걸 지적하는 것임에도 '내 선택이니 가만 있으라'며 당당한 사람들도 있더군요. 그럴 때는 좀 안타깝습니다. 물론 이건 소수 상황이죠. 근데 소수 상황이 더 골때리는 것 같습니다.

그 외 대부분은 다락방님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볼 수 없으니 조언은 마치 도박처럼 이루어지죠. 맞으면 좋고, 아님 말고... 조언과 예언의 기만효과에 대해서는 이번 추천 시리즈 중에 '생각의 오류'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반값 세일 중인 '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