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가 바깥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 안에서 폭발해야 한다. -클라크 피녹
창대한 결말이 아니라 작은 시작. 김규항의 <예수전>
이 책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인문MD님과 출판사 관계자분과 3자 회담(-_-;)이 있었습니다. 김규항의 저작이니 인문사회 쪽의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했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문사회 쪽 독자들이 아닌 종교 분야의 독자들에게 더 열심히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는, 제가 했습니다만, 도박같아 보였습니다. 확신하지 못했어요.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기독교 책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볼 때, 김규항의 <예수전>에는 일단 지엽적인 문제들이 있으며('하느님'이라는 용어 선택, 인민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예수님...), 급작스럽게 영향력이 축소된 해방신학 계열의 메시지가 과연 얼마나 먹힐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또한 이 책은 반대의 측면에서도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듣던 얘기가 아닌가?'라고 되물을 분들이죠. 이 책에서 새롭고 신선한 해방신학의 돌파구를 찾으시려던 분들은 다소 낙담하실 확률이 큽니다. 로쟈 님께서 '소프트'할 것이라고 예상하신 부분은 (아마도 기대하신 부분에서) 사실로 보입니다. <예수전>에서는 치열한 지적 공방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혁명가 예수의 흔적을 북돋우는 정도에서 선을 긋습니다. 역사적 예수, 핍박받는 민중의 지도자이며 반권력을 지향하는 혁명가의 초상은 이 쪽의 도서를 탐독하시던 분들께는 이미 익숙한 모습. 심지어 현재의 '적들'에 대한 신랄한 공격도 그 강도가 생각보다 낮습니다. '김규항이 각잡고 썼다'고 기대하신 분들은 정말 소프트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예수전>은 바로 이 '소프트함' 때문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는 단어를 굳이 쓴 이유는, 근래 출간된 민중/해방신학 계열 책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못해서지요. 예수도 대중들에게는 비유로서 쉽게 설명했는데,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쉬운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이고 또 슬픈 일인지.(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전>은 아직 이 계열의 목소리를 접하지 못한 분들께 권할 수 있는 쉬운 난이도와 친절한 풀어쓰기를 자랑합니다. 어려운 용어나 인문학적 개념은 등장하지 않고, 난해한 교리적 사고도 없습니다. 뉴스 정도의 시사상식만 가지고도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론은 지금의 편향된 복음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종교계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뺨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 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p.187-188
물론 <예수전>에 특징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게 눈에 띕니다. 지식인이자 체제 개량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의 논쟁이 자주 부각되죠. 머리에 든 것 많고, 정의를 이야기하기 좋아하지만 결국 어느 이상 자신을 던지지 않는 입바른 존재들과의 논쟁. 여기서 비로소 B급 좌파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진보세력 내에도 곧잘 불편을 유발하는 김규항 씨의 비타협주의 글쓰기죠. <예수전>은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 같은 개념이야말로 체제에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봉사하는 눈속임이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일체의 억압이 없는 혁명의 시공간이 천국이라 불리울 수 있다면 당연히 예수는 거기로 인도해야 할 목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 어떤 '로마 식민지 개량'의 여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일단 유효합니다.
결국 <예수전>의 예수 그리스도는 김규항 씨가 말하는 비타협주의 노선의 영웅입니다. 예수는 어떤 권력(그것이 진보적이어 보인다고 하더라도)에도 힘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상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의 체계와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이지요. 예수 자신은 죽음을 예견하면서까지도 비타협주의를 고수합니다. 심지어 그의 열두 제자들이 그의 비현실적인 면모에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때도 어떠한 현실적 권력을 구축하는 노선을 거부합니다.
기꺼이 투신하는 혁명(유혈투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양심에 가책이 없을 정도의 적당한 움직임과 입바른 훈수를 즐기는 다수의 '좌파 세력'들이 '뻔한 나쁜 놈들'보다 더 나쁘다는 주제는 저자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장 반가운 점이었을 겁니다. 네. 이 책은 '김규항의 예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김규항 씨는 이 책이 자신의 <예수전>이며, 책을 읽은 모두가 각자의 <예수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무자비한 각주도 미주도 참고도서 목록도 없는, 증명을 위한 학술서가 아닌 이 '이야기' 책이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옳고 누가 정답인가는 일단 시작하고 볼 문제입니다. 리스도교인들이 좀 더 폼나게 시끄러워졌으면, 그래서 건강한 논쟁들이 더 많이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가 아직 낯설은 분들께는 놀라움을, 그에 익숙하신 분들께는 토론 혹은 반격의 기회를 기꺼이 열어놓은 이 텍스트를, <예수전>을 기꺼이 '더욱 열심히 팔아보'기로 했습니다. 복음서 속의 예수조차 방법론을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자본주의 사회와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떻게 양립해야 할 것인지, 사회적 빈곤과 개인의 영성 간에 균형은 어떻게 맞출 것인지,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한다기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께서 읽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떠들고 행동해 주시기를!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예수의 네 가지 얼굴>
-따끈따끈한 새 책입니다. 저널리스트 특유의 분석적인 태도로 4대 복음서들을 해설해주는 책이죠. 특별히 정치적인 편향은 없으나 복음서를 실증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우파 복음주의 계열(특히 성경 무오류설)에서 보자면 불편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비록 4대 복음의 내용을 해설하고 있긴 하지만, 저자 자신이 밝혔듯 이 책은 성경에 대한 본격 학술서는 아니고, 저자 역시 성경학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아직 그리스도교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기에 좋아 보입니다. 특히 <예수전>과 함께 읽기에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예수전>이 필요하니까요. 말하자면 이 책은 게리 윌스 버전의 네 가지 예수전입니다.
쉬운 교양서 수준이라 복음서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기에 좋습니다. '순진하지는 않지만 쉬운' 책들은 어째서인지 심도있는 책들보다 만나기가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솔직히 C.S.루이스정도만 해도 쉽지는 않잖아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언젠가 이 책을 '기독교 버전 <탐욕의 시대>'라고 소개드린 바 있지요. <예수전>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 책이야말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며 숨겨진 악의 축입니다 ㅎㅎ.
중도 복음주의 노선인 로날드 사이더의 이 책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뉘어져 있는데요. 전반부는 '물질에의 끊임없는 욕망'과 그리스도교의 신념이 왜 양립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물질의 소유는 어디까지가 정당한가를 다룹니다(이 글의 맨 위에 있는 클라크 피녹의 문구는 이 책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종교 서적으로는 다소 놀랍게도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한국의 근대화에 대한 우호적 시선 등, 분석의 정확도는 전문서에 비하면 다소 떨어질 수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예수전>과 좋은 비교/대조 지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이 책의 추천사 중 하나를 쓴 짐 월리스의 책들도 더불어 접해보시면 좋겠네요.
<아담, 이브, 뱀>
-성경 역사학자들의 저서는 늘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예외는 아니구요. 로마의 종교가 되면서 막강한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교가 성, 자유, 원죄라는 개념의 조절을 통해 체제 순응적 종교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렸습니다.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 과연 문제는 자유의지였는가 아니면 성적 요소(특히 '열등한' 여성의 유혹)가 개입되어 있었는가, 그렇다면 방종과 자유의지는 어떤 관계인가?" 같은 논쟁점은 성경 속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고, 각자 차이가 뚜렷했던 초기 기독교의 계파들은 무지개처럼 다양한 의견들을 쏟아냅니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주류 그리스도교와 영지주의자들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설전은 눈여겨볼만 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구분짓는 중요한 지점이니까요. 이는 곧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위치를 점할것인가라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예수전>을 더욱 여러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아, 본격 종교 역사서 중에서는 난이도도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