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소설은 일찍이 유행했던 다양한 종류의 문학 속에서 진화해 태어난, 보다 새롭고, 심오하고, 통렬한 문학이다. 일체의 예술의 전통정신과 형식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심리를 보다 깊이 파헤치고, 분석하고, 극약화劇藥化하고, 독약화하고, 나아가 원자화하고, 전자화하기 위한 예술계의 이단아였다. 예술의 신을 모독함을 전문으로 하는 반역예술이었다. 

  과거의 예술은 겉치장을 예찬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것이 진화해 그 겉치장을 벗겨낸 육체미의 감상을 주류로 하는 중세 예술로까지 진화했다. 그것이 현대... 즉 탐정소설 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진화하여, 그 육체를 갈기갈기 찢고 폐부를 끄집어내고, 해골을 토막 내, 혈액에서 분뇨까지 분석하고, 현미경으로 검사하여 그 기괴하고 추악한 아름다움을 폭로하고 전율하려 하는 것이다. 

  탐정소설의 사명은 거기서 탄생했다. 탐정소설의 진정한 사명은 이에 있다. (...) 이 때문에 이 천고불멸의 탐정본능을 과학이 낳은 사회기구로 향하게 하여, 이 양심없고 염치없는, 유물唯物 공리도덕이 낳은 사회악을 향해 잠입시켜, 그 기괴하고 추악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그 그로데스크하고 에로틱한 맛을 살린 변태적인 아름다움을 움직이게 하여, 결론적으로 그 깊숙한 곳에 숨은 양심과 순정을 밑바닥까지 전율시키고, 경악시켜, 실신시키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예술을 탐정소설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 갖가지 허영과 허식에 우쭐대는 공리도덕과 과학문화의 장엄... 눈부시게 찬란한 과학문화의 외관을 찢어발겨, 그 밑바닥에 위축되어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 같은 인간성...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초미세 현미경적인 양심을 절대적인 공포, 전율을 느낄 정도로 폭로하는 그 통쾌함, 심각함, 처절함을 마음껏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읽을거리여야만 한다. 

  

-유메노 큐사쿠, '고가 사부로 씨에게 답함' 중에서. (단편집 <소녀지옥> 역자 후기에서 재인용) 

 

부담스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하고 자아도취적인 저 문장들. 범인류적인 사명감. 역시 희대의 괴작 <도구라 마구라>를 쓴 유메노 큐사쿠죠. 그러나 이 단편집 <소녀지옥>은 보다 '일반적'으로 매력적입니다. 정신이상 계열의 탐미주의랄까, 지옥 버전의 <설국> 이랄까 그런 느낌입니다. 예전엔 정말 간지라는 게 있었구나 싶네요. 20세기초의 로망이 이런 것이었겠죠. 비정상 전문가인 미치오 슈스케나 히라야마 유메아키도 아직 이런 기품(?)을 가지진 못했군요. 어쩌면 시대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위의 발췌를 읽어 봅니다. 야 역시...(웃음) 

아, <소녀지옥>은 3/31까지 추가적립금 2천원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작 vs 영화 

 

원작- 안개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 수록, 스티븐 킹)

                                               영화-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B급 몬스터 공포물, 아리스토텔레스를 호출하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음)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서 재밌는 축에 속하는 중편 '안개'는 초중기 스티븐 킹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공포, 그리고 극한 상황에 부딪힌 인간 군상의 자발적 붕괴. 특히 후자의 경우는 스티븐 킹의 초자연 공포물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안개'는 킹의 팬들에게는 작은 선물상자다.

  가시적인 공포 없이 불안감만을 쌓아오던 전반부가 지나면 서서히 '압력'이 가중된다. 고립된 슈퍼마켓 안에 갇힌 사람들의 불신과 불안이 어떤 임계점을 향해 다가간다. 이 불안의 압력은 어떻게든 배출되어야 하는데,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깥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형형색색의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압력은 계속 출구를 찾아 헤매지만 출구는 없다. 당연히 폭발은 내부에서 먼저 발생하고, 광기가 슈퍼마켓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주인공만은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가 슈퍼마켓을 빠져나와 안개 속으로 피신(!)하는 장면은 어딘가 계몽적이고 냉소적이다. 주인공은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불안 압력이 자신에게 끼칠 위험 정도를 계속 가늠하다가 내부의 위험이 더 강해지는 순간 미련없이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행동하는 회의주의자다. 겉보기에는 괴물이 인간보다 훨씬 무섭지만, 인간 내부에서 발생한 위협이 괴물들의 그것보다 더할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 '안개'의 열린 결말은 그래서 냉소적이다. 인간들 사이에 남느니 차라리 불확실한 위험들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씁쓸함.

  문제는 영화다. 영화는 소설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쇼생크 탈출>로 각색 실력을 인정받은 프랭크 다라본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원작자 스티븐 킹이 격찬했다는 그 결말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희대의 낚시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더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이 비극적인 결말은 원작에서 성큼 나아간 것이다. 냉소적인 원작은 각색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좋은 비극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늘 열성적이고 최선을 다하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최대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드라마에서는 어색할 정도로 완벽한 인격체이며, 회의주의자가 아닌 뜨거운 영웅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비극의 주인공이다.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음에도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소설의 가장 큰 적은 인간 군상이지만, 영화의 가장 큰 적은 절대적인 운명 그 자체다. 이 결말이 영화 전체를 한 단계 올려 버린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으로 차갑게 마무리된 원작을 밀어붙여서 고대 비극의 '뜨거운' 구성을 완성시켰다. 이 결말을 반전이라고 한다면, 배반당한 것은 관객들의 평범한 기대다. B급 외계 괴수 영화에서 설마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 그것이 이 영화의 '낚시'였다. 마지막 순간의 절망에 존속살인의 요소가 있다는 점은 감독이 고대 비극에 바친 작은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다른 미덕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저예산으로 최대한 열심히 만든 독창적인 괴수들의 비주얼, 그리고 사람들의 눈높이를 유지하며 불안하게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카메라워크가 그렇다. B급 영화만이 가진 미덕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감독판 DVD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은 원래 감독과 스티븐 킹이 개봉 버전으로 쓰려고 했던 '흑백버전'이 들어 있다. 흑백 화면 속에서 괴수들은 더욱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안개는 화면의 명암 대비를 지우면서 그야말로 장막처럼 들어찬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은 저예산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 같다. 이 흥미로운 버전을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길. 어떤 소설이 영화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극히 드문 사례이니까.

 

-외국소설MD 최원호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작 vs 영화 

원작- 시핑 뉴스 (애니 프루) 

영화- 쉬핑 뉴스 (라세 할스트롬) 

 

          

 기적을 다루는 능력

  

-삼류 신문기자 쿼일은 날라리 여자에게 넘어가 어쩌다 결혼을 했다. 그 여자는 다른 남자랑 바람이 나서 하나뿐인 딸을 '업체'에 팔아먹고 도망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쿼일은 우여곡절 끝에 딸을 찾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무능력한 인간 패배자. 그것이 쿼일이 생각하는 쿼일이다. 결국 그는 친척의 권유로 고향인 뉴펀들랜드로 돌아간다...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 초반부를 읽다 보면 이 소설의 나머지가 예측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단편집 <브로크백 마운틴>을 읽어 본 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척박하고 비린내 나는 뉴펀들랜드의 자연, 밥벌이의 지겨움, 사랑의 실패, 뒤틀어진 기억, 온갖 오해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 그리고 소설은 정말로 그렇게 진행된다. 순수 문학이 좋아하는 주제인 '생의 비루함' 따위를 향해 애니 프루는 부드럽게 클러치를 밟는다. '미국 현대소설들은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뉴펀들랜드의 거칠은 파도와 펄떡거리는 생명체들에 비해 인간의 삶은 얼마나 비루한가. 때마침 근친상간에 얽힌 과거가 터지고,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는 찜쪄먹는 엉망진창 가족사가 등장하면서 스토리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그런데 어느 순간 쿼일이 일어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서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마술적 리얼리즘이 소설 속에 깃든다. 뭐? 애니 프루인데?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가? 그렇다. 애니 프루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등의 예수님스러운 기적을 소설 속에 뿌려 버린다. 그런데 그 기적 배포 작업은 무척 매끄럽고 교묘해서, 독자들은 애니 프루의 묘기에 반하고, 쿼일은 이 신비들이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만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기적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가만, 그렇다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이 삶이 앞으로도 꼭 불행하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이 사람들, 다 살고 있잖아?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쿼일은 저렇게 중얼거린다(혹은 생각한다). 동의할 수 있는 분 계십니까? 그러나 <시핑 뉴스>는 그 희망을 (대부분의)독자들에게도 안겨주고야 만다. 이 소설은 지금 '설마요'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쓰여진 소설이니까. 그리고 애니 프루는 좋은 소설가니까. 

...영화는 길게 험담을 늘어놓으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케빈 스페이시 + 줄리언 무어 콤비에다가 <길버트 그레이프> 감독인 라세 할스트롬이라면 당연히 기대할 법하다. 그러나 라세 할스트롬은 조목조목 원작 장면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성실하고 심심한 각색과 연출로 일관한다. <길버트 그레이프>는 그랬어도 됐지만, 아니, 차라리 브로크백 마운틴을 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라세 할스트롬은 <시핑 뉴스>의 기적을 다룰 줄 몰랐다. 영화는 원작이 가속하는 부분에서 깜짝 놀라고는 쫓아가기에 급급하다가 헐떡이며 끝난다. 저 아까운 캐스팅을 감안할 때, 좋게 생각해도 범작 수준이다. 케빈 스페이시나 줄리언 무어의 팬이라면(나는 그 둘 모두의 팬이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보시기 바란다.

 

-외국소설MD 최원호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작 VS 영화 

원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서 C. 클라크)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언어 너머의 시 

  

 "이제 커다란 판은 아무런 특징 없이 똑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 속에 서 있는 빛의 기둥이었다. 원숭이인간들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흔들고는 곧 오솔길을 따라 자신들의 은신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고, 자신들을 집으로, 아직 알 수 없는 미래로, 별들이 빛나는 우주로 인도해 주는 이상한 빛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p.42 

 SF계의 그랜드마스터 중 한 명인 아서 클라크가 문장의 마술사라고는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아서 클라크는 발상 자체가 시詩다. 문장은 평이하게 그 발상을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서 클라크는 시인이다. 다만 시는 글 속에 있지 않고 글이 전달하는 아이디어의 상태로 존재한다. 시는 글을 통해 드러나지 않고 글 속에 숨어 있다. 그렇게 치면 모든 글이 다 시가 아니냐고? 물론 모든 글을 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 그러나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더라도 아무나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 아서 클라크는 역사에 남을 시인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시인들처럼 신에 대해, 초월적인 존재(신이 아닐 수 있음)와 우주에 대해, 그리고 인류의 본성에 대해 썼다. 아서 클라크는 과학과 감각과 상상을 동시에 저글링할 줄 알았던 고대 시인들의 후예다.

 그리고 이 작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하나의 경지다. 이 작품 속에 클라크의 시들이 모두 들어가서 서로 얽혀들었다. 인류는 초월적 존재로 인해 재창조(급속 진화)되고, 인류 역시 AI를 창조하며, AI는 우주에 대해 고찰하다가 초월적 존재 양식을 예감하고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간파한다. 다시 (불완전함이 간파당한) 인류는 초월적 존재와 마주친다. 각 소재들은 떼어놓고 보아도 흥미롭지만, 시간축에 맞추어 순환 구조를 취하는 구성으로 인해 한 권의 굳건한 장편소설로 '이루어졌다'. 보기 드물게 우아한 나선형 상승 곡선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거대하고 느린 시다. 호메로스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사랑할 것이다. 이 소설이 한물 갔다거나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서 클라크의 발상이 사실상 고전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SF가 스타워즈인 걸로 착각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전쟁도 로맨스도 없다. 더없이 우아한 사고와 상상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 역시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이다. 사실 이 영화의 진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형 스크린에서 보아야 한다. 시야를 메우는 스탠리 큐브릭의 강박적인 세트 구성은 현란한 특수효과 없이도 이미 스펙터클하다. 적극적인 음악의 사용, 대사를 통해 '서술'하는 대신 등장인물과 배경의 움직임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기'. 이 시청각의 스펙터클은 "거의 말하지 않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원작의 핵심을 분명히 잡아내고 있다는 증거다. 소설과 거의 동시에 작업이 진행된 이 영화는 소설의 결과물, 즉 '글'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서 클라크의 아이디어에 매개체 없이 거의 곧바로 접근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큐브릭 역시 시를 쓴 셈이고, 결국 원작보다 더욱 축약되고 신비로운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 속의 모노리스는 원작과 달리 일말의 설명도 주어지지 않는 신비 그 자체이며, 이 영화는 그 절대 신비를 둘러싸고 음악과 시각 효과와 꼼꼼히 짜여진 미술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 제의, 탐색(고대에 그것은 하나였다)이다. 

 이만큼 위대한 소설-영화 콤비도 다시 만나기 힘들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원작'이 없다.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두 쌍둥이가 모두 밝은 빛을 발하는 기적을, 한 번 뿐인 인생이 끝나기 전에 꼭 느껴보시기 바란다. 

-외국소설MD 최원호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2011-03-2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어머무시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
MD님의 혈관 어디쯤에도 고대 시인들의 뭔가(?)가 숨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1-03-22 17:12   좋아요 0 | URL
저는 감격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물 좀 닦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만세! ㅠㅜ

카스피 2011-03-2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스페이스 오딧세이 4부작중 왜 나머지 3권은 재간 혹은 첫간행을 하지 않는답니까? 버럭 3:< 외국소설/예술MD 출판사에 압력좀 너주세용^^

외국소설/예술MD 2011-03-23 11:30   좋아요 0 | URL
그게, 장사가 잘 되느냐 아니냐는 약간 어려운 문제니까요 ㅎ. 아 자랑하자면 저는 3001 오디세이(어디서 만들었는진 아시죠?)를 갖고 있습니다. ㅎㅎ

카스피 2011-03-24 12:12   좋아요 0 | URL
아니 그 100명중의 한분이신가요.MD님도 상당히 SF팬이시네요.넘 부럽습니당^^

외국소설/예술MD 2011-03-24 18:59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 1퍼센트- 보다 더 희귀하군요. ㅎ
 

원작 vs 영화

원작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영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코맥 맥카시의 소설들은 사실 그렇게 만만치 않다. 그는 친절한 작가가 아니다. 대사와 지문은 섞여 있고, 인물들은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들은 독자에게 일정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마찬가지다. 추적자와 도망자가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며 이동할 때마다 맥카시는 흐름을 잘라 버린다. 거두절미하고 새로 도착한 장소를 묘사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범행 경로를 추적하는 사진 기록이다. 두 장의 사진 사이에 있는 흐름은 눈에 드러나지 않고 그저 '느껴진다.' 

이 불친절한 방법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잘 어울린다. 등장인물들의 추적/도망이 고립된 장소들로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옮겨 다니는 모텔들은 비록 현대의 마을이나 도시 안에 있더라도 (맥카시의 다른 소설들의 배경인) 황무지/서부의 야생만큼이나 고립된 장소다. '커뮤니티가 없는 방랑자들의 집합소'인 모텔은 한 야수로 인해 약육강식의 세계로 돌변한다. 예측할 수 없는 야수(안톤 쉬거)가 이 문명 세계를 서부 개척시대로 단번에 퇴화시켜버린다. 

아무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는 '인간적인 이해'라는 범주 밖에 있다. 때문에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에게서 도망치는 '인간'과 그를 쫓는 '인간'들 모두 무기력함에 파묻힌다. 보안관의 늘어나는 독백이 그 증거다. 처음에 성실하게 세계를 관찰하던 그는 점점 자신 안으로 빠져든다. 독백 혹은 대사가 서술/묘사(세상을 관찰하기)를 잠식한다. 그가 이해하던 세상이 안톤 쉬거로 인해 서서히 붕괴하는 것이다. 결국 보안관은 이 세계가 사실은 이해 불가능한 곳이라고 고백하고야 만다. 그때 보안관의 시야에서 세계는 사라져 버리고(묘사는 없고) 그의 독백만이 그 자리를 메꾼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부정당하는 순간, 보안관에서 한 무기력한 노인으로 전락한 남자의 독백.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계가 <로드>에 등장하는 대재앙의 지옥보다 낫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불친절한(?) 전개를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고립의 순간들 뿐이다. 나머지는 사족이므로 지워졌다(고 생각한다).

하드보일드한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코엔 형제의 영화도 원작에 뒤지지 않는 걸작이다. 접근성으로 따지자면 영화가 더 쉽고 볼거리가 많다. 원작에서 거의 야수에 가까운 살인마 안톤 쉬거는 영화 악역의 역사에 남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어 관객들을 압도한다. 액션 씬도 짜임새가 아주 좋으며, 액션이 폭발하기 전후의 긴장감도 잘 살려 놓았다(사실 코엔 형제의 주특기다). 이 액션 장면들이 각각의 작은 하이라이트가 되어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테렌스 말릭의 <황무지> 비슷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소수는 열광하고, 대다수의 관객은 아무 관심도 없고(혹은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결코 아카데미 상은 탈 수 없는 영화 말이다. 

코엔 형제는 원작의 메시지를 전부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선택한 전략은 '말이 필요없고, 직접 보시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처음부터 대사가 거의 없다. 그들 모두가 동물처럼 움직이고 침묵 속에서 힘을 드러낸다. 실패에 가까워질수록 필사적인 도망, 무기력한 추적, 한 야수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의 압력(동전 하나로 그렇게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모두 아무런 말이 필요없다. 소설을 무용이나 시로 풀어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의 액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울 정도로 리듬감이 있는, 사람 죽이는 장면들.

종합하자면, 둘 다 좋다. 굳이 스타일을 나누자면 원작이 에스프레소, 영화는 아메리카노 정도 되겠다.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된다.

   

 

영화 원작소설 이벤트 보러 가기!  

p.s: 영화 티켓 수첩 증정 조건이 '2만원 이상'에서 '2권 이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11-03-1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영화는 보고나면 반드시 원작을 읽고 싶어지는데, 코엔의 영화는 그 반대가 되는 단점이;;; 아, 물론 저에게 그렇단 소리.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 된다' - 캬, 좋아요.

외국소설/예술MD 2011-03-21 11:49   좋아요 0 | URL
아마 읽어보셔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 책이 될 것 같은 분이 있고 안될 것 같은 분이 있는데요. 치니님께선 되는 축에(..-_-;) 속할 거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단골의 매력이란 게 이런 거군요.;

달빛향기 2012-11-3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스타일을 나누자면 원작이 에스프레소, 영화는 아메리카노 정도 되겠다. 물론 절대 시럽을 넣어서는 안된다.

-이 구절에 감동 받고 즐겨찾는 서재에 추가했습니다.
앞으로 인간사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편식 없는 소설읽기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되네요;)

유익한 정보와 멋진 글들, 감사합니다! ^_^*

p.s. 그런데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잔인한 묘사가 많은가요?
저는 빅픽처에서 살인 후 뒷처리-_ㅠ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정 떨어질 뻔하다가,
추스리고 나서 겨우 다 봤는데..말이죠..ㅠㅠ

하드보일드 절대 싫어하는데...
비정한 현실에 대한 묘사가 궁금해서요...-_ㅜ

이 책, 읽어도 될까요??????

외국소설/예술MD 2012-12-07 07:48   좋아요 0 | URL
어어 답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칭찬까지 해 주셨는데 ㅠㅜ

잔인한 묘사는..음. 빅 픽처에 뒤진다고는 할 수 없고요.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
사실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라, 잔혹한 액션하고는 되려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일종의 변종 서부 활극이랄까요.

그래도 서부 시대를 다룬 코맥 매카시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수위가 좀 낮은 편이긴 합니다만..
잔인한 묘사에 거부감을 갖고 계시다면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으실 거예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