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무진 <해인>



글: 노정태 (자유기고가)



아기장수 설화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세상을 구원할 혹은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특별한 아기가 태어나려 하는데, 그것을 알아챈 기득권이 아기와 산모를 해치려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지역과 판본에 따라서는 역적으로 몰릴까 두려워한 부모가 아기를 직접 죽여버리기도 한다. 후련하게 뒤집히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담긴 민중 설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아기장수 설화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버전이라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터미네이터> 1편일 것이다. 이게 무슨 치사량의 ‘국뽕’이 혈관에 주입된 자의 망언인가 싶겠지만, 잘 생각해보자. 곧 핵전쟁이 터지고 세상은 기계에 의해 지배된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규합하여 싸우는 아기장수가 바로 존 코너다. 존 코너를 낳을 사람은 사라 코너이며, 아기장수를 보호하기 위해 미래의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 카일 리스를 과거로 급파한다. 터미네이터는 말하자면 아기장수를 죽이려 드는 못된 포졸인 셈이다.

알고 보면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한국인이라거나 한국 설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기장수 설화의 이야기 구조가 그만큼 보편적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책날개에 따르면 “한국적인 소재에 근원을 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특히 깊은 사료적 고증에 의거한 스토리를 펼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는 1974년생 소설가 차무진의 신작 『해인』 역시 그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니 말이다.

 

아기장수 존 코너를 낳을 어머니 사라 코너를 『해인』의 작중 세계관에서는 성모라고 부른다. 본디 성모의 역할은 태어날 때 부여받고 죽으면서 끝나는 것이지만, 고려 말 어떤 사건으로 인해 ‘숙지’라는 이름의 여인은 아기장수를 낳을 때까지 계속 같은 영혼을 지닌 채 환생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한편 카일 리스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박마다.

박마는 의상 법사가 한반도에 가져온 영험한 신물인 해인(海印)을 확보하여, 성모의 입천장이나 발바닥 등 눈에 띄지 않는 부위에 해인의 흔적을 새긴다. 그러나 카일 리스와 달리 박마는 성모를 직접 임신시키지 않는다. 박마는 성모를 찾으면 평생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고 해인을 인식시킨 후 곱게 시집보낸다. 성모의 몸에 잉태되는 것은 육체적 아비의 자식이 아니다. 해인의 힘으로 아기장수가 잉태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명의 박마가 존재하며 그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그중 가장 지엄한 원칙은 아기장수가 죽으면 그를 섬기는 박마 역시 따라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는 박마가 있다. 문자 그대로 불사의 몸이 되어버린 박마. 『해인』의 주인공 백한이 그렇다. 그리고 그에게는 반드시 막아내야 할 숙적 정만인이 있다. 정만인 역시 불사의 몸이며 해인을 악용하여 아기장수가 태어나야 할 육체를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영생불멸의 삶을 끝내고자 하는 악당이다. 정만인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성모를 먼저 찾아내어 자신이 임신시키려 든다. 이미 성모가 아기장수를 회임했다면 성모를 죽여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백한이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카일 리스라면, 정만인은 ‘터보레이터’(<터미네이터>의 패러디물인 <터보레이터>는 미래의 지도자를 누가 먼저 임신시키는가를 두고 두 명의 터보레이터가 경쟁하는 내용이다)인 셈이다.

 

불사의 두 인물을 두고 저자 차무진은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글쓰기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최대한 활용해 두 불사인의 대결을 엮어내는 것이다. 그들의 악연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부대에서 시작해, 임진왜란을 거쳐 동학농민운동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진다. 특히 이순신의 캐릭터를 세계관 속에 집어넣고 인격을 부여한 솜씨가 놀랍다. 이미 실권을 잃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권력욕과 두뇌만은 살아 있는 흥선대원군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저자가 충실히 공부하고 준비한 내용을 바탕으로 ‘팩션’이 엮여나가는 쾌감이 대단하다.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제대로 된 대중소설을 만났다’는 긍정적 소감을 가리는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애초부터 출산의 도구로 사용되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훼손과 폭력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게 일차적인 문제다. 그것을 장르적 특성으로 받아들이고, 논쟁의 여지가 있겠으나 숙지가 환생을 거듭할수록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난다는 것에 점수를 준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작가가‘떡밥’을 회수하기 위해 독자의 몰입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결정적인 반전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서술할 순 없다). 다시 <터미네이터>로 돌아가보자. 아기장수 존 코너를 점지한 인물은 다름아닌 존 코너 자신이었다.

미래가 과거를 만들어낸 이 고전적인 시간 여행의 역설을 마주한 제임스 캐머런은 ‘설정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 대신 사라 코너의 입을 빌어 얼렁뚱땅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장르적 쾌감에 집중했던 1편 그리고 2편과 달리, ‘설정의 완벽함’을 의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후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용광로에 빠지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인』에 대해 드는 아쉬움도 그와 유사하다. 결말을 알고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면 몇몇 대목이 새롭게 읽힌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그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휘몰아치는 독서 경험을 더욱 원했던 것 같다. 물론 선택은 저자와 다른 독자의 몫일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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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서면 인터뷰

 



진행: 문학동네

번역: 홍은주

 


 

© Ivan GimNinez - Tusquets Editores





Q. 무라카미 씨가 데뷔하신 지 40년이 되어갑니다. 데뷔작부터 가장 최근작인 『기사단장 죽이기』까지 지난 작품들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반면, 무라카미 씨의 문학세계에서 사십 년 동안 바뀌지 않은 핵심은 무엇일까요?

 

A. 첫 소설을 썼을 때가 29세였는데 지금은 68세가 되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합니다. 스물아홉 때는 ‘소설 같은 건 앞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순여덟이 되고 보니 ‘남은 인생에서 소설을 몇 편이나 더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커다란 차이입니다. 대신 그만큼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으로 작품을 쓰게 됩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즐긴다는 점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같습니다. 글 쓰는 일은 변함없이 즐겁습니다. 마치 악기를 자유로이 연주하는 것처럼 말이죠.

 

 


Q. 1Q84』 이후 7년 만의 본격 장편소설입니다. 처음 구상에서 탈고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합니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구상의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경험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A. 대략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기분전환으로 번역을 조금 한 것 말고는 거의 다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구상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글이 ‘써진다’ 싶으면 집필을 시작하고, 매일 계속해서 써나가고, 다 쓸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자유로울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의 경우 구상 같은 것은 대체로 방해가 될 뿐입니다.

 


 

Q. 냄새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경우 엄마를 떠올릴 때 엄마의 체취가 아닌 그때 내리던 비의 냄새를 기억하고, 아키가와 쇼코는 재규어의 냄새에서 아버지를 추억합니다. 또한 주인공 ‘나’가 메타포의 땅에서 현실세계에 다가가는 순간도 ‘냄새다운 냄새를 맡는 순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음악과 음식이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다양한 음악과 음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서는 유독 후각에 대한 예민함이 곳곳에 보입니다. 후각이라는 감각이 유독 이번 책에 두드러진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공간을 혹은 어떤 인물을 기억할 때, 후각이 크게 영향을 주는지도 궁금합니다.

 

A. 저는 되도록 오감을 전부 활용해 글을 쓰려 합니다. 물론 후각도 오감 가운데 하나지요. 특별히 후각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Q.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작품 속 화자인 ‘나’도 ‘믿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요. 어찌 보면 단순하지만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믿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라카미 씨는 살아오면서 자신이 믿는 바대로 나아갔는지, 작가로서 스스로를 믿는 힘이 주인공 ‘나’처럼 단단했는지, 아니면 멘시키처럼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일상생활에서는 제 의견이나 신념을 꽤 확실히 지니는 편입니다. 그러나(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믿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런 의견이나 신념을 한순간에 무화시켜버리는, 나 자신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흐름 같은 것입니다. 그런 힘을 정면에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혹은 그런 힘에 순순히 몸을 맡기지 못한다면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Q. 이번 작품 출간 이후 일본 극우파로부터 적잖은 공격을 받으신 것으로 압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좌우 갈등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평행선을 그리는 역사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렇다면 거기에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A. 역사에서 ‘순수한 흑백’을 가리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터넷 사회에서는 ‘순수한 흑이냐 백이냐’ 하는 원리로 판단이 이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이 딱딱하게 굳어 죽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말을 마치 돌멩이처럼 다루며 상대에게 던져댑니다. 이것은 매우 슬프기도 하거니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소설(이야기)은 그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소설이 일종의 (좋은 의미의) 전투력을 갖춰야 할 때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다시 한번 말을 소생시켜야 합니다. 말을 따뜻한 것, 살아 있는 것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양식(decency)’과 ‘상식(common sense)’이 요구됩니다.

 


 

Q. 한국 국민들은 2014년에 4 16일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여 수백 명이 물속에 가라앉은 사건을 공동체적 트라우마로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은 한국 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쳐 ‘세월호 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다수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동일본 대지진이 다루어지기도 하는데요, 재난 이후 문학 그리고 문학인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까요?

 

A. 어떻게 하면 그렇게 크고 깊은 집단적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가 유효하게 표현하고, 나아가 치유할 수 있을까? 이건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여러 차례 시도되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으로서는 대부분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 가지 기억해둬야 할 것은 ‘어떤 명백한 목적을 지니고 쓰인 소설은 대부분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진 중대한 과제입니다. 목적을 품되 목적을 능가하는(혹은 지워버리는) .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이런 시도에 꼭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이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합니다.

 


 

Q. 소설가로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라카미 씨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남다른 믿음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소설’이라거나 ‘문학’이라기보다는 굳이 ‘이야기’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같은 질문을 달리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이야기의 무엇이 우리에게 그토록 절실한 것일까요? 여태껏 작품활동을 해오시면서 이야기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체험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제 정의에 따르면 이야기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몸속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넘쳐나는 것입니다. 의미나 정의, 무슨무슨 주의(主義) 같은 것을 아득하게 넘어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선악의 개념마저 초월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선량한 힘’을 지닌 것입니다. 그런 힘을 지니지 못한 소설은 아마 독자를 끌어당기지 못할 테지요.

그러나 그런 이야기의 힘을 생생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뛰어난 능력과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을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랜 세월 나름대로 노력을 거듭해왔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생각입니다.

 

 


Q. 이 질문지를 준비하는 현재 한국은 『기사단장 죽이기』 예약판매중인데요. 벌써 반응이 뜨겁습니다. 한국에는 무라카미 씨를 무한 신뢰하고 애정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수많은 독자들이 무라카미 씨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한국을 방문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A. 언젠가 그런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만, 사실 저는 공적인 행사를 썩 좋아하지 않고 미디어에 출연하는 일도 거의 없기에 아무래도 결국 이런 초대를 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 독자 여러분께는 늘 각별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제 책을 변함없이 열심히 읽어주셨습니다. 이번 작품 『기사단장 죽이기』도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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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홍한별 (번역가)





1906년 6월 25일 밤, 매디슨스퀘어가든은 도금 시대 축적된 부가 뉴욕 맨해튼에 쌓아올린 초호화 건물 중에서도 장려함과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뽐내던 곳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리러 매디슨스퀘어가든의 옥상 정원으로 모여든 화려한 멋쟁이들 사이에 세 사람이 있었다.


신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신비한 미녀, 최초의 ‘잇’ 걸, 전무후무한 슈퍼모델, 만인의 선망과 욕망의 대상이었던 에벌린 네즈빗. 

피츠버그 석탄철도왕의 상속자 해리 소.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뉴욕 상류사회의 꼭짓점에 존재했던 스탠퍼드 화이트.

그리고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미국을 아찔한 흥분과 충격으로 뒤흔들어놓은 이 살인 사건에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섹스와 죽음. 신데렐라와 백만장자. 미녀와 야수.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허구적으로 가공하는 게 사실 의미가 없었다. E.L. 닥터로는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이용하는 유일한 방법을 알았고 탁월하게 성공했다. 그는 ‘세기의 사건’을 축소화법을 사용해서 담담하게 전했다. 여기에 해리 후디니, 옘마 골드만, J.P. 모건 등 실제 인물들과 허구적으로 창조한 백인, 이민자, 흑인 세 가족의 이야기를 한데 엮으면서 뜨겁고 냉혹한 시대를 그려냈고, 그렇게 완성한 작품 『래그타임』(1975년)은 닥터로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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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 누쿠이 도쿠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통(혹은 고전) 추리소설은 장르적 지표라 할 수 있는 공식을 중시한다. 먼저 수수께끼 같은 범죄가 발생하고, 작품 속에서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의문을 풀고 범인의 정체를 밝혀나간다. 이런 특성 때문에 고전적인 추리소설, 즉 수수께끼 풀이 형식의 추리소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비슷한 유형의 반복을 취한다. 작가가 문제를 던지고 독자가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머리싸움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도 존재한다. 명문화된 규정집이 없을 뿐 스포츠 경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추리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독자일지라도, 작가가 마음먹고 만들어놓은 함정을 피해 가기는 힘들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실제 이미지가 아닌 거짓 이미지에 근거하여 전개되기 마련이며, 작가는 누가 진짜 중요한 인물인지, 또 무엇이 중요한 사실인지를 조바심 날 정도로 조금씩 밝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쿠이 도쿠로의 『프리즘』은 형식 자체가 반전이자 독특한 형식을 지닌 작품이다. 


‘어느 초등학교의 젊은 교사가 아파트에서 살해된다. 방에 있던 골동품 시계에 머리를 맞은 것이 사인(死因)이며, 부검 결과 수면제가 검출된다. 죽기 전 누군가 보낸 초콜릿을 먹었는데 그 속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과연 누가 죽인 것일까…?’ 


이상은 누쿠이 도쿠로의 『프리즘』 도입부 요약이다. 1장 ‘허식의 가면’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인 ‘나’가 동급생들과 함께 담임 선생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서며, 열띤 의견 교환 끝에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까지는 여느 정통 추리소설의 형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장 ‘가면의 이면’에서는 화자인 ‘나’가 피해자의 동료 교사로 바뀌고, 이어진 3장 ‘이면의 감정’과 4장 ‘감정의 허식’에서는 다시 피해자의 전(前) 애인과 학부형으로 바뀌면서 일반적인 작품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각 장마다 바뀌어 등장하는 ‘나’는 각각의 입장에서 사건을 조사하여 진상에 접근(했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로서는 ‘과연 그것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가는 최종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완전무결하고 오류 없는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는 대신 독자에게 판단을 넘겨준다.


흰색의 빛을 통과시키면 무지갯빛 띠를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이 소설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하나의 살인 사건이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이다. 각 장은 독자적인 굴절 각도를 지닌 프리즘으로, 등장인물의 입장을 빌려 무려 열 가지의 가설이 제시된다. 두 번째 의미는 피해자 미쓰코에게서 비롯된다. “나는 그런 미쓰코가 마치 눈이 어지럽게 만드는 만화경이나 다양한 색깔의 빛이 난무하는 프리즘처럼 느껴졌다”는 작중 표현처럼, 미쓰코는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어린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자신들 편에 섰던 다정한 선생님이었지만 동료 교사 입장에서는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순진한 사람, 한때 애인이었던 남자에게는 사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기분을 이해할 줄 모르는 형편없는 상대, 불륜 관계였던 중년 남성에게는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여성이다. 미쓰코의 여러 모습은 상대하는 사람의 프리즘에 따라 다른 색으로 비추어진 결과일 뿐이며 그녀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극단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작품의 맥락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누쿠이 도쿠로는 이 소설을 에드거 앨런 포의 「마리 로제 수수께끼」의 뒤를 이을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포의 순수한 상상력으로 창조되어 명쾌한 결말을 맺는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도둑맞은 편지」와는 달리, 19세기 뉴욕에서 실재했던 메리 로저스의 변사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마리 로제 수수께끼」에서는 분명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여기서 포는  “아주 사소한 차이가 사건의 두 경로를 완전히 바꾸어 큰 차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마치 변명처럼 느껴지는 문장을 남겼다. 누쿠이 도쿠로는 이러한 결말에 영감을 얻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고 독자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이야기를 썼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문학의 정치』(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허구의 진실임 직함은 설화의 기만적인 진리에 대립”되며, “탐정소설은 문학혁명에서 표상적인 진실임 직함의 탄생과 정화만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합리성의 영토”라고 했다. 논리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추리소설은 최대한 진실임 직한 가설을 따라가게 되며,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작가의 결론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학 작품의 해석에서는 텍스트보다 독자가 더욱 중요하다. 때로는 독자야말로 텍스트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작가만큼 텍스트를 창조해낸다. 어쩌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 독자의 눈을 거치며 작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고, 작가가 제시한 열 가지 가설 이외의 새로운 가설을 충분히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프리즘』의 결말에 대해서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임에 틀림없지만, 흔히 보기 힘들었던 시도는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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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무한육면각체

장용민 지음




리뷰어: 이다혜(북칼럼니스트)



천재가 예술 작품 속에 비밀코드를 심어놓았다……. 댄 브라운의 2003년 작 『다빈치 코드』(안종설 옮김, 문학수첩 펴냄)가 팩션 붐을 일으키기 전, 한국에도 팩션의 바람이 불었다. 그 주인공은 1997년에 출간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의 장용민이었다. (1993년에 발표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세계사 펴냄)도 빼놓을 순 없으리라.) 2013년 작 『궁극의 아이』과 2014년 작 『불로의 인형』(모두 엘릭시르 펴냄)의 장용민이 처음 발표한 이 장편소설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비밀’이 제목에서 빠진 셈인데, 그러고 보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퍼즐과 같고 비밀 그 자체로 보이니 당연한 결정일지도 모르겠다. ‘장용민 월드’라고 불러도 좋을, 한국적인 상황과 역사에 매력적인 재해석과 추리를 더해 만들어낸 작품들의 원형을 만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건축무한육면각체』가 풀고자 하는 암호는 이상의 시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뜻은 몰라도 외워 놀기 좋았던 음률을 지닌 이상의 시에 큰 비밀이 숨어 있다는 설정은, 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김재희의 2012년 작 『경성 탐정 이상』(시공사 펴냄)이 경성 시절의 이상을 소설가 구보 박태원과 콤비를 이루는 탐정으로 등장시켰다면,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이상이 남긴 암호를 현대(2006년)의 우리들이 풀어간다는 구성을 취했다. 책의 목차부터 기발하다. 사람은 사람의 객관을 버리라-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사람은 숫자를 버리라-우리들은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영원한 망각은 망각을 모두 구한다-사각의 이름을 발표하다…. 당연하게도 프롤로그는 설명도 없이,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전문인용이다. 소설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가상의 해설판이기도 한 것이다. 장용민은 이상의 삶을 그의 작품과 병치시키고, 현재 시점에서 그의 시를 해석하는 두 인물을 집어넣었다.


첫 번째 미스터리. 후일 이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김해경은 본디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는 서울대 공대의 전신인 경성 공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산하 건축과 기사로 취직한 그는 1929년에 설계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바로 그 해, 그의 건축물이 조선건축학회의 기관지 《조선과 건축》에서 1등과 3등으로 뽑혔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1년 사이의 기간, 그는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1932년이 되어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이상이라는 이름으로였다.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면서. 대체 그 1년여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두 번째 미스터리. 서울역 구 역사의 대합실 중앙, 붉은 대리석과 검은색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등장한다. 세 개의 육면각체가 서로 직각으로 맞물리며 중앙으로 이어진 문양 한가운데는 천황을 상징하는 열여섯 개의 잎을 가진 국화 문양이 자리 잡았다. 이것을 삼종신기라고 한다. 일본 천황은 왕위에 오를 때 선대 천황으로부터 세 가지 보물을 물려받는데, 이 또한 삼종신기라 부른다. 삼종신기가 단군신화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잠시 등장하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 중 단 세 곳에만 삼종신기가 새겨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 세 건물은 철거된 중앙청, 서울시청, 그리고 서울역이다. 왜 이 세 건물에만 삼종신기를 그려 넣었을까? 그리고 서울역 바닥에 이 문양을 넣도록 지시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단서들을 조합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인물은 소설가 지망생이자 졸업 논문에 시달리던 지우, 그리고 그에게 이상에 관한 소설을 써보지 않겠냐고 제의한 수수께끼의 인물 은표다. 소설이 시작되면, 지우는 사라진 은표가 “전부 사실이었어”라는 음성 메시지와 함께 그간 모은 자료를 자신에게 넘겼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우는 은표가 뭘 하는 사람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지우와 은표의 시점을,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구성이며, 책을 읽어갈수록 책 속 설명을 검색창에 계속 넣으며 찾아보게 만드는 마성의 소설이기도 하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때의 보물찾기하는 기분이 되살아나는 재독이었는데, 그새 검색이 용이해지니 책의 내용을 확인해가며 새삼 놀라는 재미가 있다. 추리 내용을 설명할 때의 매끈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과 달리, 지우나 은표의 심경을 묘사하는 대목들은 비유나 형용사가 다소 치덕거린다는 약점도 있다.


P.S. 소설은 1996년 한국영화진흥공사 주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신은경, 이민우, 김태우 등이 주연한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1999년 개봉했다. 굳이 영화를 먼저 보고 싶은 독자를 말리고 싶은 기분이며, 소설을 읽은 뒤 보고 싶다는 독자도 말리고 싶은 기분이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당신의 선택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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