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 인류는 어떻게 지식과 문명을 얻게 되었나?
한스 요아힘 그립 지음, 노선정 옮김 / 이른아침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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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이퍼그라피아와 연이어 읽으려고 구입한 책.

책도 이렇게 파도를 타듯 비슷한 주제들을 연관지어서 읽는게 좋다. 여기서 또 어떤 주제를 찾아내서 이어가면 좋겠지만, 그게 또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가끔 읽어야 하는 실용서적이란 것도 있고 호흡을 딱 끊고 싶을 때도 있으므로.

아무튼, 이 책은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 라는 너무나 흥미로운 제목을 달고 있다.

오오 - 읽기를 탐하며 지식의 허영을 참지 못하는 자에게 얼마나 유혹적인 책인가.

검은 양장에 두툼한 책.

 

이 책은 언어문학과 교수인 한스 요아힘 그립이 "읽기"라는 주제를 매우 넓게 잡고 시작한다.

READING 이라는 것은 단순히 문자로 된 것을 읽어내려가는 작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을 보고 기상현상을 예측하고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같은 그림을 보고 그 뜻을 유추해내는, 말하자면 일종의 기호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들부터 시작한다.

마치 스테파노 추피의 천년의 그림여행의 읽기 버전인 것처럼 아주 오랜 옛날 인류가 하늘과 별을 읽기 시작한 것부터, 생존을 위해 몸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의술의 탄생, 그리고 수메르인의 쐐기문자부터 문자의 시대로 돌입한다.

 

이후 알파벳의 시대를 거쳐, 그리스 시대의 문학과 교육을 통해 본 읽기와 지식의 역사를 보고 이어진 로마시대,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독서, 중세시대의 수도원 읽기(장미의 이름이 생각나는),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술의 발명까지로 마무리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조금 더 미시사적인 관점을 담았길 바랬는데, 책은 거시사적 관점에 가까운 편이며, 다분히 서양중심적이라 불만스럽기도 했다.

문자라고 하면 당연히 알파벳의 대칭축에 설만한 한자에 대한 이야기도 일체 없으며 이 책의 저자는 메소포타미아 동쪽의 역사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책과 함께 동양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 같이 소개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직 내 손엔 들어오지 않았고, 그리스- 로마를 넘어가면서 서양중심적인 사관이 자꾸 느껴져서 기분이 잡쳐버렸다.

다 읽고 난 다음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에 대한 자부심에서 딱 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물론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마틴 루터와의 연결고리가 잘 이어지면서 근대사회로 진입하게 되고 봉건사회가 붕괴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서양사의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이 작가의 책은 어쩌면 동양의 ㄷ자 하나 보이지 않는지,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서양사라고 제목을 바꾸는 편이 좋을 듯.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나서 가격을 살펴보고 "헹! 비싸기는 오라지게" 할 수밖에 없었던 책.

자괴감일까?

한국의 출판문화, 가난한 저자들과 출판사들 생각이 나서 씁쓸해진 뒤끝이다.

 

2006.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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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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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할 말이 너무 많은 책

간혹 - 책을 선물받기도 한다. 그 횟수는 아주 "간혹"이다.

그럭저럭 책을 많이 읽는 편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그렇지 않을 때도 분명히 있다) 굳이 나에게 어떤 책을 선물해야 할 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간혹가다가 선물받는 책들은 전혀 내 구미에 땡기지 않는 중고도서이거나 (이 경우는 상해에서 유학생활중에 많이 있었다. 독서에 굶주린 내게 책을 보내주는 경우), 정말로 오오오~~ 바로 이거야~!! 하게 되는 딱 구미에 맞는 아주 사려깊은 책 선물.

 이 책은 선물받은 책이다. 요즘의 20대 같지 않은 한 청년에게 받는 책인데, 그가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은 이 책에 대한 의견을 같이 나누고 싶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그는 나에게 이 책을 건네면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라고 말을 덧붙였다.

 - 그래 이 책은 너무 어이없는 현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그 어이없음에 대해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게 하는 재주가 있는 책일 것 같다.

저자인 박상익씨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고, 전문 번역인이기도 하고, 여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하다. 지천명이 지난 나이의 이 양반께서 여태 참아왔던 울분을 책 한 권에 성토하셨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나라 출판계, 번역계, 인문교양계에 대한 애정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지적 인프라. 우리사회의 지적 인프라 구축이라.

과연 우리 사회에 인프라를 구축할 만한 지성의 건더기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한국이 인문학의 위기를 맞이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어느 날 모대학이 모 기업에 인수되면서 경제 경영학부 아이들이 즐거워지면서, 서울대학원의 인문학부가 미달이 되기 시작하면서, 아니 어쩌면, 도제제도의 지적권리 세습이 이루어지는 이상한 권력구도가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이 나라가 건국되면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문제일 지도 모른다. 

 번역의 오지 - 대한민국 

 저자는 일단 외국의 번역의 역사를 소개한다. 일본과 중국, 이슬람 문명과 서유럽의 번역 역사를 소개하면서 번역이 가져오는 사회의 지적 혜택에 감탄한다. 훌륭한 동서양의 고전들, 우리가 읽어야 한다고 하는 책들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존재하는지 확인해보았는가?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중국어의 한계에 부딪혀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보려고 했던 책들은 80%가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엔 번역본이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논어, 제대로 된 장자. 그런 것들은 없었다. 최근엔 한길 그레이트 북스에서 중국의 고전들을 부지런히 번역 출간하고 있지만, 그 때는 일본서적을 중역한 이산출판사의 책들이 고작이었고 어떤 것들은 1960년대 출판된 책들이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중국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고대소설인 서유기의 완역본(한국에서는 삼국지가 인기있지만 중국에서는 서유기의 인기를 따라갈 수 없다), 사기의 완역본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은 그만큼 돈 안되는 책은 번역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였다. 

 저자는 이러한 한국의 슬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모국어가 처한 구슬픈 현실, 글쓰기에 젬병인 젊은이들을 한 번 꾸짖고(20대만 지나면 누구나 하고 싶어지는 일), 번역자이자 소설가인 안정효씨가 "매춘교수"라 명명한 학생들의 번역료를 집어삼키는 못되먹는 교수들의 비양심적인 번역발표 행태를 고발하고 지식인 답지 않은 지식인들의 행태와 이 나라에서의 번역으로 먹고 살기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먹고 사는 생계 문제로 싸이월드에서 타운이라는 기업체들의 홍보용 홈페이지를 두 개 운영하고 있다. 방명록에는 늘상 글들이 올라오고 공짜나 이벤트를 바라는 어린 학생들의 글이 올라오는데, 초등학생-중학생들의 글은 너무나 쉽게 파악이 되는 것이, 맞춤법을 제대로 쓰는 학생이 없다는 것이다. 띄어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저히집 강아지가 마니 아파요."라든가, "저히 강아지가 배변만 눠여"라는 문장도 있었다.

배변만 눠여 라는 문장은 20대 여자가 쓴 글이었다.

우리나라에 무지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고 싶다면 타운운영을 해보라고 권할 정도로, 인터넷 사용자들 중에 엄청난 인구가 문맹이 되어가고 있다. 초등학생들은 마침표나 쉼표를 적절한 곳에 찍을 줄 모르고 오문과 비문에 대해 별다른 관심도 없는 듯 하다. 

 이러한 한국어의 현실과 책을 읽지 않는 문화가 출판업계를 굶주리게 만들고 결국 엉성한 번역물들을 불러모으기도 한다. 팔리지 않는 책은 만들기가 곤란해지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번역물이나 명작 / 고전들이 줄어드는 것이다. 혹은 정말 정말 연로하여 이 양반이 번역을 하실 수나 있었는가 하는 분들의 번역물이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 중에 번역이 너무 황당무계하여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따위 번역을 하려면 차라리 쓰레기나 치워라"는 독후감을 인터넷에 게재한 적이 있다. (인터넷에 독후감을 써 온 것은 199년 10월부터였다) 그 후 모든 번역서를 한 번씩 의심하게 되는 버릇이 생겼으며, 그게 외국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고, 원서를 사들이고 읽어보려 노력하게 되었으며, 한 번 번역이 꽈당이다라고 느꼈던 출판사는 꼭 기억했다가 그 출판사의 번역물은 기피하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짜증나게 오역투성이인 인문서적들은 많이 만나지 않아서 그럭저럭 한국어 책을 잘 읽고 있지만, 때로 인문사회과학이 아닌 분야의 서적들 중 역시나 "나는 번역물입니다"라고 행간에 써 있는 책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번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한 두번씩 어설프게나마, 혹은 우연찮게 번역에 가담하게 되는데, 나도 그런 일을 몇 번 해봤고 또 지금도 늘상 반복되는 것이 번역과 통역이다. 그저 외국어를 두 개 정도 할 줄 안다는 것 때문인데, 번역이라는 것은 어학적 능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의뢰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초에 홍콩에서 제작된 중국영화의 메이킹 필름 몇 건과 관련 보도 기사를 번역할 일이 있었는데 의뢰자는 홍콩과 대륙과 대만의 언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번역 의뢰는 언제나 번갯불에 콩! 이다. A4 두 장밖에 안되니까 내일까지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면 그 양은 두 배 - 세 배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국어 - 중국어 번역시에 왜 결과물의 양이 이 것뿐이냐는 항의, 중국어 - 한국어 번역시 원고료 때문에 글을 늘여붙인 것은 아니냐는 어처구니 없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잘 아는 후배가 부탁했던 일이라 사실 무료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작업은 그 노동량에 비해 댓가가 터무니 없이 적기 때문에 차라리 봉사하는 마음이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주는 편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비디오 테잎을 받아들고 틀어보니 이건 표준어, 광동어, 영어가 짬뽕이 되어 버린 테잎이었고 가격은 그저 일괄적으로 통일해 장당 1만원 - 1만 5천원 선에서 해결을 보았다. 1994년 -1997년까지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남편은 98년도에만 해도 중국어 번역이 장당 7만원이었다면서 너희 세대 불쌍한 세대라고 놀려댔다.

임신 말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을 가지고 골머리를 썩힐려니 (번역은 양이 아무리 적어도 일단 머리부터 아프고 시작한다) 지겨워져서 취업준비중이던 후배에게 나머지분은 넘겨버렸다.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로 돈 좀 벌어보겠다고 맡았다가 도저히 글자가 벌레처럼 눈앞에서 스물거려서 더 이상 진행을 시키지 못하고 남에게 넘겨버리는 일.

그에 비해 댓가는 ─ "차라리 내가 꽁짜로 해줄께"라고 말하고 싶은 정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다보니 전문적 번역인력들을 부족하고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 밑에서 품앗이로 한 번역물을 출판사 편집자가 짜집기 하여 만들어내는 출판물들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다. 사전편찬은 커녕, 한국의 고서 번역이나 꿈꿀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만들어져 있느냐는 것이다. 

 책사랑 

 이 책의 저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이라는 작업을 - 그것도 매우 난해한 인문학 서적들만을 골라서 - 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당연히 애정이고 열정이다.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할 수 없는 일, 좋아한다기 보다는 사명감으로 이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다른 세상의 아름다운 작품하나 남겨주겠다는 사명감이 번역인을 살아남게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엔 책을 사랑하는 저자의 애정관을 보여주는 이야기와 번역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것보다도 책을 꾸준히 사서 모으는 것이 지적 생활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아 - 물론 매우 매우 맘에 드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런 도서 구매로 지적 생활을 너무 오래 영유해 온 나로서는 감히 어디서 강렬하게 이런 주장을 하려면 책과 관련된 것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정말 정말 후진국임에 틀림없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1시간이면 다 읽어버릴만한 책들이 아주 잘 팔려나가고, 읽어야 할 고전들의 번역본은 있지도 않으며, 도서관에서는 출판사와 저자에게 책을 구걸하고 사서들은 책을 나르는 노가다에 불과하며, 찾으려는 자료는 통합검색이 되지 않아 스스로 자비를 들여 사대야 하는 우리나라의 책/출판/독서 체계는 문화경제적 후진국인 중국과 그닥 다르지 않다.

중국이 후진국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출판의 엉망진창을 보여주는 사실은 한 번 지나간 책은 주문 할 곳도 없고 구할 곳도 없다는 것이다. 도서관에도 없는 경우가 많다. 서점에 가면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책을 찾기도 어렵다. 워낙 넓은 나라에 엄청나게 많은 출판사들 덕이기도 하겠지만, 정리할 생각들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학술사라는 학문을 연구하던 한 교수님은 10년에 거쳐 이룬 학업을 책으로 냈더니 10위안(한화 1500원정도)이었고 지금은 오래되서 세일이라 반값도 못 받는다고 담배를 물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래도 중국은 국가에서 외래어를 지정하는 기관도 있고 사전편찬도 잘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문화적 / 지적 수준은 그에도 못 미치는 지도 모른다. 

 할 말이 마구 생각나서 책을 읽으면서 내내 흥분하게 만들던 박상익의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이 책은 번역에 코털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좋은 책이다. 피와 땀으로 썼다는 것만큼 책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은 없다. 게다가 인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어준다면 금상첨화 아닌가. 반역이 되더라도 아직도 번역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을 다시 불지를만한 책이다.

 
200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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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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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책은 동문선에서 문예신서를 통해, 그리고 롤랑 바르트 전집을 통해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이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텍스트의 즐거움"과 "강의", 그리고 스티븐 히스와의 "대담"등이 엮여있으며, 각 인터뷰에서 발췌하여 엮은 롤랑 바르트의 주요어 20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내 육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상념을 쫓아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왜냐하면 내 육체와 나는 동일한 상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라는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관, 그리고 텍스트의 즐거움 - 곧 텍스트를 즐기기에 대한 긴 화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나타나 있다.

읽혀지는 것과 읽혀지지 않는 것의 리듬텍스트는 그 자체로써 유희하며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하는데서 두번째로 유희를 하는, 그가 텍스트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하여 몇가지의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쨌거나 롤랑 바르트이건 그레마스이건 데리다이건, 미셀 푸코나 레비 스트로스나 그들의 기호학은 마치 다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가 지식인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역사의 찌꺼기라고 하는 것처럼 그저 그들의 피나는 연구는 언어에 관심을 가진 인류의 한 역사의 부스러기 쯤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부스러기와 찌꺼기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줄 긋고 있는 나는 역사의 쓰레기를 쫒아다니는 바퀴벌레정도 될려는지. 

 인류의 역사는 모두 권력의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짜라면,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기, 그리고 그 권력이 가장 깊게 깃든 곳이 언어와 언어체(랑그)라는 그의 주장, 다시 말해, 반동적인 것도 진보적인 것도 아닌 다만 파시스트적인,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하게끔 강요하는 그 권력에 대한 도전들의 찌꺼기, 그리고 그 도전들의 찌꺼기를 추종하는 지식인 흠모 집단. 뭐 그런 것들로 구성된 게 역사와 인류가 아닌지. 

 학부때, 문학선생이 그런 말을 했었다.

문학은 沒有用의 것이라고. 소용이 없는 것이 문학이다. 文學은, 글에 관한 것들이다. 곧 모든 지식의 바탕이다라고 한다면, 그 선생의 이론과 롤랑 바르트는 어느 한 선에서 닿아있다. 

 아이를 낳은지 백일도 되지 않았고 매일 매일 미역을 불리고 미역국을 끓이고 아이의 기저귀 값이 비싸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내가 도데체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는가에 대해서 적당히 둘러댈 그 어떤 변명도 찾지 못했다. 굳이 왜? 라고 묻는다면, 그냥? 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

사람은 가끔 그렇게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들을 한다.

어쩌면 언어와 언어체에 대해서 지지부지하게 평생을 매달린 롤랑바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지식인들 역시, 나만큼 엉뚱하고 비실용적인 짓을 ─ 평생토록 하셨을 뿐 어닐까. 

 세상 어딘가에, 비슷한 이유로 나같이 비실용적이며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할 나같은 바퀴벌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2006. 5. 11.

 

PS. 기호학 서적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문장을 여러번 읽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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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7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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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기호학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깝쭉"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때는 정말 그야말로 "깝쭉"거리기만 했던 시절이라, 민예총이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하던 기호학이나 문화비평에 관한 강의를 한 두 개 정도 들으면서 - 요즘은 그런 강좌가 많지 않은 듯 하다 - 피해갈 수 없는 도서 충동구매로 발동을 걸던 것이었는데, 기호학에 대한 기본 개론서를 세 권 정도 읽고, 롤랑 바르트를 시작하려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와 "텍스트의 즐거움"을 사놓고, 이도흠교수의 책을 한 권 준비하고.. 뭐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기호학이라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긴 하지만 언어학적 접근으로 시작하여 일단 언어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적 사념을 정리하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하기 쉬워지는 학문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책을 읽다가도 중간에 막혀버리는, 그런 점이 있었다. 물론 책을 그냥 읽어대면 그만이겠지만, 그 떄는 어쩌면 좀 더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의미로 책을 대하려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적인 수단이 일종의 기호이며, 그 기호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감히 내가 정의내리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문화비평과 매우 근접한 학문이라는 것은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리가 빠개지도록 난해한 글을 읽고 싶은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말장난임에 분명한 문장때문에 머리속에서 마구 도표를 그려가면서 정리를 하느라 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런 글들. 

 이 책은 기호학자이며, 언어학자이고, 또한 언어의 유희를 즐겼던 학자 - 저 표지의 멋진 인상을 가진 - 롤랑 바르트의 낙서장이다.

물론 옮긴 이의 말에는 이 책은 자전적 에세이 겸 평전과도 같으며, 그의 후기사고를 총체적으로 통합 혹은 연장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짧은 단상들을 도처에 메모해 놓은 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그의 메모장, 낙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질이 떨어진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표현하는 글은, 꼭 정자세를 하고 써내려간 정갈한 원고만이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는 아니다. 어쩌면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을 가장 진솔하고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짧게 적어놓은 메모글들임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게다.

책의 시작은 그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 몇 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는다. 그리고 책은 내내 짧은 제목과 그에 대한 그의 단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모든 단상엔 당연히 그의 흔적이 남아있으므로 롤랑의 사상과 학문등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언어의 유희, 기호학의 표현 - 그 진수를 정확히 간파한 현명한 학자의 고상한 유머라고 할까.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아주 진솔한 생각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책을 기점으로 그의 정갈한 글들에 진입할 수 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인 것처럼 이 책을 종착점으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멋모르고 먼저 읽어버린 것을. 

 메모. 일기. 낙서.

그 모든 것들이 기호가 되어 표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는 매력적인 평전임에 틀림없다.

 

2006.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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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Mr. Know 세계문학 17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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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기대하지 않고, 줄거리를 모른 상태에서 즐기는 이야기거리가 재미있다.

영화도 그렇듯이, 책도 그러하겠지만.

간혹 책이라는 것은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나, 뉴욕 3부작 같은 작품을 만나면 처음부터 되돌려 다시 읽어야 하는 난감한 문제가 펼쳐지기도 한다. 뉴욕 3부작은 그렇게 고리처럼 엮여있는 3편의 중편소설이다.

 

물론 제목에는 폴 오스터 장편소설이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한 편의 긴 장편소설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3편의 중편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말하자면 3편의 중편소설이 독립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3편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인하여 1편의 장편소설이 또 다시 탄생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편 / 유리의 도시 , 2편 / 유령들, 3편 / 잠겨있는 방, 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형식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탐정, 쫒는 사람, 쫒기는 사람과 미스테리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것뿐, 탐정소설의 심리적이거나 심각한 알리바이등까지 빌려왔다는 것은 아니다.

 

첫 작품 유리의 도시를 읽고 나서 나는 매우 실망하였고, 이런 젠장. 폴 오스터는 간혹 별루인 경우가 있어. 라고 읖조리며 빨리 읽어치워야겠다 하고 두번째 소설로 진입했다. 두번째 유령들 역시 너무나 추상적인 등장인물들의 이름 - 블루, 블랙, 화이트, 브라운 등 - 때문에 기기묘묘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3번째 잠겨있는 방의 짜임새 있는 스토리에서야 결국 작가가 이 세편의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등장인물들의 앞에 두 소설과 중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책을 덮지 못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책장을 앞뒤로 넘겨가며 퍼즐맞추기처럼 맞추게 된다.

 

이 책이 말하는《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에 대한 이야기는 보들레르의 Il me semble que je serais toujours bien laou je ne suis pas. 다른 말로 하자면 :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 좀더 의미에 맞게 해석한다면 : 어디든 지금 내가 있지 않은 곳이 내가 나 자신인 곳이다. 또는 아주 대담무쌍하게 옮기면 : 어디든 다른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며, 〈글을 쓰고 싶지 안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글쓰기는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병이지만 이제 나는 그 병에서 회복되었다네"라고 말하고 싶은 폴 오스터 자신의 이야기를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처럼 스스로를 투영시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폴 오스터는 분명히 쉽게 쓰는 작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신병이 난 것처럼 신들린 듯 한 번 펜을 잡으면 미친듯이 속도전으로 써내려가는 작가.

평생 글쓰기의 열병을 앓으면서 그 글쓰기의 병에서 회복되고 싶어하는 작가가 아닐런지. 빵굽는 타자기가 그의 초년병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과정이었다면 뉴욕 3부작은 그의 작가 중기, 인생의 화두를 극복하려는 안간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쩌면 그의 분산된 뉴욕 배경의 소설들을 통해 21세기 뉴욕의 세르반테스가 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분들은 이 책의 맨 앞 부분부터 인물의 이름 하나 놓치지 말고 꼼꼼히 읽어보시면 알게 되실 듯.

 

폴 오스터의 힘은, 읽는 것의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는 매우 쉽고 간단한 원리에 있다.

아, 물론 첫번째 이야기인 "유리의 도시"를 읽고 빨리 읽어치워야지 했던 나의 판단은 대단한 오판이었음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

 

2006.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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