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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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야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지금부터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별 것도 아닌 내 표현력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별 이야기나 되는 것처럼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얼음 커피 한 잔 가져다 놓고 쓴다.

 

 

1.

 

          사회주의는 실패한 이론일까?

 

          소련 망한거 봐라, 사회주의 그거 똥이다- 라는 공격을, 그거 진짜 사회주의 아니다, 스탈린 지 맘대로 한거지. 맑스는 그렇게 말한 적 없거든- 으로 받는다. 사회주의에 뭘 넣고 뭘 빼며, 어떤 것이 진짜고 어떤 것이 짝퉁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아직 이어지는 가운데, 결국 그들은 '현실'사회주의는 소련의 패망과 동시에 실패로 끝났다는 정도의 워딩으로 합의점을 찍고 또 다른 전장에서 으르렁거리기로 한다. 과연 사회주의의 범주는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자들? 그것도 아니면, 맑스가 불지옥에서 돌아와 울타리를 쳐줘야 하나?

 

          맑스/베른슈타인/스탈린/트로츠키가 주장하는 바가 각각 다르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이므로,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내부 모순된 이론으로 봐야 할까? 통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주의의 카테고리를 조금 더 세분화해 변증법적 유물론/사회민주주의/스탈린주의/트로츠키주의의 경합으로 해석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2.

 

          읽은 페미니즘 책 수가 늘어날수록 할 수 없는 행동이 늘어난다. 부끄러움이 늘어난다. 내가 싸질러 놓은 과거에서 풍기는 썩은내가 현재까지 침투해, 거울 속에서 머저리를 발견하고 인상 찌푸리는 빈도가 늘어난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이 모든 변화가, 특정한 사상을 0만큼 알고 있다가 10, 20만큼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매번 조금씩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양적인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은 책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온다. 높은 곳에도 있고 낮은 곳에도 있다. 거시에서도 피고 미시에서도 핀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의 매력이자 마력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성 소수자들은 물론 일정 수의 남성들 또한) 언어나 시선, 물리력, 사회압력에서 오는 젠더 폭력의 사례를 머릿속으로 구체화할 때, 드라마나 영화, 소설의 한 장면에서 상황을 빌려와 주인공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볼 필요가 없다. 그저 어제 회사에서 있었던 일, 지난 주 밤에 겪었던 일, 지난 해 입사 원서를 넣으러 다니던 일들을 다이렉트로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의 자리에서 페미니즘이 온다. 그래서, syo가 페미니스트라고 치고, 정희진의 모든 책, 모든 글에 100% 동의한다 해도 syo의 페미니즘은 정희진의 페미니즘과 닮았을지언정 같지는 않다. 나는 정희진을 읽을 수 있을 뿐, 정희진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사상을 지니고 syo의 바깥과 마주하며 만들어지는 페미니즘은 오롯이 syo의 것이 된다. 

 

          얼마나 많은 페미니즘들이 경합해 왔으며, 지금도 때로는 어깨를 겯고, 때로는 어깨를 부딪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 다양성의 별자리를 헤고 있다보면 까무룩해질 때가 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가 단순해 보일 정도로 넓게 펼쳐지는 스펙트럼.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먼저 없애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나쁜가, 어디부터 적인가, 어디까지가 동지인가, 칼인가, 아니면 펜인가, 도대체 끝판 대장은 누구인가. 이 모든 문제에서 사상과 삶이 뒤엉키며 각자가 품는 답에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왜, 누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끊어내고 추상적으로 묶어내, 하나의 사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걸까?

 

 

3.

 

하나의 전체 혹은 '복수의 전체'를 집합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집합은 닫혀 있고, 닫혀 있는 것은 모두 인공적으로 닫혀 있다. 집합이란 언제나 여러 부분들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다. 전체가 부분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특별한 의미에서 부분을 가지는 데 불과하다. 전체는 분할의 각 단계에서 본성을 바꾸는 일 없이 분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실의 전체는 정말로 분할 불가능한 연속성일 것이다."

_ 질 들뢰즈, <시네마 I>,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45쪽에서 재인용

         집합은 두 가지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가야 할 길을 막을 수 있다.

 

         집합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 날카로운 칼이다. 포함의 뒷면은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다. 안과 밖이 작은 연못의 헤게모니를 잡겠다고 피터지게 싸우게 만들고 당신은 유유히 바다로 가라. "divide and conquer"는 모든 제국/자본/기득권자들이 수 천년동안 즐겨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해 그 효용을 증명한 기가 막힌 전략이며 여전히 잘 작동한다. 

 

         집합이 닫혀 있으므로 집합 안의 원소들은 얌전하다. "3 이하 자연수들의 집합" 속의 1, 2, 3은 그저 1, 2, 3으로 존재할 뿐, 서로 연산하고 연산되며 상호작용을 통해 변용될 수 없다. 여성은 또한 노동자일 수도 있고, 흑인일 수도 있으며,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장애인일 수도 있기에, 어떠한 여성도 단순히 '여성'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여러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작용하는 1의 페미니즘은 자연히 2, 3의 페미니즘과 차이가 있다. 페미니즘은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의 연대를 통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거의 페미니즘의 운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합은 원소들간의 연대를 무참히 박탈한다.

 

 

4.

 

          훌륭한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많다. 페미니즘의 영토에는 때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렵고 심오한 사상들이 즐비하지만, 누구도 그 영토의 독재적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사상은 연장이다. 세상을 고치기 위해 그 연장을 손에 든 이는 페미니스트 개인이다. 많은 것들을 연대하여 함께 해결해야 하겠지만,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나의 고유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 물결처럼 '우리'가 되어 흐르는 날 가운데서도, 그 '우리'가 나와 다른 나와 또다른 n개의 나로 이루어진 '나들'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나의 연장통을 채우는 것. 이게 syo가 2017년 7월 5일 현재 지니고 있는 페미니즘이다.

 

          나는 이 책이 페미니스트 '모두'를 하나의 실로 꿰어넣을 수 있는 페미니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벨 훅스의 페미니즘이 내 연장통에 꽤 큼직한 망치와 톱을 넣어줬으므로, 다른 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다양한 연장 하나쯤 쥐어 주리라 상상하며, 이 책에 녹아 있는 그녀의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다는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5.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서 더 말하려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말기로 했다. 긴 말 했지만, 긴 말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일기냐 리뷰나 잠깐 고민했지만, 내 리뷰는 원래 일기였다. 그리고 그건 잠깐 고민하고 말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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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0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씨... 뭔가 내가 횡설수설 써놓은 글을 쇼님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같네요. 자존심 상해... 히힛(왜웃지?)

syo 2017-07-06 06:50   좋아요 0 | URL
제가 읽어보니까 다락방님, 제 글에는 그냥 012345가 붙어있을 뿐, 횡설수설은 너나 할것 없이 ㅎ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07-0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만가지가 연상되어 곱씹게 되는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이 참 좋은 글이라 생각듭니다. ^^

syo 2017-07-06 06:5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 칭찬은 황송합니다.
사실 저는 북다님의 글이야말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요. 전 그냥 일기장에 쓴 글을 공개하는 수준이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군요,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선명하게 다가오더군요. 페미니즘을 읽을수록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진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yo 2017-07-06 10:14   좋아요 0 | URL
앗 곰발님 주최 이달의 당선작됐다. 짱이다!!!

cyrus 2017-07-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갈래로 나누어진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합의되지 못한 상황‘으로 이해합니다. 이를 근거로 내세워서 페미니즘의 학문적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yamoo 2017-07-06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 주창하는 단 하나는 인간해방이더군요. 근데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세상은 이분화되는 듯합니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아닌것. 그러면 자연스럽게 투쟁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을 한다? 전 이게 다분히 ‘프로파간다‘처럼 보입니다. 가만보면 ‘페미지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매우 공격적으로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것 자체가 인간해방하고는 거리가 먼데....어쨌거나 인간해방을 도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뭔가를 해 나가야 할 듯한데....제가 이 분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지라...더이상 언급하는 건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 듯합니다.^^;;

저도 쇼님이 생각하시는 부분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리된 글로 보니, 좋네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syo 2017-07-06 21:41   좋아요 1 | URL
항상 읽고 정성껏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yamoo님 ㅎㅎㅎ

시작부터 모두가 쓱 납득하고 함께 착착 나아갈 수 있는 사상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래도 없죠 그런 거. 심지어 자유 평등 뭐 이런 당연한 것들조차 얻기까지 진통이 있었으니까요. yamoo님이 우려하시는 부분들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yamoo님처럼 독보적이다 못해 독재(?)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제겐 없다보니 맨날 일기나 씁니다 ㅎㅎㅎ

쇼코 2017-08-0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써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사실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찾아가며 읽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아직 관련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제가 쇼님의 리뷰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퍽 많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워 진다는 말씀도, 집합에서 포함의 반대는 배제고 배제는 분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씀도, 사상은 연장이라는 말씀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어요.
특히 사상이 연장이 된다는 부분은 저도 요즘 많이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젠더 위계의 하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에게 페미니즘이란 그저 한 발 물러서 관조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저에게 이 책이 저만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거겠지요.
표현이 서툴러서 제 생각을 제대로 썼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툴지만 꼭 표현하고 싶었어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리뷰로 좋은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