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9/11은 그 질량이 너무도 거대해 일단 문학에 등장하면 다른 모든 서사를 빨아들인다. 설령 작가가 최대한 무감각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루려 애써 본들, 독자는 거의 자동적으로 모든 부정적 감정이 그곳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오고, 모든 긍정적 감정이 그곳으로 소용돌이처럼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 막대한 요동의 출처는 사실 책이 아니라 기억이다. 작품 속에 있는 모든 9/11들은 작품 속에 있지 않다. 작품을 읽는 이들의 기억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인이 아니지만, 9/11이 독자의, 관객의, 시청자의 가슴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불에 덴 듯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가까스로 헤치고 나온(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 영향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감정의 두터운 중력을 우리는 4/16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처음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은 하나같이 9/11을 중심에 놓고 저희들끼리 북적거렸다. 9/11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나.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재정렬되나. 9/11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빼앗고 무엇을 손에 쥐어주었나. 그 모든 것을 주인공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사랑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주제의 축에서 겉도나.
2
그러나 이 소설이 정치적인 것에만 관심을 할애하는 건 결코 아니다. 작가는 정치만을 다루는 게 부담이었던지, 사랑의 이야기를 그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의미와 구도의 균형추를 맞추러 햐는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의 장점은 정치와 사랑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낸 작가의 빼어난 수완에 있다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찬게즈와 에리카의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이고 은밀한 사랑이지만, 국적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남녀 사이의 사랑이며 그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고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도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차원의 것을 넘어 뭔가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_166p 옮긴이의 말 中
저 대목을 읽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최소한 내겐' 더 크고 넓은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랑을 알레고리로 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상실과 그 뒤를 따르는 나의 상실을 가리기 위해 더 크고 더 넓은 것을 가림막으로 쓰는 무모한 이야기라는 것을. 사랑이 겉도는 것이 아니라 9/11이, 거대한 담론이 사랑의 주변을 맴도는 당돌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렇게 시점을 전환하는 순간, 모든 서사들이 오차없이 맞물려 돌아감을 느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거대 담론을 해독하는 것을 뼈대로 삼고 사랑 같은 사적인 감정들을 장식적 요소로 배치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 스스로의 무신경함에 얕은 구역질이 났다.
왜? 왜 그래야 하나. 왜 개인적인 차원의 것은 "더 크고 넓은 것"을 위한 알레고리여야만 하나. 왜 항상 작은 것은 큰 것을 위해 복무해야 하나. 그리고 개인적인 것은 왜 항상 더 작은 것인가.
어떤 억압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왜 우리는 더 "중요한" 혹은 더 "시급한" 뭔가를 위하여 탁현민의 "작은" 허물을 눈감아야 하나. 그 "더 크고 넓은 것"은 누가 정하나. 그것을 정하는 방식이 공정하다면, 왜 항상 눈감아도 좋을 허물들의 종류는 정해져 있나. 왜 전에 참아야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도, 그리고 다음에도 참아야만 하나.
더 큰 관점에 집중하는 방식은 종종 폭력적으로 소수의 팔다리를 자르고 해석과 정의를 독점하려는 경향을 띤다. 그러므로 더욱, 이 책은 순수하게 사랑 이야기라고 하자. 당신의 눈에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작가가 직접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선언하더라도, 나는 그렇다고 우기고 싶다. 그리고 독자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예술은 분기(分岐)하고 차이를 생성한다던데.
3
증거는 많다. 찬게즈가 고향으로 눈을 돌리고 미국의 어두움을 느끼는 순간들은 에리카와의 사랑이 허물어져 가는 궤적에 그림자처럼 접붙어 있다. 미국시민, 상류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쌓아나가며 뉴욕을 누비던 찬게즈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파키스탄인으로 돌아가는 시점은 쌍둥이 빌딩이 넘어지던 날이 아니다. 사랑하는 에리카와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인식한 순간이다. 찬게즈의 감정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지점 역시 9/11이나, 고국에 펼쳐지는 엄혹한 현실에 대한 소식을 접한 때가 아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에리카의 마음 속에서 몰아낼 수 없는 죽은 크리스의 그림자에 무릎 꿇고, 나를 크리스라고 생각해보라는 비참한 부탁에야 겨우 열리는 에리카의 몸을 안고 난 이후다. 9/11이 지나고 나서도 그 슬픈 밤이 오기 전까지는, 찬게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옮긴이는 9/11을 보며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는 서술을 통해 전사로서의 찬게즈를 읽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모든 사건이 이미 끝난 후 파키스탄에 돌아와 과거를 전하고 있는 현재의 찬게즈 입에서 나온 것이다. 찬게즈는 사랑을 한 뼘 더 잃어갈 때마다 한 뼘 더 미국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에리카를 마침내 잃었을 때, 그때서야 찬게즈는 미국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지금 자신의 모습에 이르는 과정의 일관성과 대의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에리카와의 사랑이 끝내 이루어졌다면, 그래도 찬게즈가 미국을 버렸을까? 그래서 나는 찬게즈가 전사라고(혹은 처음부터 전사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랑의 전장에서 전사한 패배자일 뿐이다. 한 번쯤은 그 전장에서 전사해 본 경험이 있을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4
그녀는 메모장을 연필과 함께 나한테 주며 말했어요. "당신네 글씨가 어떻게 생겼죠?" "우르두어는 아랍어와 비슷해요. 그런데 글자 수가 더 많죠." "나한테 보여 줘요." 그래서 나는 보여 줬죠. 그녀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어요. "아름답네요. 무슨 뜻이에요?" "이건 당신 이름이에요. 밑에 것은 내 이름이고요."
_29p
그때,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옆구리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더군요. 문득 그녀도 한때 그 자리에 멍이 들었었다는 게 떠오르더군요.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내 살갗에 손을 대어 봤어요. 결국 없어지겠지만 그 멍이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았으면 싶었어요.
_151 152p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초조해요?" "초조하다기보다는 불안해요.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
_ 49p
이 책이 좋은 책인 이유는, 어떤 이에게 거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알레고리 역할을 하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 거대 담론이 사랑에 복무하는 역전적 방식으로 읽힐 여지 또한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알레고리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읽었을 때 독자의 가슴에 더 맑게 울리는 순수한 사랑의 문장들이 곳곳에 별자리처럼 박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라면 누구든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이 책은 어떻게 읽어도 뜻깊겠으나, 한 번 정도는 사랑의 좁은 자리에 앉아 큰 것과 넓은 것을 돌려세우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조용히, 사적으로, 비밀스럽게 거니는 방식도 권하고 싶다. 최소한 이 책에서만큼은, 그 방식이 결코 손해 나는 독법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