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개인적인 기준으로 책을 두 가지 질문을 통해 분류하곤 한다. 지식을 전하는가/지혜를 전하는가. 지혜를 전한다면, 질문을 던지는가/답을 던지는가.



2.

            지혜와 지식의 경계는 대체로 자의적이거나 모호하며, 어떤 책은 질문과 답이 모두 있거나, 질문도 답도 없거나, 질문 같은 답, 답 같은 질문이 있거나 하므로, 저런 분류가 나이브하고 종종 폭력적이라는 것은 인정. 그럼에도 저런 분류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세상에는 책이 너무도 많고, 읽을 시간은 너무도 모자라고, 대놓고 답을 던지는 책은 너무도 별로고(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거를 책을 고르는 데는 너무도 충분한 '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은 질문하는 법을 알려주는 척, 풀이방법만을 알려준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척, 자신이 세상을 다르게 '본 법'만을 자랑한다. 나는 이렇게 이렇게 읽었어요. 어때요. 몰랐죠? 멋지죠? 심지어 그것은 박웅현의 '풀이'일 뿐, '정답'도, 심지어 '해답'도 되지 못한다. 


            박웅현이 이철수 화백의 판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만들었다며 자랑하는 두부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다. "이 콩이 유전자 변형을 했는지 안 했는지, 유전자 변형이 유해하지 무해한지, 그런 걱정, 주부님의 몫이 아닙니다." 사전에 따르면 주부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이고 안주인은 '집안의 여자 주인'이다. 저 문구는,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는 역할을 특정 성에 한정시키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이 가사 노동을 하는 구도를 아무런 고찰없이 진술한다. 더 중립적인 단어(이를테면 고객님)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주 타겟인 '주부님'들에게 가족의 건강을 고려하는 헌신, 유전자 변형의 유해성을 따져보는 지성 같은 훌륭한 가치들을 부여하여 제품 구매를 유도하려는 의도였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 책에 별 두개를 매기기 위해, 젠더의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없다. 실제로 저건 지엽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다만 떡하니 책 뒷편에 써 놓은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 라는 선전 문구를 보며, 문학적/예술적 감수성 말고도 인권/젠더/인종 감수성도 생각해 봐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가 박웅현에게 도끼로 작용했겠지만, 그 도끼가 그의 모든 얼음을 깰 수 있는 만능 도끼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물론 완전히 무용한 책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눈 앞의 얼어붙은 바다를 도끼로 깨뜨렸다고(혹은 깨뜨릴 도끼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쭙고 싶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새로움을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발견한 새로움들이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요. 혹시 김훈의 책을 읽으며 박웅현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를 갖게 되셨나요. 더 나은 사람이 되셨나요. 만약 그러시다면, 그것이 진짜 이 책 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이 제공하는 얄팍한 지적 포만감은 어떤 이들을 더 깊고 더 넓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만큼, 또 다른 어떤 이들을 그 자리에서 배 두드리며 늘어지게 한 잠 자도록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더 나아갈 이들은 배가 부르든 고프든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이제 이 책 위에 텐트를 치고 당당히 머문다. 나, 이런 좋은 책도 읽는 사람이야. 비슷한 책들을 서가에 계속 꽂아 넣으며 지적/감성적 죄책감을 자가치유한다.  



5.

            5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도 참 좋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읽어보며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한다. 처음 읽을 때 받았던 감동을 다시 읽을 때 상실하고,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흠결을 다시 읽을 때 발견하며, 처음 읽고 꽂아 놓았던 서가에 두 번째 읽고는 다시 꽂지 않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이 책을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올바른 독법이다. 저자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 

            주부라는 단어가 못마땅한 것이 내 과민반응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스스로를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리지 않는 어떤 멘토께 저 문장이 문제가 있을까요- 하고 여쭈었는데,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특별히 걸리적거리지는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정말 작고 지엽적인 문제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단점으로 젠더 편향 문제를 지적할 생각이 없었다(그다지 문제되는 부분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아예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그냥 한번 찌끄려 본다. 


            만약 저 광고 멘트를 쓴 사람이 마트에서 두부 시식코너를 맡았다고 해 보자. 여성이 카트를 끌고 다가왔을 때, "주부님(보통 고객님이라고 부르겠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라고 그/그녀가 말했다고 하자. 카트를 끌고 온 여성이 맛있게 먹고 돌아갔는데, 저쪽에서 카트를 끈 아저씨 한 사람이 두부에 관심을 보이며 다가온다. 그때 시식코너의 그/그녀는 그 아저씨에게도 "주부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할까? 


           " ......경제활동의 단위가 가족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결혼한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양육의 일차적 책임자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갖는 돌봄노동의 책임은 반대로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원인이 되기도한다. 여성은 가족 내 주부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노동시장에서는 이차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성차별적 관념과 관행 때문이다." _<젠더와 사회> 308쪽, 허민숙과 신경아의 글


            여류 작가라는 말이 멸칭이듯, 남자 주부라는 말도 멸칭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여류 작가에서는 '여류'가, 남자 주부에서는 '주부'가 멸칭적 요소라는 것을 보면, 두 용어는 완전히 동일한 사태를 지칭한다. 직업의 위계와 젠더의 위계가 버무려져 있다. 두 용어의 차이점은, 앞의 것은 멸칭적 요소를 제거하면 바로 쓸 수 있지만, 뒤의 용어는 멸칭적 요소를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주부를 대체할 새로운 용어, 용어 자체에 성별이 포함되지 않는 중립적 용어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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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6-28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3번과 5번이 인상깊습니다. 저 역시 박웅현의 책을 서점에서 훑어보고 얄팍한 지식으로 자화자찬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그가 나름 이름 석자를 알린 계기가 광고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건데요...자본의 충실한 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잘난척은 참 오지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문학계에서 전문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이런 사람이 인문 운운하며 책을 내는 게 아니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오지게 공감합니다요!

syo 2017-06-28 21:35   좋아요 1 | URL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고=창의성 이라는 등식을 시도때도 없이 들이밀더라구요. 그 등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목적은 자본을 보필하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 창의성을 휘두르는 거면서 창의성이라는 단어의 긍정적 아우라만 뒤집어쓰려는 모습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책만 놓고 보자면 결국은 박웅현이나 이지성이나 같은 목표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독자들에게 책을 읽히리라-일지, 독자들에게 책을 팔리라-일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읽고 좋은 이아기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6-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바.. 이렇게 거침없이, 쉼표없이 스트레이트 잽을 시원하게 날리시니 읽는 맛이 납니다..

syo 2017-06-29 06:53   좋아요 0 | URL
더욱 용맹정진하여, 훅에 어퍼컷도 익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