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1
상처 받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게 나는 아니다.
2
세상에 진짜 혼잣말은 없다. 정말로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 여기면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저 위에 계신다는 누군가, 온 누리에 다 닿는 커다랗고 공정한 귀를 가진 누군가가 내 말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 주리라 알게 모르게 믿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사람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다.
3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생각이 인간의 특권이 되는 순간, 인간은 생각의 특권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세상엔 인간을 한낱 탈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실체는 유전자고 인간은 그 운반자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실체는 언어일 뿐이고 인간은 그 구현자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해박하나 도무지 읽기 어려운 글을 쓰는 어느 죽은 철학자 역시, 세계란 절대정신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변증법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라는 선언을 통해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런 어려운 이야기들일랑 모조리 차치해도,
우리에겐 가끔씩 자신이 생각이라는 집요한 추노꾼에게 뒤쫓기는 노비 같다는 느낌을 받는 때가 찾아온다. 말을 할 때와 말을 하지 않을 때, 다른 일을 할 때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심지어 다른 생각을 할 때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 어떤 생각은 발목에 감긴 그림자처럼 우리의 걸음걸음에 들러붙는다. 동행하다보면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되고, 상처가 있는 방향으로 알아서 찾아가게 만드는 생각들.
생각은 인간의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생각의 것이다.
4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내려놓는 선인장은 없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벽을 허무는 마음은 없다. 지키는 마음은 늘 울타리를 두르게 한다. 그리고 둘러놓은 울타리가 지키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선순환과 악순환 가운데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사이클이다.
세상에는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지키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한없는 개방이나 공유가 그런 것일까.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지키는 방식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인간에겐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작을수록 모든 것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지키는 일은 어렵다. 어려운 방식은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몸 안쪽으로 기르는 것처럼 은은하고 완만하게 상처를 남기고, 비명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혼잣말을 자꾸 길어낸다.
5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욕심에 지나지 않을까. 그저 웃는 날이 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저 그거 하나만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다.
999
한 넉 달 어영부영 한 것 치고는 좀 좋은 점수를 받아서, 덜컥 필기는 붙었다. 운이 꽤 좋았던 듯. 그러나 면접이란 것은 미친놈 구별하는 수준이고 사실상 결판은 필기 득점에서 끝나는 시험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면, 1.4배수의 커트라인 위에 납작 엎드린 syo가 최종적으로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중론). 하던 대로(다들 권하는 대로) 묵묵히 다른 필기나 준비해야지.
--- 읽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지음
중국사상사 /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박시백 지음
본격 한중일 세계사 2 / 굽시니스트 지음
--- 읽는 ---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지음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모든 것 / 백상진, 김예찬 지음
만화 동사의 맛 /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