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gzem > 커트 보네거트, 블랙 유머와 상상력의 원천
미국에서는 마크 트웨인 이후 가장 웃긴 작가로 손꼽히는 커트 보네거트.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지지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펭귄뉴스>의 김중혁, <백수생활백서>의 박주영, <내 머릿속의 개들>의 이상운.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2006년 작품집 및 장편소설을 발간했으며,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커트 보네거트'를 좋아하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당당히 고백했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팬을 확보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보네거트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발동한다. 기발한 상상력과 흥미로운 문체로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이 거리낌 없이 ‘좋아 한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인가.
커트 보네거크는 ‘순문학’과 ‘SF소설’의 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는 작가다. 그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전 ‘SF소설’을 발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그랬던 그가 ‘순문학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SF 마니아들은 ‘그가 변했다’고 성토했으며 보네거트 역시 자신을 ‘SF작가’가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현재, 그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이 상상력과 블랙유머가 넘치는 그의 작품에서 흥미와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커트 보네거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갈라파고스>를 읽는다면 왜 그의 작품을 두고 SF냐 아니냐, 라는 논쟁이 있었는지 단번에 확인 할 수 있다.
이 책은 현재의 인류가 멸망한 1백만 년 뒤의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이다. 게다가 소설의 화자는 1백만년 전(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에 죽은 영혼이다!
이런 설정 때문에 ‘일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은 몰입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흐름에 빠져들면, 그곳에는 전혀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여기서 보네커트에 대해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그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독자를 웃기거나,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상상력은 현실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사고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각색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점을 ‘웃으면서 욕’한다. 핏대를 세워 비판하지 않고 의뭉스럽게 말하지만, 이는 재미와 속 시원함을 동시에 제공한다. 아래 인용문은 보네커트가 세태를 풍자할 때 즐겨 쓰는 방식이다.
[선장은 버스 지붕에 오르려 애쓰는 동안 남들의 놀림감이 될 줄 알고 있었으므로 미적미적 시간을 벌고 있었다. 취한 채로 뛰어내리기는 쉬웠다. 하지만 다소라도 복잡한 물건에 올라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1백 만 년 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자기 뇌의 주요 부분을 일부러 마비시키려 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참으로 흥미로운 수수께끼다. 아마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조금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더 작은 뇌를 갖는 방향으로 진화하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갈라파고스 중에서>

<고양이 요람> 역시 극단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아이스 나인’과 ‘보코논 교’라는 생소한 개념을 접하게 된다. ‘아이스 나인’은 진흙을 싫어하는 한 과학자의 발명품으로, 이것은 전세계를 얼려버리는 멸망의 도구이다. ‘보코논 교’ 역시 실제 존재하는 종교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종교에 불과하다. 그는 전혀 새로운 것을 통해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과학기술’과 ‘종교’라는 것이 구원은커녕, 멸망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실제 그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자신이 미국인인 것이 부끄럽다고 밝혔다고 한다. 전쟁을 혐오하는 작가의 인식은 작품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하지만 날카롭게 제시된다.
["제 생각엔 미국인들이 많은 나라에서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곳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지요. 클레어는 편지에서 미국인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사람 된 죄로 정상적인 벌을 치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 자기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벌을 면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지적했던 겁니다. 하지만 충성 심사 위원회는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클레어와 내가 미국인들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고양이 요람 중에서>

<제5도살장>은 위에 언급한 작품들에 비해 좀 더 난해하다. 무려 23년 동안 쓰여진 이 작품을 두고 작가는 ‘실패작’이라고 말했다지만, 이 소설은 미국에서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하고 폭력적인가를 제시하기 위해 작가는 ‘외계인’을 등장시킨다. 주인공은 딸의 결혼식 날 외계인으로부터 납치당하고, 그로 인해 과거와 미래를 종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혼재해 쓰여지고 있다.
보네커트의 능력은 혹여 독자가 이야기의 전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독일 드레스덴에 있었던 살인적인 폭격에 마음 아파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드레스덴이 파괴되던 날 밤에 그는 지하 공기 저장고에 있었다. 위에서는 거인이 걸어 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성능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거인들은 걷고 또 걸었다. 고기 저장고는 아주 안전한 대피소였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야 이따금 천장에서 떨어지는 칼시민 도료로 샤워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들과 경비병 넷과 손질이 끝난 동물 시체 몇 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경비병들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드레스덴의 안락한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가족들 함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는 거지.]
<제 5도살장 중에서>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다분히 관조적이면서 유머러스한 말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미와 슬픔을 동시에 담은 것으로 보여진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흥분하거나, 외면하거나, 비통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네커트의 힘이다.
“문학이 죽었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현재의 문학은 대중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문학은, 소설은 죽지 않았다. 현시점에서 필요한 문학은 손쉽게 이해되는 대중문화에 젖어든 독자를 깨울 힘이 필요하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은 독자에 따라 쉽게, 혹은 힘겹게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이 보네거트의 영향을 받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한국의 많은 독자들 역시 그의 소설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