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의 영향으로 BL 장르에 눈을 뜨게 되었다. 벌써 취향도 나름 확고하다. 나카무라 아스미코는 국내에도 매니아층이 두터운 모양인데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다. [동급생]이 영화화되서 지금 프로모션 중인 것같다. 배너를 보고 리뷰를 쓰자고 결심했다.
만화 그림체에는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라 왜곡이 심한 인체 모형도 적나라한 형태도 다 봐줄만 하다. 가끔은 좀 징그럽긴 하지만. 예쁘장한 여장 남자 J를 구체 관절인형처럼 표현해서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느낌이 나기도 한다. 모든 인물이 길쭉길쭉 다 징그럽게 늘어져 있는데다 눈동자가 텅 비어있다. 신경질을 부리는 장면은 정말 딱 맞을 정도로 노이로제스러운(?) 미학이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자면 팀버튼스럽다고나 할까. 괴기한 느낌으로는 팀버튼보다 위다. 아무튼 그림체에는 징그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문제는 스토리. 3권으로 끝난 작품이라 지구력 부족한 독자인 나는 처음부터 쾌재를 불렀다. 다 읽고는 찜찜한 마음에 10권은 그려서라도 이렇게 끝내선 안 되는 거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용두사미, 찜찜한 해피엔딩이라고 간단히 치부하기엔 J에게 지워진 삶의 불행한 사건이 너무나 끔찍했다. 현실에는 분명 존재하기야 하지만 J의 생명력과 삶에 대한 애착이라고 하기엔 너무너무 불쌍하잖아! 그리고 등장인물을 그런 식으로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히 매력이 없는 이야기다. 아니면 내가 엄청 부아가 나는 이야기거나.
괴기스럽게 아름다운 그림체처럼 처음 1-2권의 이야기는 몹시 섬뜩하면서도 끌린다. 이야기를 하는 현재의 시점은 1980년대. 취재에 응한 J는 마릴린 먼로의 복장을 하고 다리를 꼰채 담배를 시원하게 피고 있다. 1960년대 뉴욕 클럽에서 최고의 가수였던 J의 롤모델은 당연히 50년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마릴린 먼로. 어릴 때부터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한 J는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영화관에 숨어 들어가거나 엄마의 슬립을 입고 악세서리를 착용해서 남부출신의 카톨릭 신자 엄마한테 혼나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J의 우상. 자동차 공장에 다니며 엄마에게 혼나는 J를 언제나 보호해주고 요상한(?) 짓을 하는 J를 귀여워 해주었다. 행복한 생활은 계속 이어지기 힘들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화로 바뀌는 혁명으로 아버지는 공장에서 짤리고 매일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술에 빠져사는 생활이 이어졌다.
비극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술에 빠진 아버지는 자신의 예쁜 아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만다.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가 그 장면을 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사랑하는 아빠의 죽음을 피부로 확인한 J. 그러나 이상하게도 어린 J는 아빠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 후로 고아원에 가게 되고 최악의 1년을 보낸 J는 예쁜 외모로 명문가에 입양되게 된다.
명문 고등학교를 들어가서 만나게 된 일생일대의 사랑 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지만 아직 1960년대 미국은 아직 인종차별도 심해서 용기를 낼 수 없던 폴은 심한 말을 하게 된다. 상처를 받은 J는 그대로 클럽같은 곳에서 빠져나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예쁜 외모와 끼, 약간 광적인 성격으로 인해 J는 최고의 가수이자 잘 팔리는 엔터테이너가 된다.
J는 겉으로도 예쁜 여자로 보였지만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이기도 했다. 폴을 시작으로 클럽의 매니저인 모건을 흠모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불량배같은 친구에게도 알게 모르게 애정을 품기도 한다. 순정적인 J이지만 모건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애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나서 은근히 이용해 먹기도 하는 독사 같은 면도 있다. 하긴... J는 모건을 위해 모든 더러운 일까지 감해냈으니 그 정도쯤은 눈감아 줄 수 밖에...
의외로 보수적인 동네인 미국에서, 특히 1960년대라는 촌스럽고 폭력적인 시대를 묘사하는 2권의 장면은, 표지그림 못지 않게 끔찍했다. 잘 나가는 여장남자인 J를 혐오하는 정치인이 내뱉던 말 같은 것들. 기름진 미소를 짓는 정치인은 말한다. "나는 말야, 정직하고 강하고 깨끗한 미국을 만들고 싶을 뿐이야."
이런 저런 일을 겪고 부랑죄(?)같은 걸로 한달 정도 감옥에 잡혀갔을 때 J는 운명의 상대인 폴과 재회한다. 폴이 변호사로 오게 되어서. 사무적인 이야기를 하는 폴에게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냐는 말을 하는 J. 그리고 돌아가 나가려 하자 폴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J를 사랑했던 여자아이가 J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마릴린 먼로의 죽음과 자신의 아이, 갑작스런 폴과의 재회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J는 간수를 꼬아내 사고를 치는 등의 일을 벌여 J와 폴의 운명은 계속 엇갈리기만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을 믿는 순수한 J와 폴은 우여곡절, 격한 사랑 싸움 끝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단단하게 다지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꾸미기 좋아하는 예쁜 J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폴과, 자신을 닮은 예쁜 아이와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에 둘러 쌓여서.
나는 BL을 약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유는 성소수자는 어찌되었든 사회에서 약자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약자에게 애정을 품고 있는 BL은 작품성이 좋은 경우가 많아서. 게다가 어두운 사회를 그리는 것도 많아 배경도 독특하기 때문이다. 뭐 약간(?) 에로틱한 장면은 덤이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으로 주인공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힘이 든다. 마지막에 당근을 주듯이 해피엔딩을 급 맞이하는 것도 그래서 더 속상했다. 어린 시절을 트라우마를 그런 식으로 보상하지 말라구!!
이 작가의 다른 책 <동급생>이 영화화를 한다는 것 같던데 이 작품이 좀더 대중적(?)이고 팬 양산을 많이 작품인 듯하다. 제목에서 보듯 풋풋한 느낌으로 이끌어 가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동급생> 이 책이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원래 그런 풋풋한 류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인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예외적인 작품을 읽은 것 같긴 하지만... 용두사미 식의 결말만 아니었으면 1,2권, 3권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흡입력이나 규모면에서는 독보적이다.
이런 그림체에서 풋풋한 느낌은 생각하긴 어렵지만 앞으로도 가끔 보고 싶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