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페인터 -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수신지 지음 / 미메시스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길'하면 자유로움을 떠올리게 된다. 희안하게 잘 볼 수도 없는 미국 서부에나 있을 법한 끝없이 시원한 길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어느 나라 말이나 '길'은 인생이나 방식의 은유로 쓰이는데 대체로 뉘앙스가 아주 다정하지는 않다. 자유를 상징하기는 하지만 자유를 누리기는 힘든 만큼 '길거리'에서 자란다거나 구른다거나(?) 하는 것은 무지 천박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거친 종자들을 상대할 가능성도 많고 모든 걸 혼자해야 하니까.


[스트리트 페인터]는 작가가 한 때 경험한 생활 밀착형 리얼리티 그래픽 노블이다. 국내 작가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닌데 확실히 비슷한 환경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경험할 수 있는 수준높은 울컥함을 선사해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전부터 [3그램]이라는 작품을 알고 있긴 했는데.. 왠지 줄거리만 봐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의 작품을 만나서 감동을 받은 이유로 기분이 조금 나아지면 용감하게 읽어 보기로 했다. 독자의 의리로!


졸업을 앞 둔 대학교 4학년 아랑은 당연히 진로와 생계를 걱정한다. 학교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후에도 쓴 돈이 있으니 이왕이면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가지고 싶고 미술학원 알바는 이미 신물이 난다. 학자금 대출도 있으니 걱정은 더 커진다. 특히 취업에는 쥐약인 인문보다도 더 힘들다는 순수 예술을 전공한 아랑은 직접 선택 전 돈도 벌고 경험도 쌓을 겸 일종의 직업 체험형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 마침 과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고 구청에서 주최하는 '거리의 화가'에 지원해 보기로 한다. 


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간 자리에 아랑을 포함해서 베테랑인 것 같은 작가 4명이 더 왔다. 작품으로 말하는 그들은 모두 면접을 보고 아랑은 선배의 충고대로 '무조건 예쁘게' 그린다. 면접 결과는 지원자 수가 적어 싱겁게도 지원자 모두로 결정되었다. 어느 기간 동안 합법적인 길거리 화가로 살게 되는 아랑은 똘망하게 생기지 못한 관계로 동료(?)들에게 가벼운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자신을 구해준 떡볶이 아줌마에게도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는 식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너무 생생해서 짜증이 날 정도다. 


거리의 화가는 일한 만큼 받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손님을 잘 끄는 게 매우 중요한데 요령이 없던 아랑은 기센 손님들과 옆에서 반칙적으로 행하는 호객 행위에 비실거린다. 돈 벌기가 쉽지 않은 만큼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많다. 앞에서 싸우는 커플, 자기가 아주 예쁜 걸 알고 있는 미녀, 애를 맡겨 놓고 한 시간이나 쇼핑하고 오는 밉살스러운 아이 엄마까지!(나도 이거 예전에 당해봐서 정말 열받았다.) 스스로 왕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 공임을 깎고 싶어 에누리 시도하는 사람들에 길에서 배우는 세상살이는 만만치 않다. 나도 읽으면서 콧등이 뜨끈해졌다. 동정이 아니라 감정이입을 많이 해서.    


전공을 살려서 하는 일은 남에게서나 스스로에게나 기대가 많은만큼 실망도 크고 자괴감도 큰 일이다. 나도 졸업 후에 직장을 몇 곳 전전하면서 굳이 전공을 살리는 곳에 들어갔는데 그 때 자괴감과 한계를 느낀 적이 있어 큰 공감이 갔다. 결국 지금도 계속 얇은 끈을 구질구질하게 잡고 놓치 못하고 있지만 아랑이 유치원에 가서 하루에 100명씩 아이들을 그리며 노력하는 것을 보며 힘을 얻었다. 놀이 동산에서 귀엽게 치장하고 그림을 그리는 선배에게 붙어 대목을 노리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나 일하면서 아주 잠깐의 마약같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보니 이건 노블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 중에는 대부분이 진상이지만 그래도 빛 한 줄기와 같은 노래하는 훈남이 와서 아랑의 볼을 빨갛게 물들여주고 상상속에서 결혼에 시집살이까지 하는 젊은 여자의 상상은 깜찍하고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려고 해도 출발선이 다른 금수저 친구를 보며 허탈감에 빠지고 마침 비까지 내려 완전 비참한 기분에 들어갔을 때 무지개 빛으로 아랑의 이름을 써주는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우아한 예술가 할머니한테서 치유를 받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맘을 먹어도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면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에 또 그런 자신이 못나보이는, 그런 바닥을 치는 날이 있으니까. 울컥 울컥.  


길거리에서 돈을 버는 것은 힘들다. 자유.. 이름은 좋지만 보험도 안 되고 날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아도 진짜 너무 힘든 일이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상인들의 질투를 사서 구청에 항의를 받게 된다. 구청도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민원을 처리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불행히도 한 명을 짜르기도 한다. 왠지 좀 더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은 아저씨 베테랑 4명이지만 아랑도 학자금 대출에 학교 생활 내내 알바까지 햇을 정도로 딱한 사정이 있다. 결국은 잔인한 방법으로 한 명을 떨구기로 한다. 이름하여 실적주의로.


모두 절박한 사정으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이가 있는 덕용 아저씨는 아이가 아프다는 사정으로 중도 하차를 하고 결국 아저씨는 탈락하게 된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은 승리. 모두 말이 없다. 아랑은 계속 생각한다. 그들과 나눴던 추억을. 그리고 자신이 빠질 것을 선언한다. 자신의 힘든 무게만큼 처자식 딸린 아버지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생각한 것일까. 남은 아저씨들은 착잡한 심정이지만 아랑에게 고마워 하고 아랑의 광고 전단지를 모두 붙이며 아랑에게 일감을 조금씩 나눠주는 따뜻한 결말로 마무리.


돈을 벌어보니 삶이 참 녹록치 않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삶의 질 또한 뚝뚝 떨어지는 걸 느낀다. 그 전에 너무 곱게 자랐다는 걸 느낀다. 평범한 삶이 어렵다는 얘기에 공감하고 현실에 타협하며 사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그래픽 노블보다 더 눈물이 찔끔했던 건 현실적이고 생생한 우리 이야기를 신파적이지도 자기 연민을 하지도 않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부제가 더 마음에 든다. 초보 화가, 길에서 인생을 배우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게 삶이고 아무리 인복이고 행운이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혼자 배워서 걸어가야 하는 게 인생이란 걸 느끼고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건 없지만 스스로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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