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터문 에디션 D(desire) 4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함유선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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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는 내가 애증하는 감독이다. [비터문]을 보고 감독을 열심히 찾아보니 예전 EBS에서 본 주말의 명화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영화 [테스]를 찍은 것도 알았고 앞으로 영원히 미국에 갈 일을 없을 거라는 이유도 알았다. 바로 스스로 일으킨 엄청난 스캔들 때문이다. 미성년 관련 범죄에 극히 엄격한 미국에서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기소됐는데 유럽에서는 자신들의 위대한 감독이라 송환 거부중. 유럽이 더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터라 무진장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미운 마음으로 본 [차이나타운]도 어머어머하고 감탄을 내지르게 하는 '악마의 재능'을 지닌 감독이니 내주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게 뭐 유럽만의 일인가. 쩝.


내가 베스트로 뽑는 로맨틱 코미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휴 그랜트가 쑥맥 귀염둥이로 나와서 첫눈에 반한 여자와 정사를 치르면서 "허니문은 왜 허니문이라고 할까요? 꿀처럼 달콤해서.. 아니면 처음 본 신부의 하얀 엉덩이가 달같아서...?" 같은 대사를 친다. 하지만 [비터문]에서는 결혼 생활의 권태를 이기려 미지의 땅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부부로 나와서 좀 혼란스러웠다. 영화는 원작보다 오히려 임팩트 있고 깔끔한 결말이지만 원작의 결말은 더 끔찍하다. 영화는 당시 선정적인 장면으로 논란이 되었다는데 흡사 파밀라 앤더슨의 분위기를 풍기는 레베카 역의 배우는 감독의 실제 부인이라니, 역시 감독 이 자식.. 보통 정신 세계를 가진 놈은 아니다. 보통 남자라면 부인한테 그런 수위로 영화를 찍게 하긴 어려울테니.


영화의 끔찍한 선정성을 뒤로하고 내용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허니문의 꿀이 다 떨어지고 난 후, 남은 생을 비터문의 지겨운 생활로 살아간다니. 게다가 이 공포는 꽤 현장감과 현실감이 있다. 결혼한지 일 년도 안 된 친구는 벌써 '내가 미쳐서 결혼했다'라는 말도 할 줄 알고... 나도 항상 권태의 문제로 헤어지니... 단물을 다 빨아먹은 관계를 이어나가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다. 특히 취미도 계층도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기가 더 빨라질테고.


원작 소설 [비터문]에서 사랑에 빠지는 단계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루주아 계급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프란츠는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댄서 지망생이자 미용사 레베카에게 홀딱 빠지고 완전 사랑꾼인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의 중심이 되서 돌아가는 것처럼 밤에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자신의 부루주아 친구들 앞에서 생생한 매력을 뽐내는 레베카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찰나의 순간이라서 둘은 타계책으로 온갖 음란하고 지저분한 행위를 다 해보지만 한 번 틀어진 관계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둘이 깔끔하게 쿨하게 헤어지면 좋았으련만.


미련이 남은 레베카는 프란츠가 아무리 모욕적인 말을 하고 자존감을 짖밟아도 생기를 점점 잃어가면서도 그의 곁을 떠날 줄 모른다.그런 레베카를 프란츠는 미워해 사람들한테서 고립시키고 심지어 낙태까지 한 레베카를 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공항에서 몰래 도망치는 만행을 저지른다. 말로만 부루주아인 그는 레베카가 없어진 사이에 전에 없던 자유를 누리며 여자들을 마구 옮겨가며 신나게 놀다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러자 갑자기 병실에 나타난 레베카. 태양에 살결을 그을리고 더 예뻐진 레베카를 보고 순간 기대를 했던 그였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그녀에게는 경멸로 대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레베카도 증오의 칼을 갈았다. 프란츠가 관심을 돌린 사이 침대의 조임을 풀러놓고 손을 잡으러 점점 다가오는 프란츠를 그대로 떨어지게 만들고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할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프란츠는 병원의 부주의로 고소하고 그 댓가로 연금을 받게 되고 레베카는 그와 결혼하여 평생 그를 돌보게 된다. 한을 품은 레베카는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고 불구가 된 그를 오물로 방치하거나 그의 앞에서 남자들과 심지어 그의 아들과 관계를 갖는 등의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인도로 가는 크루즈를 타고 디디에와 베아트리스 부부를 만난다.


불구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남자 프란츠는 레베카를 미끼로 뭔가 불안정해 보이는 디디에를 꾀어 사일밤에 걸쳐 자신들의 위에 나열한 히스토리를 들려준다. 디디에는 처음에는 굉장히 불쾌해하지만 싱싱하고 야성적인 매력을 가진 '처음보는' 관능적인 여자 레베카와 그저 지적인 매력을 가졌을 뿐인 아름다운 편인 베아트리스와 끊임없이 비교하게 된다. 하얀 아내의 피부는 그저 배멀미로 허옇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관계의 개선을 위해 미지의 땅인 인도로 가서 지루한 생활에 새로운 바람을 맞아보고자 한 그들은 결국 이상한 부부의 꾐에 넘어가 완전히 틀어진다.


영화는 아주 임팩트 있게 한방을 탕- 쏘지만 원작은 오히려 더 끔찍하다. 나름 반전이 될 수 있으므로 쓰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욕망(Desire)의 D를 따서 D에디션 시리즈로 낸 책 중에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외설시비에 걸렸던 만큼 원작은 정도가 더 심하다. 어떤 장면은 정말 너무 더티해서 토가 나올뻔 했다. 하지만 성애도 하나의 사랑의 형태이니 마음이 열린 분들이라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서로 학대하고 짓밟고 으르릉거리는 장면 묘사도 뛰어나다. 작가 소개를 보니 경제학 에세이로 경제학 도서상도 탔다고 하니 참 특이한 이력이다. 아카데미형(?) 작가 치곤 표현도 생생하고 소위 먹물 냄새라 하는 것도 별로 나진 않는다. 프란츠가 지가 부루주아라고 잘난 척 할 때만 빼고. 


책이 가볍고 작아서 휴대는 용이하지만 넘기는데 좀 불편한 게 단점. 번역은 꽤 좋은 듯.  

  

아직 결혼을 안 해봐서 허니문이든 비터문이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지만 남녀의 애정만큼 변하기 쉬운 건 없다는 그의 관점에는 동의한다. 현대 결혼관이라는 '낭만적 사랑'이 어떤 면에서 얼마나 허상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아예 결혼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듯도 싶지만. 인생에서 단 맛과 쓴 맛은 있지만 특히 애정하는, 단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과 애정이 다 떨어졌을 때 지지부진하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우리의 스테레오 타입 중에 서양 사람들은 애정 떨어지면 자녀를 생각하기 보단 이혼을 한다는 식의 이미지가 박혀 있는 것 같은데 얘들도 헤어지는 게 그렇게까지 쉬운 문제는 아닌가 보다. 뭐는 안 그러겠냐마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시간이 계속 되는 삶은 없을까. 매순간이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내 주위로 지구가 팽글팽글 도는. 이런 권태를 너무도 두려워한 사랑할 자격없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안타까운 어리석은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설명할 것도 없었소. 내가 그녀와 헤어지고 싶은 이유는 바로 2년 전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 멋대로였으니까.
"말해 봐.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당신을 성가시게 했어? 아프게 했어?"
"당신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 그런 것 없어. 단지 내 곁에 있다는 게 잘못이야. 간단해."(p.222)

"레베카, 나는 누구보다 더 나 자신을 증오해."
"아니" 그녀는 딱 잘라 말했소.
"그 점에 관해서라면 착각하지 마. 나는 절대로 당신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의 천 배 만 배 이상으로 당신을 증오하니까. 당신이 품고 있는 반감을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다니 어리석을 정도로 아직 너무나 감상적이군."(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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