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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드레드 피어스 (2Disc)
토드 헤인즈 감독, 케이트 윈슬렛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포스트 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저자가 쓴 [밀드레드 피어스]. 꽤 오래된 소설이다. 옛날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떠올리면 쉽다. 이미 영화화도 한 번 되었다. 아주 오래전 흑백영화로.
[포스트 맨~]은 영화와 책으로 이미 만났었다. '하드보일드' 문체의 정수다운 깔끔하고 감각있는 대사를 읽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제목에 낚여서 따뜻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격없는 남녀(년놈)의 개같은 사랑이야기로 인간의 악한 본성을 번뜩번뜩한 대사로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옛날 타블로이드지의 기자가 와서 번쩍 번쩍 플래쉬를 깨뜨리며 무기같은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문장이 "정오 무렵 건초 트럭에서 쫓겨났다."라고 시작하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다. 카뮈도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이방인]을 썻다고 하니 강추해보고픈 책이다.
배경은 대공항 시대 미국, 글렌데일. 솜씨 좋은 가정주부 밀드레드는 넓은 집에서 깨끗한 앞치마를 두르고 케잌을 굽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성숙하고 예쁜 첫째 딸과 그저 귀여운 둘째 딸을 키우고 있다.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남편은 외도를 하고 그걸 문제삼는 밀드레드와 두 딸을 냅두고 나가버렸다. 아주 나간 것은 아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가끔을 집을 가지러 그는 집에 들렀고 올 때마다 두 딸은 아주 기뻐했다. 철없는 둘째딸은 별 생각이 없어보였고 거의 사춘기에 들어가는 첫째는 가시돋친 말을 한다.
1930년대에는 위자료 같은 개념이 별로 없었는지 경제가 엄청 어려워서 그랬는지 밀드레는 점점 생활에 쪼들린다. 모든 사람이 그랬지만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더 절박해지는 법이다. 밀드레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타이핑같은 일을 주선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직업소개소에서 밀드레드에게 소개해준 일은 부잣집 가정부 같은 일 같은 것 뿐이었다. 모두가 '그런' 일이 밀드레드에게 어울릴 것이라 말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대저택에 면접을 보러 간다. 집사같은 사람은 나오자마자 가정부 면접을 보러 왔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천박한 부잣집 여자는 내가 앉으라면 앉고, 자기 집에 입주해야 하며 밀드레드의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한다. 역겨움을 느낀 밀드레드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바로 들어간 음식점 겸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은근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농을 치는 손님이나 까달쟁이들을 상대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준비했다. 대공항 시대에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식당까지 내는 밀드레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점점 돈이 생기고 자유가 생기는 밀드레드. 예전 남편의 사업파트너(남편을 배신한 전적이 있는)의 도움으로 회사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매력적인 애인까지 생긴다. 몬티 베라곤 역은 가이 피어스가 맡았는데 나쁘고 매력적인 남자 역할로 최고. 귀족적이고 퇴폐적인 매력을 마구 내뿜는다. 그래서 둘째 아이가 쓰러지던 날도 정신없이 그와 빠졌던 거겠지. 결국 귀여운 둘째 아이는 비극을 맞이하고 재능있는 첫째딸과 힘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밀드레드.
베다는 어려서부터 약간 되바라진 아이였는데, 밀드레드는 자신이 예전에는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자신의 예전 모습을 발견하고 베다를 적극지원한다. 약간 압박이 있었을 게 뻔한 이 모녀 관계는 거의 전쟁이다. 게다가 애인 몬티와도 말썽이 생긴다. 성공한 폴로 선수이자 농장 사업가였던 몬티는 대기업의 공격에 사업이 쫄딱 망하고 어설픈 자격지심인지 진심인지 잘 나가는 밀드레드와 싸움이 끊임없다. 결국 둘은 미친듯이 싸우다 관계를 끊낸다. 실은 밀드레드가 베다의 피아노를 사주지 못한 일에 스스로 마음을 다 잡은 것이긴 하지만.
밀드레드는 그때부터 일과 가정만을 위해 열심히 산다. 하지만 적당히 재능이 있는 욕심많은 베다는 열일곱살에 피아노를 그만두기로 하고 모든 것에 다 성질을 낸다. 예전부터 엄마가 웨이트리스를 하는 것부터 못마땅했는데 자신의 재능도, 구질구질한 글린데일도 다 싫어서 밖으로 마구 나돈다. 결국 못된 베다는 부잣집 남자 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속이는 일로 모녀는 크게 말다툼을 하고... 원래 엄마를 경멸했던 베다는 그 일로 집을 나가버린다.
하지만 야망이 큰 재능있는 베다는 결국 성악가로 성공하고 다시 만난 몬티와도 결혼을 하는 등 밀드레드의 인생에는 이제 고생 끝 낙이 오는 것 같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르와르 장르가 원작이라 그런지 결말은 몹시 끔찍하다. 배우의 연기력과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커버가 안 될 만큼. 작품이 주는 교훈이 뭔지를 모르겠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마라? 여기서는 금발이겠지만. 다만 주인공 밀드레드의 강한 생활력과 생명력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이용당하기도 하고...
예전에 [포스트맨~]의 후기를 읽었더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이 소설의 비화같은 게 있었다. 작가는 그 떠들썩한 사건을 접하고 자기 동네 주유소에 일하던 여자를 보고 "왠지 이런 여자가 그런 일을 한 것 같군" 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진짜 범인이었다는 일화가 실려 있었다. 밀드레드 피어스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아낌없이 주는 생활력 강한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이야기. 물론 배신하는 당사자들은 그녀에게 "너는 돈으로 나를 지배하고 잡아두려 했잖아"와 같은 말을 했지만. 어쨌든 베타 이 X는 시청자 입장에선 이해 못 할 순도 100%의 '쌍년'인 것은 분명하다.
뭐 사실 르와르, 추리 영화같은 데서 교훈 따위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차 있어!' 같이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보고 부르르 떨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작품이다.
* 사족1 : 장녀 베다 피어스가 소프라노가 되어서 공연하는 노래는 조수미가 불렀다는 야로.
* 사족2 :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완벽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연기 구멍은 찾기 힘들다. 아역 배우까지도. 드라마지만 영화같은 작품.
* 사족 3 : 보다가 포기한 미드 [길모어 걸스]가 다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드지만 미드같지 않은 미드는 시종일관 내가 어릴 때 '미미'의 머리를 빗어주던 아름다운 모녀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10대 미혼모가 이렇게 아름다우려면 그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나보다 똘똘하고 얌전한 여자아이를 낳으면 된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냐! 며 괜히 성내다 그만 본 드라마. 생각해보면 [소공녀]와 [작은 아씨들]같은 따뜻한 인성과 감성을 가진 여자 아이들이 나오는 책을 조금 읽다가 휙휙 던져버렸는데 사람은 취향도 별로 바뀌지 않는다.
* 사족 4 : 30년대 복식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성 패션을 보는 것 만으로도 최고. 불편하긴 하지만 블라우스나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으면 저절로 대접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속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