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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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변하고

환상은 깨어지고

비밀은 폭로된다.


그것이 인생의 세 가지 절망이다.     



우리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얄구지다 얄구져. 전형적인 강한 여성상인 울 할머니는 저 한 마디로 거의 모든 것을 털어내는 것 같다. 아님 털어내는 것 처럼 보이거나.


주말에 모카포트에 끓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우아한 독서타임을 갖으며 선택한 이 얇은 책 [이선 프롬]. 읽고나면 답답하고 슬퍼서 온 몸에 수분이 빨리는 느낌이다. 이게 꼭 커피의 문제는 아니겠지.


예전에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를 읽고 뭘 어째야 될지 몰라서 리뷰쓰기를 망설였는데 슬픔을 강도가 훨씬 더 강한 [이선 프롬]을 읽고 생각난 것은 울 할머니의 한 마디였다. 얄구지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고 먹먹함이 섞인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숭고함 비슷한 것을 느꼈다면 [이선 프롬]을 읽고는 감히 숭고... 어쩌고 하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야말로 자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궂을 일만 해야하는(어쩌면 도망칠 수도 있지만) 한 남자의 거친 인생을 희생이나 숭고로 포장하기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력 강한 사람들에 의지해서 사는, 아니면 충분히 자신에게도 능력이 있음에도 책임감 강하고 다정한 그들에게 소위 빨대를 꽂는 사람을 주변에서도 은근, 많이 찾아볼 수 있어서 그런지... 요 근래 읽은 가장 슬픈 이야기였다.


이선 프롬은 [이선 프롬]의 첫인상이 강렬한 주인공이다. 별로 안 좋은 쪽으로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인상을 한 그는 타고난 건장한 체력과 성실함 덕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하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 때, 적당히 교양을 쌓으며 적당히 붐비는 도시에서 주변 사람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꿈을 꾸었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면서 사는 그런 '평범한' 생활을.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렵다는 말, 요즘 조금씩 공감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소연 하는 글에 '지 팔자는 지가..','좀 의지를 가지고...'라는 식의 글로 타인을 상처 내는 말을 듣는 것도 힘이 들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자기와 (좋은) 환경에서 모든 사람이 나고 자라는 것은 아닌데!! 그것도 가뜩이나 힘든 남의 인생에 십원 한 장도 안 보태주면서 말이다.


삶에 절망스러움을 안기는 조건이란 까다롭지 않다. 사랑은 변하고 환상은 깨지기만 하면 된다.


소박하고 평범한 꿈을 꾸었던 젊은 남자 이선은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오랜 병환으로 대학에 돌아갈 수 없게되자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던 친척이었던 지나와 결혼하게 된다. 별다른 열정과 애정이 없이, 너무 외로웠던 그였기에. 무난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선의 예상은 빗나가 지나도 병을 앓으면서 골골하게 되고 집안 일을 도와줄 먼 친척 매티를 불러들인다.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그녀였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망하고 죽자, 쿠키를 굽고 리본을 꾸미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그녀의 능력은 돈 벌이에는 도움이 안 되었고 회계같은 것을 배우기엔 건강이 받쳐주지 않았다. 친척들이 그녀를 위해 말뿐인 조언을 했지만 결국 그녀를 거둔 것은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과 가족을 겨우 먹이는 이선이었다. 활기찬 매티를 보자 난생 처음으로 심장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 이선.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그녀의 입으로 나오는, 소위 통함을 느낀 이선은 더이상 추운 스타크필드가 회색빛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어릴 때 한번 쯤 추운 겨울에 길을 잃어 떠돌아 다니다가 엄마를 보고 와앙 우는 것처럼 온기라는 것이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투박한 남자 이선의 감정은 요동치고 급기야 아내가 요양가는 틈에 매티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에 배웅을 직접하지 않으려고 의욕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만다. 나뭇값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바싹 시들었지만 오랜 병으로 예민한 지나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지나없이 둘이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으로 기뻤던 맷은 리본을 머리에 묶고, 이선은 떨린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맷은 지나가 아끼는 유리 그릇에 피클을 담아내었다. 빨리 가는 시간이 아깝지만 서로 머뭇거리며 두근두근한 시간은 보내고 있던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고양이는 피클 그릇을 깨버리고... 이것을 복선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관계를 점치고 만다.


겨우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안 좋게 끝내버린 그들의 관계는, 안 좋은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듯,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만다. 지나는 돌아와서 작정한 듯이 집의 변화를 이잡듯이 찾아내고 맷을 쫓아낼 구실을 찾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깨진 피클 그릇을 발견하고 당당하게 매티를 쫓아내기로 한다. 갑자기 희망이 사라진 이선은 매티를 자기 손으로 떠나보내는 날, 서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자 하고...


그날의 사고는 소설의 첫 흐름부터 그렇듯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차라리 그들의 계획이 성공적이었다면.. 조금 더 나은 결말이었을까. 세 사람의 동거와 그 전과 달라진 관계, 끝까지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의 생존을 위해 일만 해야 하는 이선의 삶이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겨우 몇 달의 기쁨을 맛보고 그로 인해 더 큰 고난을 안고 살아가게 된 이선의 삶은 어쩌면, 감추거나 조명되지 않아 모르는 많은 불행한 삶과 비슷해서 더 슬펐다.


스타크필드의 거친 날씨는 변함 없었지만 이선의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변하고, 심지어 사고를 당했다. 사랑의 도피도, 생의 도피도 실패한 이선에게 계속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건 무엇일까. 삶에는 의미가 있어서? 쉽게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행복한 삶만이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들어 든다.





그녀는 처음에 프롬이 본 명랑함과 상냥함 외에도, 그보다 더 큰 매력, 즉 극히 예민한 심성을 지녔다. 그녀는 프롬이 한 번 보여주거나 말한 것을 오랫동안 기억했다가 그가 원할때마다 생생하고 아름답게 되살려줌으로써 그를 황홀하게 했다. p. 28

"우리도 못 벗어났는데, 네가 감히?" 라는 말이 비석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아서, 그는 대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도 저 꼴이 될 때까지 여기서 살겠지`라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곤 했다. 그런데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 들끓던, 변화를 향한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묘지도 지속과 안정이라는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왔다.p.44

그녀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고, 이선은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뜨거운 납덩이가 되어 자기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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