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자학의 시]. 꼭 아름다운 시를 좋아하진 않는데 앞에 자학이 붙으니 뭔가 섬뜩한 기분이 난다.


자학의 시를 쓰는 주인공은 유키에라는 여자이고 성질이 나면 매일같이 밥상을 뒤엎는 남편 이사오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이사오의 본업은 없고 부정기적으로 가끔씩 일을 하지만 유키에가 힘들게 잡아준 면접에서 평소 습관처럼 책상을 엎어버리고 나오거나 힘들게 번 돈으로 힘들어서 택시를 타고 와버리는 등 인간으로서도 실격인 남자다. 유키에가 식당에서 서빙 및 배달일로 돈을 벌어오는 것을 경마로 탕진하며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다. 그런 걸 매일 듣는 옆집 아줌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유키에에게 이사오와 헤어지라고 조언한다. 특히 유키에가 일하는 음식점의 사장인, 유키에를 연모하는 마스터는 계속해서 유키에에게 사랑의 어택을 날린다.

하지만 유키에에게는 이사오와 떨어질 수 없는 이유가 백만가지다. 남녀사이 아무리 둘밖에 모른다지만 자기에게만 눈물을 보여주었던 이사오, 자신에게 평생 사랑을 맹세했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힘든 일도 그와 함께 있으면 다 풀려버리는 착각이 드는 유키에에게는 당연히 불행한 가정사가 있고 박복한 인생의 시련이 있다.

유키에는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이다. 행복한 사람의 조건은 톨스토이가 그 유명한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에서 말했듯 비슷하고도 단순하다. 행복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가정에서 나고 자라서 헛된 욕망없이 좋은 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없다. 불행한 유키에의 인생 조건은 이렇다. 

태어나자마자 도망간 어머니와 경제력+경제상식 제로에다 딸을 착취하는 나쁜 아버지의 슬하에 자라 어릴 때부터 사회와 돈의 무서움을 강제로 깨우친 아이. 엄마 얼굴이라도 보는 게 꿈이지만 결혼 사진은 재채기로, 바다에서 찍은 사진은 파도 때문에 엄마 얼굴만은 가려져서 엄마 얼굴도 끝내 알지 못하는 박복한 사연을 가진 아이. 외모도 반에서 못생긴 랭킹 베스트 3에 뽑힐 정도로 그닥 훌륭하지 않고 언제나 타인의 냉대를 받고 미화 부장에만 뽑히는 등의 궂은 일에 이골이 난 학창시절 기억을 가진 여자.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인기남의 애정을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진 친구들의 관심 때문에 밀어내는 눈 앞의 행복을 밀어내는 여자. 심지어 인생의 친구를 심하게 배반하고 마는 사람. 민감한 사춘기에 새로운 여자를 인생에 끌어들이는 아버지가 신문에 까지 나는 대형사고를 치고, 그 신문을 자기 손으로 배달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 결국 아버지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매장되고 어거지로 도쿄라는 대도시로 쫓기듯 오게된 여자. 오히려 아버지보다 아버지에게 돈을 받으러 온 '떼인 돈 받아드리는' 업자에게 선의를 받아 본 기억이 있는 여자.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빚이 늘어날 것 같아 그 선의를 선뜻 받지 못하는 모든 것이 죄송한 여자. 자기도 자기가 싫은 여자.

 

이렇게 불행한 한 여자의 일생은, 그러나 너무도 코믹하게 그려진다. 거의 4컷으로 이뤄진 이 만화는 정말 2권 끝까지 읽고 있으면 어느새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유키에라는 한 여자의 일생은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비극인데 이렇게 희극적으로 그려놓으니 아무리 남의 인생이라도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키에가 주로 쓰는 말은 울면서 내는 "우엥~"이나 돈을 가져가려는 이사오, 혹은 아버지에게 "제발 이 돈만은!", 또 일을 할 때 "배달 다녀오겠습니다" 이다.


다행인지(?) 불행한 사람은 유키에 뿐만이 아니다.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는 유키에의 불행한 삶을 보고 죽은 남편을 살아 생전에 미워한 것을 반성하지만 그래도 유키에의 드라마 있는 삶이 부럽기도 하다. 아주머니도 데이트를 거듭할수록 싼 식당만 가고 피라미드식의 물건만 팔아대는 회장님(?)과의 연애로 은근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지만 아주머니도 이렇게 생각한다.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유키에를 좋아하는 마스터도 유키에 때문에 슬프다. 보너스를 줘도 이사오의 코트를 사줄 생각만 하는 유키에 때문에. 아무리 잘해줘도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유키에 때문에. 결국 위로받고 싶은 심정으로 유키에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자를 사고 자기 경멸을 반복한다.

 

이사오부터 시작해서 유키에 옆에는, 이런 표현이 맞다면, 징글징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유키에가 도쿄에 오기 전엔 구마모토라는 아주 강하게 살아가는 진정한 친구도 있었다. 또 이사오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신도 좋아했지만 자기 혐오의 늪에 빠져, 아니면 친구들의 관심을 놓기 싫어 놓쳤던, 서로 좋아했던 남자도 있었다. 박복한 여자 유키에에게도 반짝반짝하던 인생의 순간은 있었다. 그리고 임신을 하면서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원체 자학개그를 안 좋아한다. 자학을 가장한 겸손은 빼고. 심성이 착해서 그런건 아니고 이유없이 불편해서다. 남의 불행이 딱히 내 불행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서 그런다. 하지만 이 책은 끝까지 보면 작가의 메세지에 동의는 하지 못하더라도 큰 위로를 받는다. 단순한 선 그림체에서도 생각보다 파격적인 그림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임신한 유키에는 행복하다. 모든 포유류는 어미 젖을 먹고 자라고 모두 엄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결국엔 아기 때 본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고 엄마에게 편지도 쓴다. 그리고 유키에는 깨닫는다.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

메세지를 직접 주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서술이 1,2권을 통틀어 희안하게 슬프고 웃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왠지 안심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떤 여자의 인생을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도 이렇게 정확할 수도 있을까. 불행한 인생이 아이러니하게도 유키에를 강하게 만들고 행복함도 가져다 준다.

 

아무리 징글징글한 삶이라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삶이 가지는 힘, 아니면 의미이기 때문일까.

 

누군가 이 작가를 '악마'라고 표현했다는데, 동의한다. 박복한 한 여자의 일생을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그리면서도 울게 만드는 재능은 가히 악마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