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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나에겐 잣대가 있다. 질투에서 비롯된 잣대일 수도 있지만. 그건 글에 영어든 뭐든 이국언어를 섞어쓰면 아무리 잘 쓰여진 글이라도 글쓴이의 자질을 의심하는 것이다. 특히 잘 쓴 글일수록 더더욱 혹독하게 비난한다. 이것은 분명 질투에서 비롯된 감정은 맞다. 인정!
한 때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궜던 일명 '보그체'. 나도 안 좋아한다. 본능적인 거부감이랄까. 두세줄 읽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왜? 그냥 다 영어로 쓰지? 왜 조사는 한국어로 쓰는 거냐?! 나도 은근 사대주의가 있는 사람인데 볼 때마다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잡지 [보그 vogue]는 허세만 덜 아니꼽게 보면 인터뷰든 기사내용이든 의외로 충실하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굳이 가만히 있는 보그 잡지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어 번역가다 보니 보통 사람보다 영어에 친숙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영어를 쓰는 것을 보면 괜히 눈쌀이 찌푸려진다. '나의 페이보릿 식당' 같은... 다른 알라디너가 지적한 화려한 수사는 가끔 좋은 표현도 있어서 볼 만한데 섞어 쓰는 영어 형용사는 정말.. 참기 힘들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디자이너 앙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끊임없이 하던 개그맨들처럼 괜히 비꼬고 싶은 나쁜 마음이 들었다. "엄.. 엘레강스 하고.. 엄.." (죄송합니다. 실제로 앙드레 김 쌤을 그분의 인격 때문에 참 존경합니다.)
이런 거슬리는 부분을 배제하고 책을 읽으면 저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여행했고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얼마나 충실하게 썼는지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알라디너들의 꿈일 것 같은 독서여행까지. 책을 읽으면서 후회의 눈물까지 흘릴 뻔 했다. 나는 왜 프라하를 코스에 넣지 않았던가!
색감까지 예쁜 잘찍은 사진과 독특한 편집은 책을 보는 재미를 보태준다. 굴라쉬든 브런치든 여기, 서울이 아닌 어딘가에서 먹고 싶어졌다.
아무도 안 궁금한 내 이야기 > 작년에 벼르고 벼르다 첨으로 유럽이란 곳을 여행했다. 서유럽을 중심으로 4개국 여행했을 뿐이지만 스스로 넘 뿌듯하여 갔다가 돌아오면 인생이 거의 180도로 변할 줄 착각했었다. 1. 독립적인 성숙한 여인이 되거나 2.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나거나 3. 감성 촉촉한 에세이 한 권쯤은 거뜬히 쓸 수 있겠지? 라는 턱없는 기대로 시작되었던 여행은 현실이 개떡같을 때마다 지상천국으로 둔갑하는 향수의 땅으로 만들어 놓는 걸로 마무리되고 있다.(엉엉)
여행에세이를 보면 괜히 베베꼬이는 마음은 역시 질투 때문이었다. 에세이 한 권을 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BGM : 너는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에세이의 미덕은 가볍지만 진한 공감이 아닐까. 밑줄 긋기 해본다.
여행이 아니라면, 삶은 언제나 나에게 부당한 업신여김을 당해왔다. 익숙함이 낳은 무례함이란 사생아, 권태, 생계형 짜증, 줄줄이 매달린 의무들. 만만한 마누라에게 온갖 성질을 다 부리는 못난 마초처럼 굴었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 지긋지긋하던 삶이 나를 도발한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은 척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나는 졸린 고양이처럼 솔직해진다. (p. 39-40)
사실 짦은 여행 후에 어느 나라 혹은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하여 섣부른 진단을 내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태도는, 책이나 영화에서 만난 허구의 인물과 실제 사람들의 특성을 동일시하고 일반화하는 것일 테다. 우리가 시장이나 버스에서 부딪치는 현지 사람들은 픽션의 주인공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비일관적이다. 그들은 데생이 끝난 후의 4B연필처럼 뭉툭하고 투박하다. 그들에게선 아우라 대신 매캐한 생활의 냄새가 풍길 뿐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딘가를 여행하기 전에 그곳을 배경으로 한 책이나 영화로 예행연습하는 걸 좋아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사랑에 빠지기 위한 구실이다. 사랑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덧없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할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흐라발이나 카프카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프라하를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 (p. 50)
그런데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곧 삶에 대한 애착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이 허기를 채우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도 결국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세계 각지의 공항에는 섭식장애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들, 아니 우리들은 아무리 잘 먹어도 해결되지 않는 어떤 충동을 품고 있다. 때로는 그 뜨거운 충동 때문에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는 것은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그런 충동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p. 60)
그러고 보면 번역의 최대 적은 센티멘털리즘과 거대담론 강박증일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의 뜻이 너무 소박해 보이면 왠지 거기에 묵직한 뭔가를 덧입혀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대체 가구가 숲보다 꿀릴 것이 뭬라고! 아무리 번역가 인생이 신산하기로서니 텍스트는 춥지 않다. 아무도 무거운 외투를 원치 않는데, 번역가 혼자 지레 설레발을 칠 때가 많다. (p. 116)
새우는 껍질 벗기는 과정이 귀찮고 조개는 썩지 않는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번거롭지만, 녀석들은 비교저거 살생의 죄책감을 덜 느끼게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팔팔 끓는 물에 집어넣어도 갑옷을 입고 있으니 좀 덜 뜨거울 것 아니냐나는 말이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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