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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
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월
평점 :
내가 어쩌면 영원히 리뷰를 쓰지 못할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문득 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사비나는 '배신'을 사랑한다. 그녀의 삶은 배신의 역사다. 사비나는 처음에 아버지를, 사회를, 데모를.. 그리고 프란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마저도 배신해버린다.
사비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배신할 것이 없어지면? 모든 것을 배신한 다음에 배신할 것을 잃은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갑자기 한기를 느낀다.
나중에 오랜 친구이자 연인(영어로는 friend with benefit 정도일까) 토마스와, 토마스의 연인 테레사가 죽은 이후에 토마스의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사비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 전부터 사비나는 줄곧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찌릿찌릿했던 이유는 사비나의 심정에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소서에 한 번도 '열정'이란 말을 쓴 적이 없다. 모범 자소서 예에 '열정'을 불사른 사람들의 자소설(!)을 보면서 피식 웃었던 것은 뭔가 요란하고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평가한 것은 용서받고 싶다.)
역자가 전혜린인 책을 골랐다. 평범한 것을 두려워했던 사람이라면 분명히 번역을 끝내주게 했겠지 싶어서. 다만 왜 그녀의 죽음이 이리도 미화되는 건지는 이해가 잘 안된다. 그만큼 젊은 나이에 업적을 쌓고 죽는 사람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 같기는 하지만서도.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는 돌아다니는 들개 같은 여자다. 익숙함, 평화, 풍요로움과 같은 단어를 거부하고 순간 순간의 살아있음을 느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자다. 세상의 잣대같은 것 보다는 자기가 경험하고 느낀 것에만 중점을 두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아간다.
매순간이 의미 있고 무겁다. 영원한 회귀도 아닐텐데! (제발!)
미간에 주름을 잡아가며 심각하게 책을 읽었지만 니나에 대한 박사의 절절한 편지와 니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니나 편향적(?)인 언니의 소견을 읽고 있노라면, 조금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더라도 남들에게 칭송받는 삶을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는 느끼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절절하다. 나중에 그런 편지를 받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독일 전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던 작품라더니 책을 읽고 있자면 가슴이 쿵쾅쿵쾅 거린다. 정치적이라고 할지 선동적(?)이라고 할지. 생의 한 가운데에서 너의 온전한 삶을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반문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은 금방 지쳐버린다.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매 순간을 새롭게 받아들인다면 피곤한 일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중독 되어 있는 나에게 지금 적격인 도서는 아니었다. 읽는 동안 피곤하다는 생각과 뭐가 이리 심각해? 같은 의구심이 가득했으니.
나중에라도 매순간마다 깨어있어서 의미를 마구마구 부여하는, 그런 무거움의 삶을 살게 될 수 있을까. 나중에 사비나를 한심하다거나 불쌍하다고 동정하게 되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