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장마가 끝나니까 후덥지근한 더위. 낮에는 돌아다니면서 숨 쉬기가 힘들 정도다. 열대야가 가까워오고 있지만 이미 거의 일주일 째 불면의 밤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럴 때는 문을 활짝 열어두고 거의 헐벗은 차림으로 책 한 권 읽으며 하루키가 선사하는 구원의 밤을 보내는 게 좋다. 

특히, 하루키의 책은 여름 밤에 그 진가를 발한다. 더위와 습기에 지쳐 있을 때 그가 토해낸 건조한 문체의 글을 읽고 있으면, 후덥지근한 공기가 어느 정도는 가시는 느낌이다.  

게다가 공포물은 무서워하지만 어느 정도는 섬뜩 비스무리한 느낌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책은 더더욱 좋다. 기묘한 이야기에, 크게 비판의식을 가질 수 없는 가볍고 건조한 말투, 밤의 관람차 같은 독특한 소재는 지나가는 곳 마다 금방 데워지는 이 저주스러운 상황을 잠시라도 잊게 만들어준다. 

흰 새벽까지 시원하게 읽어대던 책의 줄거리를 쓰려고 하니 몹시 귀찮다. 그래서 그냥 밑줄긋기만. 

참고로, 구소련의 회수되지 못한 스푸트니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된다. 


덧>개정판 [스푸트니크의연인] 표지는 왠지 너무 화려하고 행복해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텍스트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 안 들어 조금 아쉽다. 

 

스미레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나라는 인간 존재를 가장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p.83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p161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름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 바람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 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떼의 불쌍한 호랑이들을 포함한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 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끝난 장소였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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