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의 탄생 - 봉 마르셰 백화점, 욕망을 진열하다
가시마 시게루 지음, 장석봉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도시의 여자라면 백화점의 유혹을 쉽게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약속장소가 백화점 근처일 때 상대방이 늦어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다. 백화점은 항상 볼거리를 제공하니까. 특히 1층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에서 떠도는 화장품 향기는 백화점 마법의 효과적인 촉매제다. 구두매장과 가방매장의 가죽냄새는 또 어떻고.   

구두를 신고가는 날에는 내 발 밑에서 울리는 또각또각하는 분명한 소리까지 들리면 보폭은 짧아지면서 원시 시대에 채집의 임무를 맡았던 여자의 자손임을 자각하며 고개를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린다. 요모조모 뜯어보면 안 예쁜 물건이 없다. 심지어 지하 1층의 식품 코너 마저도 고급스럽게 느껴지니 나는 확실한 백화점의 노예인 것이다. 그런데 백화점 입장에서 보면 나는 특별한 노예는 아닌 것이, 나처럼 별로 구매력이 크지 않은 노예는 이 도시에 널려 있다. 반면, 전체 매출을 좌지우지하는 20%의 고객님(!)들은 널려 있지는 않으므로... 그녀들은 매우 귀하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귀엽고 당동한 미도리는 이런 말을 했는데    

"난 좋아해. 이런 거" 하고 미도리가 말했다. "뭔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아마도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일 거야. 백화점 같은 덴 좀처럼 누가 데려다 주지 않았으니까." p 395

책의 내용과 큰 상관없는 이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은,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기 때문이리라. 어릴 때부터 백화점은 정말 특별한 공간이었다.  

우리 엄마는 백화점에 한때는 자주 다녔었고 비교적 언니보다 말 잘 듣고, 뭐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아닌 탓에 동행자로 자주 채택되었었다. 그 당시에도 나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은 화장품 향기를 음미하기 시작했고 형형색색의 향수병을 보고 넋을 잃곤 했다. 한참 넋을 잃고 다니다 잠깐 땀에 찬 손을 닦고 다시 엄마의 팔짱을 꼈을 때, 다른 아주머니였던 먹쩍은 상황도 제법 있었다. 수줍은 아이였던 나는 공포에 질려서 사과도 하지 않고 저쪽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던 엄마의 품에 뛰어들곤 했는데, 상대편 아주머니도 백화점의 마법때문인지 항상 엄마미소를 지으며 쿨하게 용서해주셨다.   

백화점과 관련된 내 어린시절 추억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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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말하려는 내용은 물론 백화점이 노예를 양산하는 기관이라고 고발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백화점은 우리의 친구예요라고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 백화점이 실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백화점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니까 그런 사탕발림에는 꼬이지 말지어다, 아니면 알고나 꼬여라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나라에서는 이렇게 상술에 쩌든 백화점의 형태는 거의 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건물이라는 것이다. 좁은 입구에 친절한 점원들, 물건을 안 사도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너그러움(?), 세일과 사은품 등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하지만 하루 아침에 태어난 산물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영업의 기본이자 뛰어난 스킬은 고객에게 먼저 황홀해할만한 물건을 내놓는 것이라는데, 백화점은 바로 물건들을 선보이는 장인 것이다.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물건을 생상해내고 시장은 끊임없이 팔아야 한다. 그때 생기는 재고는? 세일이니 뭐니 하는 너무나 익숙한 상술로 팔아버리면 된다. 게다가 소비자들은 필요없는 물건을 사면서도 스스로 핑계를 생각해내어 만족하여 돌아가게 되므로 서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고..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상술로 구매욕구를 끊임없이 부추기는 백화점에 분노를 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저 '백화점 가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오늘도 이 한 명의 '소중한 고객님'은 백화점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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