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먹는 남자
데이빗 세다리스 지음, 서민아 옮김 / 학원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모자를 먹는 남자라....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궁금해하며 책을 집었다.

책은 제목 이상으로 재밌다. 지하철에서 보다가 심하게 웃을 뻔했다. 유머가 딱 내 스타일이다. 천박하지도 과하지도 않고, 그러나 너무나 웃긴... 심지어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저자 데이빗 세다리스는 유머작가라고 한다. 괴짜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약간 대책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언어치료를 받고, 억지로 기타레슨을 받는 등 여러가지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꽤 쓸만한 유머가 나올 것은 분명하다. 나는 어떤 책에서 보다 주옥(?)같은 문구를 많이 발견했다.

[예술가의 삶에서 기억되는 열두 가지 순간들]에서 여섯번째 이야기. 한 번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뇌가 부분 부분 나뉘어지면 어떨까요. 수술로 뇌를 도려낸다는 의미가 아니구요. 뇌를 몇 개로 나누어서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상 영역으로 세상을 보면 랄리에 짐이 한 채 있고, 머틀 비치에 별장이 있고, 다른 곳에는 작은 은신처도 있어요' 라고 말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녀는 따분한 목소리로 내 머리속에 들어 있는 집 값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각성제를 먹으면 뇌는 팔팔 끓고 입은 폭발하는 배기관처럼 저절로 움직인다. 나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허에서 피가 나고 턱이 빠지고 목이 부어오를 때까지 따졌다.(p 57)

갑자기 어린왕자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집을 돈의 가치에서만 본다며 의아해하던 어린왕자의 모습이.

[수사관같이 느껴졌던 언어치료 선생님] 중에서..치료사실을 비밀로 하려는 내 목표와는 정반대로 선생님의 목표는 반 아이들 모두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2시 25분에 의자에서 일어나면 선생님은 "앉아, 데이빗. 언어치료 시간은 아직 5분 남았단다." 하셨다. 그런가하면 내가 2시 27분이 될 때까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으면 "데이빗, 2시 30분에 언어치료 받는 것을 잊지마라."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학교에 결석이라도 하면 선생님은 아마 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데이빗이 오늘은 결석을 했지만, 학교에 왔다면 2시 30분에 언어치료를 받으러 갔을 거야." (p99)

하지만 수사관이 그렇게 애를 썼지만 발음이 좋아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좀 조용해졌다는 것이다.(p104)

[우리 집을 거쳐간 애완견들] 중에서. 메드헨의 강아지 시절이 지난 후로는 우리도 메드헨에게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우리는 가끔 우리 집에 이미 강아지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새 강아지를 사야겠어"라고 말하기도 했다.(p 120)

나도 내 어린시절의 기억을 쓴다면 이토록 재밌고 웃기게 쓸 수 있을까. 흠.. 항상 소심하고 밖에 나가면 아무 소리도 못하던 내 자신을 떠올리면, 확실할 수 없다. 차라리 요즘이 더 즐겁다고 해야하나.

두번째 이야기는 그가 파리에서 보낸 이야기이다. 확실히 예술가, 작가들은 괴짜들이 많나보다. 이 사람도 대책없이 파리에 가서는 -파리가 딱히 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역겨운 놈에 소매치기 누명까지 쓰며 실컷 고생만 한다. 

[아이 러브 파리] 중에서. 나는 가끔 내가 왜 그토록 프랑스어 수업을 괴로워하는지 생각할 때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 여러분들을 알게 돼서 진심으로 기뻐요."라거나 "이렇게 즙이 많은 음식을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처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p 194)

나도 이제 왜 내가 그토록 외국어 공부를 싫어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아, 이거였구나.. 읽다가 머리를 딱! 쳤다.(그러고보면 난 참 어리석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충성을 맹세하다] 중에서. 유럽 사람들은 내가 포장된 물수건으로 시간 맞춰 손을 씻고, 저온살균이 안 된 유제품은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른 건 전통적으로 내려온 미국인 표준 엉덩이 크기를 유지하기 위해 최근 18킬로그램을 더 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내가 나서기 좋아하면 전형적인 미국인이어서 그런 거고,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 우울증 치료제를 먹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p 201)

흠.. 보통 외국나가면 이런 일을 당하면 억울해하는게 사람이면서도, 보통은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책에는 우스운 부분이 더 많다. 그렇지만 이 책이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나는 거의 죽을 뻔한 여자를 보았다]는 뜨끔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사실.. 뜨끔을 넘어서 따끔했다.

사람들은 잔인하고 강렬한 것을 좋아한다. 이 사실은 요즘 케이블 티비에서 좀 더 자극적인 볼거리를 위해 끙끙거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파리의 한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가 멈춰서서 사람들이 매달린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물론 저자도 함께. 경찰들이 공간 확보를 위해 사람들을 밀어내자 저자는 화가난다. 내가 투자한 돈을 손해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나는 놀이기구를 타다가 죽은 여자를 봤어."라고 얘기할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죽은 여자는 그도 친구들도 모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많이 애석할 필요도 없다. 친구들은 마구 질문을 퍼부어댈 것이고, 그는 약간의 충격과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죽는 걸 볼 뻔한 일에는 관심을 갖을까. 그는 멀찍이서 결국 그 여자가 죽는 걸 못 본 다음, 실제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 상상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날 이후 거의 한 달을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그는 생각한다. 그녀도 우리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땅에 내려와서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들하고 살기 싫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걱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기대에 찬 눈을 하고 그녀를 보았을 것이다. 그가 그러했듯이.

..... 내가 초등학교 때였나.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어떤 유치원생이 자기가 방금 내렸던 유치원 차에 치여서 죽는 사고가 있었다. 물론 나는 그 현장에 없었다.(참 다행한 일이다.)

다음날 우리학교에서는 그 사고를 목격했던 아이의 진술이 무용담처럼 이어졌다. 머리가 깨져서 뇌가 흐르는 걸 봤다느니, 어쩌니... 그럼 다른 아이들은 헉, 하고 놀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 아이들이 자신의 얘기에 집중하면서 보내는 시선이 목격자에게는 꽤 즐거웠을 것이다.

어느 날, 언니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 도로를 지나다, 아이 엄마가 아이가 생전에 좋아했을 키티 인형과 꽃다발을 놓는 것을 보고 숙연해졌다. 물론 그 다음부터 그런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인간은 참 이기적이다. 그리고 참 잔혹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할 목숨이 한 다리, 두 다리를 건너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맥주를 마시고 육포를 씹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죽은 놈만 억울하다'는 말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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