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입에 달고 살면서 활개 치는 관료주의의 파도 위에서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은 참 재미있습니다. 과거 러시아의 고골이 그랬고, 1970년대 남한의 김지하가 그랬듯이, 최근 중국의 류진운이 그렀습니다. 류진운은 세밀화처럼 그들의 호흡 하나까지 생생하게 그릴 줄 압니다. 그래서 중국이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를 보는 듯합니다. 왕 짜증입니다.
2차 대전이 한창 이던 때 체코의 한 사회주의자가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구속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마음이 따뜻한 체코 출신 간수를 통해 펜과 종이를 얻어 글을 쓰고 몰래 밖으로 보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기간 동안 쓴 이 글들은 아주 차분하게 사람들을 둘러보고 관찰하고 있습니다. 신념은 그렇게 샘솟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칠레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소설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조국에 대한 향수와 이민자들의 이질감을 소설로 담아냅니다. 돌아가기 어려운 조국과 남미가 전해주는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현실적인 외로움과 차별과 고통이 드러납니다. 그런 어우러짐은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하던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한설야는 1934년 카프 조직사건으로 구속됩니다. 조직은 무너지고, 대중투쟁도 점차 사그라들고, 일제의 광기는 더욱 심해지는 1936년 한설야는 첫 장편소설인 ‘황혼’을 쓰기 시작합니다. 대중의 삶은 변함없고, 악랄한 이들은 아직도 악랄하지만, 기운을 잃은 지식인은 나약하기만 한 황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0년 한설야는 친일어용단체에 가입합니다. 일제 말기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해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지만...
근대 과학은 중세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빛과 힘을 안겨줬습니다. 신이 쫓겨난 자리를 차지한 지식인과 과학자는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서 새로운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인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에게 사랑을 원했지만, 창조주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맙니다. 1818년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가 만들어낸 소설 프라켄슈타인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