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 전6권
빅또르 위고 지음, 송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소설은 픽션이지만 그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고, 작가의 영혼이 투명되기도 한다. 레미제라블도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빅토르 위고의 종교관과 인생관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거대한 장편을 쓰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철저하게 밀고나갈 수 있었다는 힘이 놀라운 소설이다. 프랑스 시대와 사회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이해를 방해가히기는 하지만, 레지제라블은 명작이라고 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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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포항을 가득 메운 촛불들 사이, <반핵출정가>가 울려 퍼진다. 무대에 오른 노래패의 노래는 금세 부안 군민 모두가 함께 부루는 노래로 변한다. 그들의 노래는 군민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노래가 되며 아픔을 모아 분노를 만들어낸다.
부안 군민이 모두 인정하는 부안의 최고 노래패 ‘노랑고무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긴 함성이 따라붙는다. 노랑고무신이 무대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없다. 단지 부안 사람이 모두 입고 있는 노란 옷을 함께 맞춰 입을 뿐이다. 그 노란 옷에 담긴 의미 ‘핵 없는 세상’ 하나만으로도 부안은 이미 노랑고무신의 노래에 실어 보낼 함성을 장전하고 있다.
이정선(37) 회원은 “노래를 잘 불러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노래가 10점, 개사점수 20점에 의상이 70점이다. 핵과 맞서 사우는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르건 못 부르건 모두 한식구다.”라고 말했다.
평균연령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높다. 회원 전부가 아줌마, 아저씨다. 노랑고무신이라는 공식 이름을 달고 활동에 들어간 것은 채 한 달을 넘지 않는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대 위에서 간혹 음정과 박자를 놓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열성팬과 관객동원 능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안 군민 모두가 이들의 열성적인 팬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만들어지자마자 부안지역 읍·면을 돌며 순회공연에 나섰고, 활동 1주일 만에 팬클럽(?)이 생겼을 정도다.
노랑고무신이 전폭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는 단 하나,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부안의 노래패’이기 때문이다. 핵폐기장 부지 유치가 부안으로 확정되는 순간부터 부안은 한 덩어리고 싸우기 시작했고, 그 반핵투쟁은 해를 넘겨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긴 싸움의 순간순간 군민들은 투쟁의 마음을 힘차게 독려해줄 노래패를 필요로 했다. 작년(2003) 12월 18일 어쩌다 몇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고, 그것으로 노랑고무신은 창단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노랑고무신’에 담신 속뜻을 보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아주 선명해진다. ‘노랑’은 모든 부안 사람들의 목소리인 반핵을 상징한다. ‘고무신’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자는 의미이다.
“반핵투쟁은 부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다. 고무신처럼 서민적이다. 노래를 부르는 우리만이 노랑고무신이 아니다. 반핵을 위해 매일 발바닥에 땀이 나는 부안 사람 모두가 다 노랑고무신이다. 부안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 반핵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강양수(39) 단장의 말이다.
아저씨 세 명에 아줌마 다섯 명, 노랑고무신의 주축은 집안살림을 책임지는 아줌마들이다. 날마다 변산, 진서, 하서면 등지로 공연을 나서는 일정 때문에 집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식구들은 따뜻한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 날이 드물다. 그러나 가족 누구 하나 엄마이자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한 그녀들의 빈 자리를 나무라거나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한다.
회원 이오순(46) 씨는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부안 사람은 거의 없다. 부안 사람 모두는 아픔을 알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안다. 우리는 부안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 회원들은 핵폐기장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얼굴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촛불을 들고 모인 부안수협 앞 민주광장에서 혹은 반핵대책위 사무실에서 반핵을 외치다가 만났다. 사는 지역도 하는 일도 다르다. 몇 명은 농사 짓고, 또 몇은 고기 잡고, 건축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정경미(37) 씨의 말처럼 “농사 짓는 것보다 핵폐기장 싸움이 더 중요”해서 만났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무대 위인 것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노래를 부란다. 생업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반핵의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이다.
노랑고무신뿐만 아니라 부안 사람 모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반핵을 이야기한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동지가>를 배워 부르고 <불나비>를 목청껏 외치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이 할 일로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김정(41) 씨는 “할머니들은 촛불시위에 나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담벼락에 반핵을 색칠하는 것으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 부안의 반핵운동은 누가 시킨 게 아니다.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우리는 노래로 우리 자리를 찾았다.”고 말했다.
노랑고무신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자신들의 노래를 녹음해 음반을 해는 것이다. 노래실력을 뽐내거나 돈을 벌 생각은 아예 없다. 음반 속에 담긴 노래가 가두방송을 통해 부안 땅, 우리 땅 곳곳에 울리면 된다. 핵 없는 세상 그날을 기다리며 ‘노랑고무신’은 매일 ‘군민의, 군민에 의한, 군민을 위한 노래’를 부란다.
- 정상철, <전라도닷컴>, 2004년 2월 4일

부안에 새로운 시위문화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집단난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페트병, 플라스틱통, 깡통, 냄비, 쟁반 등 소리가 날 만한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아스팔트 바닥을 마구 두드려 소음을 내며 투쟁하는 방식인데, 최고 대접을 받는 악기는 양철통이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열과 성의를 다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난타를 하고 있는 이들을 옆에서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소리가 소리를 내고, 소리가 소리를 먹어, 빠르고 독특한 가락으로 변해 신명나게 쳐대는 이들을 무아지경으로 빠지게 하는데.....
잃어버린 우리의 소리를 재연하듯이 페트병이나 막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다듬이질하듯 가락과 강약을 조절해가며 두드려대는 사람, 젓가락 장단에, 풍물가락, 빨랫방망이 두드리듯 냄비뚜껑을 앞뒤로 뒤집으면서 쳐대는 사람, 그저 마구 바닥을 두드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낸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시끄러운 소음이 멋들어지고 구성진 가락으로 변하여 거대한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이 먼 곳에서 이 소리를 듣고 북을 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 걸 보면 정말 소리란 함께 섞여야 제맛이 나고, 드는 것보다 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난타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군청 행정을 마비시키거나, 연행자 석방을 위한 경찰서 투쟁 등 길고 긴 투쟁을 시작할 때 등장한다. 즉 소음을 통해 상대방의 뇌신경을 건드려 짜증나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지치지 않는, 행위예술을 통한 시위방식인 것이다. 지난(2003) 8월 15일 전북 경찰청 앞 투쟁에서 처음 시작되어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면서 특히 여성 참가자들한테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잇다.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사람들이 내다 버린 것들을 활용한다는 것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고 특별한 연수가 필요없다.
특히 남의 말을 듣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주체로서 등장하며, 복잡한 체계와 질서 없이 단순한 동작을 통해 서로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하여도 지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난타를 통해 속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는 것이다. 이 난타공연에는 나이 든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을 보고 특히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쌓인 ‘한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부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경박한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안에서 등장한 특이한 투쟁형태, 집단난타는 축제의 한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집단적 분노를 집단의 소리로 표출하는 저항행위였습니다. 그녀들의 악기는 징이나 장구가 아니라 양철통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짤막하게 자른 수도관으로 양철통을 쉴 새 없이 쳐댔습니다. ‘무대뽀’로 쳐대는 것이 아니라 대형 스피커와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민중가요의 장단에 맞추어 음악적 가락을 강렬하게 배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트로트 가락에 젓가락 장단을 맞추는 듯 보이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종의 것이니 사람들은 이를 ‘난타공연’이라 불렀습니다. 오히려 한국 여성들의 전통미를 속도감 있게 다스리는 다듬이질을 닮았습니다.
2003년 10월 12일 부안예술회관 앞에서는 하루 종일 대규모 집단난타가 벌어졌습니다. 300명 가량 되는 아줌마부대와 ‘아저씨’ 몇 명이 끼어 있었고, 함께하는 군민들도 수백 명 되었습니다. 이날의 난타공연은 전라북도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 경기 중 시범경기인 바둑대회가 부안 군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안예술회관에서 강행되는 것에 대한 잡단 저지 활동, 바꿔 말하면 난타시위였습니다. 부안군에 배정된 요트와 트라이애슬론 두 종목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갔지만 바둑은 실내경기여서 보호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대로 강행하자, “초상집에서 웬 축제냐”며 난타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아줌마 난타부대는 예술회관 정면에 인접한 깨밭과 고구마밭 사이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난타공연을 하며 1,000여 명의 전경부대가 지키고 있는 바둑대회장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녀들 앞에 설치한 ‘새 쫓는 기계’ 16대도 연달아 폭발음을 내었고, 전경들에게 젓갈탄도 발사하였습니다. 난타와 젓갈 냄새가 포성과 화약냄새를 대신한 것입니다.
난타, 누가 이것을 공연이라 쳐주겠습니까. 견디기 힘든 소음이 광폭하게 들리는데 말입니다. 사실 수백 개의 철판이 찢어지는 소음을 직접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청각공해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 장소에 직접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소리에 소리를 무는 공연으로 협화음을 이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난타는 그 대상이 되는 자에게는 엄청난 소음공해인 동시에 그 주체에게는 강렬한 저항력을 보여주는 공연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녀들의 난타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아야 했습니다. 난타공연장에 있다는 것은, 곧 난타의 소음을 행위예술적 저항으로 승화시키는 그녀들의 집단적 얼굴성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질긴 저항과 난타의 고행,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성,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늘로 치켜세우지도 아니합니다. 그녀들은 바로 앞의 부조리한 상황을, 분노에 차 있으되 고도의 동적 평형상태를 유지하며 응시합니다. 응시는 난타의 한 행동이며, 난타는 응시의 음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다양성과 일관성을 획득하며 저항적 리토르넬로를 생산하는 표현의 얼굴성이며, 난타공연이 행위예술인 까닭입니다.
그녀들은 문화예술행위가 특권화된 고급형식으로만 창출되는 게 아니라 저항적 삶에서 창출되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불과 한두 달 새 동질화된 감정구조로 혈육화된 시선들을 함께 잇는 난타공연은, 늘 구경꾼이기만 하던, 그것도 지역축제 때나 겨우 구경할 수 있는, 순전히 텔레비전의 낯선 타자로만 존재하던 그녀들 스스로가 얼마든지 뛰어난 문화예술 행위자가 될 수 있음을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전복의 전위예술가로 말입니다. 지휘자도 없는 집단 난타공연은, 잃어버린 해방의 문화소를 되찾는 몸의 운동이자 소리의 파장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녀들의 저항은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수에 대한 정치적 저항에서, 삶과 표현과 소통의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는 문화적 투쟁으로 이미 확장된 것입니다.

......

‘반핵·민주’라는 거창한 간판과는 달리 미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뛰어든 것이 아니어서 매일 매일 어떤 내용으로 채울지 동분서주, 혼비백산했다. 20여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주주의’와 ‘인권’ ‘핵에너지 문제’ 같은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스며들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서울상경투쟁을 처음부터 끝가지 아이들이 준비하고 이뤄지면서 그 자체로 ‘반핵’과 ‘민주’를 체험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강조했지만 생각보다 아이들은 지독히도 수동적이고 타율에 젖어 있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힘들어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나 또한 비슷한 모양으로 그 시절을 지나왔겠지 하면서도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랐다. ‘의미 있는’ 동아리 활동을 시도하다 ‘차라리 신나게 놀아보기’를 선택한 것도 이런 연유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았던 것이 무어냐고 물으니 학교의 벽을 넘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된 점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지금 서로에게 미쳐 있다. 학교 담장 안, 교실 안, 짝꿍의 좁은 세계를 벗어난 만남을 갖게 된 것은, 이번 작은 불꽃학교가 아이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인 한 친구는 원래 별로 말이 없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이번 불꽃학교의 경험으로 자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좋아했다. 계기를 물으니 “여기선 서로 경쟁하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답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 학교의 모습, 우리 교육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소맷자락을 잡고 “차라리 가지 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작은 불꽃 만남이 계속 되길 바란다. 무슨 의미 있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숨통을 트는 공간으로라도 계속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짧은 기간이지만 집중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청소년 인권’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이 관념적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고백하자면, 인권활동가라고 자처하던 나는 아이들을 의식화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접근했던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내게 어림없다는 것을 대번에 보여줬다. 그리고 아이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사랑’이 먼저임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다.

.....

나는 부안투쟁을 보면서 여러 번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예상 외로 주민들의 대규모화된 지속적 투쟁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그 주민투쟁 동력을 자신들의 입맞에 맞게 코드화하는 대책위 지도부의 정치적 행보와 배제의 논리에 놀랐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배제당하고 소외당하고 투쟁의 자기전망성/자기결정성이 박탈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어쨌거나 투쟁은 함께하면서 분열주의적 언행들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네 번째는 부안에서 뭔 일을 하려면 대책위 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교감’을 해야 한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허락’의 의미로 이해하고 반감을 가졌습니다. 다섯 번째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함께 투쟁하는 군민들의 원성이 자자해도 끄떡하지 않는 지도부의 태도에 놀랐습니다.
- 고길섶, <반핵부안>, 2004년 7월 5일

2004년 10월 4일 상경투쟁 때, 앞에 있는 지도부는 “참여정부 각성하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시위행렬 끄트머리에 선 주민들은 자진해서 “노무현을 박살내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지도부와 주민대중의 차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민대중의 감정구조는 끊임없이 지도부의 개량화된 정치전략으로 종속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현행 투쟁 이후 부안사회의 정치구도 및 문화정서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장악해나가겠다는 욕심의 표현과도 연동되었습니다. 그 욕심은 끊임없이 투쟁의 승리를 좌절시켰습니다. 이는 코뮌놀이로 징후되는 주민들의 해방적 투쟁상황과 이중권력적 쟁취를 해체시키며 권력적 욕망으로 미끄러지는 분열증적 장애물이었습니다.
대책위에 대한 비판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거나, 분파를 형성하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지도부의 역량 부족을 탓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힘을 실어주면 될 일입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을 메워나가는 태도입니다. 역량이 부족하면, 통 크게 수용하고 껴안으면 함께 채워나가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지도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큰 줄기를 틀어나가면서, 설명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며 자신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뱉어냈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쓴소리를 하면 경계하고 배척했습니다.
부안사회는 대책위 지도부 사람들과 친밀하게 코드화된 사람들 및 이들과 결속된 ‘형님문화’ 패밀리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이 몇몇 사람들 편으로 고개 숙여 들어가지 않으면 철저히 배제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습성에 절어 있습니다. 이는 자기네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안고 가려 하는 낡은 운동관입니다. 그나마 이 낡은 운동관마저 민중적 실천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합리적 공론장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형님문화적 사고 코드와 개인적 욕심들로 뒤섞이면서, 배제와 적대의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주류 형님문화의 우산 속으로 결속되지 않은 채, 이들과 다른 생각으로 부안에서 뭔가 해보려는 사람들은 배제되고 도태당하기 십상입니다.
반핵투쟁 이전 오랫동안 보수주의 세력에 눌려 약자로서 소외되었던 대책위 지도부(농민회 계열)는, 반핵투쟁을 통해 급성장하여 부안사회의 주도권을 휘어잡게 되었지만, 이전에 체화된 방어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상황이 달라졌고 부안항쟁이 대규모 주민대중투쟁임에도 타성을 혁신해내지 못했습니다. 대책위를 비판하면 내용의 타당성 여부는 묻지 않고 정치적 경쟁세력(민주당)의 지도부 흔들기 음모로 간주하거나 비판행위 자체를 불온시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늘에서 민주노동당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반핵진영 내 깊이 형성된 반목정서는 내버려둔 채, 군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감대 없이, 반핵투쟁의 성과를 정치적 이해관계난 개인적 욕심에 따라 일부가 배타적으로 챙기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004년 봄 대책위에 비판적이던 사람들 중심으로 ‘부안주민자치참여연대’를 발족할 때 대책위 지도부가 방해활동을 했던 일, 대안신문으로 창간한 <부안독립신문>을 일종의 기관지로 전락시킨 일 등 아픈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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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박쥐, 방랑자, 도둑의 눈에 황혼은 아침식사 시간이다.

비는 관광객에게는 저주이나, 농부에게는 희소식이다.

현지인의 눈에 관광객은 그림처럼 보일 뿐이다.

카리브 해 섬의 인디언들 눈에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붉은 우단 망토를 입은 콜럼버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앵무새였다.







목욕하기 싫어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엄마들은 “안 씻으니 꼭 인디언 같네.” 또는 “너한테 흑인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것도 인디언이나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들에서 말이다. 그러나 신대륙 정복사가들은 인디언들이 자주 목욕하는 것을 보고 정복자들이 놀라 혼미한 상태에 빠졌다고 기록했다. 처음에는 인디언들이, 좀 더 후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캐나다에서 칠레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위생 습관을 전해 주었다.







체사레 롬브로조(Cesare Lombroso)는 인종차별을 범죄학의 문제로 둔갑시켰다. 이탈리아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유대인인 그는 원시 미개인의 위험성을 증명하기 위해, 반세기 후에 히틀러가 유대인 배척운동을 정당화할 때 사용한 것과 대단히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범죄자는 범죄자로 태어나고, 그들의 생김새는 몽골 인종의 후손인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흑인과 똑같다는 것이 롬브로소의 주장이다. 살인범은 광대뼈가 넓고 머리카락은 검은 곱슬머리이고 수염이 적으며 송곳니가 크다. 또 도둑놈은 코가 납작하고, 강간범은 입술과 눈꺼풀이 두툼하다. 범죄자는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곤 했지만, 롬브로조는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여자들까지도 범죄자의 용모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혁명가에 대해서도 “나는 균형 잡힌 얼굴을 지닌 무정부주의자를 본 적이 없다”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견해를 나타냈다.







1997년, 관용차 한 대가 상파울루 대로를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출고한지 얼마 안 된 그 비싼 차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교차로에서 경찰 한 명이 차를 세웠다. 경찰은 그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한 시간 가량 손을 위로 든 채 뒤돌아서 있게 하고, 어디에서 그 차를 훔쳤느냐고 연신 추궁했다.

세 명 모두 흑인이었다. 그중의 한 명인 에지발두 브리투(Edivaldo Brito)는 상파울루 주정부의 법무장관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법무부 직원들이었다. 브리투에게 이 사건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제지했던 경찰도 흑인이었다.







인디언은 바로 이래서 열등하다 (16~17세기 정복자들의 생각)

- 카리브 해 제도의 인디언들이 자살하는가?

나태라고, 일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 몸 전체가 얼굴인 것처럼 벗은 몸으로 활보하는가?

야만인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 소유권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공유하며, 부에 대한 욕심이 없는가?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주 몸을 씻는가?

마호메트 종파의 이교도에 가깝기 때문인데, 종교재판소의 불구덩이에서 활활 타오를 것이다.

- 꿈을 믿고, 그 소리에 복종하는가?

사탄의 영향이거나 단순히 우둔하기 때문이다.

- 동성애가 자유로운가? 처녀는 순결을 전혀 중요하지 않는가?

난교(亂交)의 습성이 있고, 지옥문 바로 코앞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절대로 어린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자유롭게 놓아두는가?

벌을 줄 능력도 가르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 먹어야 할 시간에 먹지 않고, 배고플 때 먹는가?

본능을 통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을 어머니로 여기며, 자연은 신성하다고 믿는가?

종교를 가질 능력도 없거니와, 우상만을 숭배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일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것을 두려워한다.

운전자는 걷는 것을 두려워하고, 보행자는 차에 치일까 봐 두려워한다.

민주주의는 기억을 두려워하고, 언어는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민간인은 군인을 두려워하고, 군인은 무기가 바닥날까 봐 두려워하며, 무기는 전쟁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제는 공포의 시대다.

남성의 폭력에 대한 여성의 공포,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 도둑에 대한 공포, 경찰에 대한 공포

자물쇠 없는 문, 시계 없는 시간, 텔레비전 없는 아이, 수면제 없는 밤, 각성제 없는 낮에 대한 공포

군중에 대한 공포, 고독에 대한 공포, 지난 날에 대한 공포, 앞날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삶에 대한 공포







라틴아메리카 군부는 1959년 쿠바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방향을 전환했다. 전통 임무인 국경 수비에서 게릴라의 국가 전복 음모나 무수한 게릴라 양성소 같은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것으로 담당 임무가 바뀌었다. 자유세계와 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명분에 힘입은 군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말살해 버렸다. 1962년에서 1966년까지 불과 4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홉 차례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고, 이후 군인들은 국가안보라는 교리를 맹신하며 시민정부를 무너뜨리고 양민을 학살했다. 세월은 흘렀고, 문민질서는 회복되었다. 적은 여전히 내부에 있지만, 더 이상 과거의 그 적은 아니다. 군부는 이제 일반 범죄자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공공안녕을 외치는 히스테리가 국가안보라는 명분을 밀어내고 있다. 군인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경찰의 지위로 깎아내리는 것을 털끝만큼도 달가워하지 않지만 현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약 30년 전까지만 하더라고 기성 권력기구의 적(敵)은 밝은 분홍색에서 강렬한 빨강색까지 다채로웠다. 변두리 칼잡이와 좀도둑 사건은 사건․사고면을 읽는 독자들이나 잔인함을 탐독하는 사람들, 범죄 전문가들만의 관심을 끌 뿐이었다. 이젠 상황이 바뀌어 이른바 일반범죄가 보편적 강박관념이 되어 버렸다. 범죄도 민주화되어 누구라고 손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모든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범죄는 철권통치와 사형제도를 부르짖는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강력한 자극의 원천이 되고, 영외(營外)에서 거두는 성공에 목을 매는 일부 군 장교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를 제공한다. 일부 라틴아메리카 장군들은 정치 캠페인에서 민주주의를 혼란과 불안으로 동일시하는 이 집단적 공포를 대단히 그럴싸한 구실로 활용하여 한몫 단단히 챙겼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들은 피비린내 나는 독재 권력을 행사하거나 독재의 전면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지만, 이후엔 국민들의 놀랄 만한 반향을 등에 업고 슬그머니 민주주의 투쟁에 끼어들었다.







1997년 4월, 브라질리아를 방문 중이던 인디언 지도자 갈디노 헤수스 도스 산토스(Galdino Jesús Dos Santos)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다가 산 채로 타 죽었다. 좋은 집안 출신의 십대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그에게 알코올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다. “거지인 줄 알았어요.” 1년 후 브라질 법원은 살인 의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벼운 금고형에 처했다. 연방직할지 법원의 기록관은 이렇게 말했다. 소년들은 가지고 있던 알코올의 반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살인이 아니라 즐기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걸인들을 불태워 죽이는 것은 브라질 상류층 자제들이 심심찮게 즐기는 스포츠지만, 그런 기사는 대체로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1997년, 미국의 죄수는 총 180만 명이었는데 10년 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수치는 가택에 연금된 사람, 가석방이나 보호감찰 대상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세 배나 폭증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전개했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이 최악의 상황에 달했을 때의 수감자보다도 흑인은 다섯 배가 많고, 전체 수감자는 덴마크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은 이렇게 엄청난 고객 리스트였는데, 바로 이는 감옥이 민영화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감옥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식사는 형편없고 학대가 다반사로 이뤄진다지만, 그것은 사설 감옥이 국영 감옥에 비해 싸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주는 증거다. 비용을 절감해도 이익은 과도하게 늘어난다.

17세기경, 영국의 간수들은 죄수를 보내달라고 판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곤 했다. 석방시간이 다가오면 죄수들은 빚에 몰려 생을 마칠 때까지 간수들을 위해 노동을 하거나 구걸을 하곤 했다. 20세기 말 현재 CCA(Corrections Corporation of America)라는 미국의 한 사설 교도소 회사는 뉴욕 증시 상위 5위 내에 랭크돼 있다. 이 회사는 캔터키프라이드치킨(KFC)에서 나온 자금으로 1982년 설립되었는데, 치킨 팔듯이 감옥을 팔아댈 것이라고 광고했다. 1997년말, 이 회사의 주가는 무려 70배나 뛰어올랐고,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푸에르토리코에도 감옥을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수시장이 사업의 기반이었다. 미국의 죄수는 나날이 늘어만 가고 감옥은 언제나 빈 방이 없는 호텔이다. 1992년에는 100여 개가 넘는 회사가 감옥을 디자인하고 건설하고 경영했다.

1996년, 이렇듯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사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월드리서치그룹(World Research Group)의 후원으로 전문가 회의가 열렸다. 회의 개최 알림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체포하고 구형하는 일이 늘어나면 수익도 늘어난다. 그 수익은 범죄 수익이다.” 사실 미국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범죄는 줄어들었지만, 시장은 더욱 많은 죄수를 공급하고 있다. 수감자 수는 범죄 건수가 늘어날 때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로 감옥에 가기 때문이다. 범죄 통계 때문에 한창 잘나가는 사업을 망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방면의 경영 간부인 다이안 매클루어(Diane McClure)는 1997년 10월, “우리의 시장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라는 희소식을 전하며 주주들을 안심시켰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의 백정 가운데 하나인 알프레도 아스티스(Alfredo Astiz) 대위는 진실을 발설한 죄로 파면되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은 모두 해군에서 배웠다면서, 직업적 박식함을 자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정치인이나 기자들을 없애는 데는 기술적으로 가장 제대로 준비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와 또 몇 명의 아르헨티나 군 간부들은 에스파냐,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사람들을 암살한 혐의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재판에 회부되었거나 기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이 수천 명의 자국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지난 일은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취지의 법에 따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여러 형태의 불처벌법 역시 같은 기계에서 찍어 낸 듯 닮은꼴이다.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는 외채 상환과 범죄 망각이라는 선고를 받고 소생했다. 마치 민선 정부가 군부의 노력에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군부의 공포정치는 유리한 해외투자 환경을 조성했고, 이어 뻔뻔스럽게도 나라를 헐값에 팔아먹을 수 있는 길을 잘 닦아 놓았다. 국가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노동권을 유린하고, 공익사업이 와해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였다. 모든 것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행되거나 파괴되었다. 1980년대에 민권을 회복한 사회는 최상의 기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고, 거짓과 공포에서 살아남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며, 너무도 낙담하고 쇠약해져서 창조적 활력을 필요로 했다. 창조적 활력은 민주주의가 약속한 것이긴 하지만, 줄 수도 없었고 줄 방법도 몰랐다.

국민의 투표로 당선된 정부는 정의를 보복과 동일시하고, 기억을 무질서와 혼동했으며, 국가 테러리즘을 자행한 자들의 이마 위해 성수를 부었다. 민주주의의 안정과 국민화합이라는 이름 아래에 정의를 추방하고 과거를 묻어 버리며 기억상실을 찬양하는 불처벌 법안들을 공포했다. 그중 어떤 법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했던 여러 선례를 훨씬 더 능가하기도 했다. 1987년에 공포된 아르헨티나의 지당한 복종법은 10년이 지나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자 폐기되었다. 지당한 복종법은 어떻게든 사면해 주려는 열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명령을 따랐을 뿐인 군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상사든 대위든 장군이든 신이든 명령에 따르지 않을 군인은 없으므로 형벌의 책임은 신(神)들의 나라에나 부려지곤 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정신착란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1940년에 완성시킨 독일 군법은 당연히도 훨씬 신중했다. 예를 들면, 제47항에서는 “상관의 명령이 일반 범죄나 군범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행동의 책임 소재가 부하 군인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 여러 법은 지당한 복종법만큼 격하지는 않았지만, 군부의 오만함에 국민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또한 그 법들은 국민의 공포를 이용하여 대학살은 정의가 닿지 않는 곳에 모셔두고, 최근세사가 남긴 모든 쓰레기는 양탄자 밑에 숨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폭력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융단폭력 식 홍보를 접한 뒤에 대부분의 우루과이 국민들은 1989년의 선거에서 불처벌을 지지했다. 공포가 승리했고, 무엇보다도 공포가 법의 원천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공포는 때로 물밑에 가라앉아 있고, 때로는 눈앞에 보이기도 하는데, 권력을 살지게 하고 정당화한다. 그리고 권력을 민주주주의 선거의 리듬에 맞춰 들어서고 나가는 정부보다 더 깊은 뿌리와 더 끈질긴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세기말의 높은 하늘, 미국은 지구상에서 자동차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일 뿐 아니라, 무기도 가장 많이 몰려 있다. 6, 6, 6. 보통 시민이 지출하는 6달러당 1달러는 자동차에 들어간다. 살아가는 여섯 시간마다 한 시간을 차 안에 있거나 차 값을 지출하기 위해 일한다. 알자리 여섯 개당 한 자리는 직간접적으로 자동차와 관련되어 있고, 또 다른 한 자리를 폭력이나 폭력 연계 산업과 관련되어 있다. 자동차와 무기가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하면 할수록, 자연이 더 많이 황폐해지면 질수록 국민총생산(GNP)은 늘어난다.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위한 부적인가 아니면 범죄를 부추기는 것인가? 자동차 판매량은 무기 판매량에 비례하는데, 무기 판매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동차사고는 화기, 총포에 의한 사망률을 누르고 젊은층의 사망 원인 1위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부상한 미국인보다 더 많은 미국인이 교통사고로 매년 목숨을 읽거나 다친다. 그리고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누구든지 자동소총을 구입해서 동네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요리해 버릴 수도 있다. 운전면허증이 그 용도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수표로 지불을 하거나 수표를 현금으로 찾을 때, 어떤 수속을 하거나 계약서에 서명을 할 때도 쓰인다. 운전면허증이 주민등록증을 대신한다. 다시 말해, 자동차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현대화, 자동차화. 당신의 자유를 훔친 후 나중에 당신에게 되팔고, 당신의 다리를 자른 후 나중에 자동차나 운동기구를 사라고 강요하는 문명의 저의를 고발하는 소리는 엔진의 굉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도시의 악몽이 세상에서 유일하고도 가능한 삶의 모델로 강요된다. 라틴아메리카 도시들은 800만 대의 자동차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와 비슷해지기를 꿈꾼다. 창조 대신에 똑같이 찍어 내는 훈련에 돌입한 지 500년이 된 우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그 현기증 나는 상황의 기괴한 복사본이 되길 갈망한다. 운명이 모방자로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무엇을 모방할 것인가를 선택할 때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낭비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조용하게 살 수도 없고, 조용함을 살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나는 법을 잊어버린 암탉의 날개처럼 걷는 법을 잊어버린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쓰레기를 먹으며 마치 음식이라도 되는 양 돈을 내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마치 공기라도 되는 양 10원 한 장 내지 않고 똥을 먹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텔레비전 채널 두 개를 놓고 하나를 택할 자유 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기계와 함께 열정적이고 극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항상 다수지만 항상 외로운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1983년, 독일 작가 권터 발라프(Günter Wallraff)가 주유소들 중 한 군데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함부르크에 있는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회사가 맥도날드라는 이름으로 어떤 일을 자행하는지는 순진할 만큼 알지 못했다. 그는 끓는 기름방울을 맞아 가면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일했다. 해동된 햄버거는 10분 동안만 먹을 만하다. 10분이 지나면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그전에 지체 없이 철판에 던져야 한다. 감자튀김, 채소, 고기, 생선, 닭고기 등의 모든 음식 맛이 똑같다. 그것은 화학 산업이 지시하는 대로 만들어 낸 인공의 맛이다. 게다가 고기에 포함된 지방 함량이 25%나 된다는 사실, 그것도 색소를 첨가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데 온힘을 다한다. 이 불량식품은 세기말에 가장 성공을 거둔 음식이다.







전문가들은 물건을 외로움을 달래는 마술사의 주문으로 바꿀 줄 안다. 물건은 인간의 속성을 지녔다. 쓰다듬고, 같이 있어 주고, 이해해 주고, 도와준다. 향수는 당신에게 키스해 주고, 자동차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 친구다. 소비문화는 고독을 시장에서 가장 수지맞는 품목으로 만들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그 구멍을 물건으로 가득 채우거나 가득 채우는 꿈을 꾸는 것으로 메워진다. 그리고 물건은 껴안을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물건은 신분상승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계급사회의 세관을 통과하기 위한 허가증이 될 수도 있으며, 출입 금지된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흔하지 않을수록 더 좋다. 물건이 당신을 택하고, 군중의 익명성에서 당신을 구한다. 광고는 판매하는 물건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는 예외도 있지만 말이다. 정보 제공이야말로 제일 하찮은 일이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절망을 보상하고 환상을 심는 일이다. 당신은 이 면도용 로션을 사면서 어떤 사람으로 바뀌고 싶습니까?







세계가 커다란 TV 화면으로 변하려 한다. TV 속 물건은 바라보는 것이지 만질 수는 없다.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상품은 공공의 공간을 침략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남의 장소였던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은 이제 상업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모든 쇼윈도의 쇼윈도라 할 수 있는 쇼핑센터나 쇼핑몰은 자신의 위압적 존재를 억지로 주입한다. 군중은 소비의 미사가 열리는 이 대사원에 순례자가 되어 참석한다.







지구의 주인들은 지구가 마치 일회용인 것처럼 사용한다. 태어나자마자 바닥나는, 잠깐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 텔레비전에서 기관총처럼 쏟아내는 영상들, 잠시도 쉴 틈 없이 광고가 토해 내는 유행과 우상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다른 별로 이사해 살 것인가? 신께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지구를 사유화하기로 결심하시고, 몇몇 기업에게 지구를 팔아넘기셨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가? 소비사회는 바보 사냥을 위한 함정이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지만,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자연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적게, 아주 조금 소비하거나 혹은 전혀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회의 불의는 시정해야 하는 잘못이나 극복해야 할 단점이 아니라 절대 불가결한 필수품이다. 지구 크기의 쇼핑센터를 먹여 살릴 만한 자연은 없다.







도시의 담벼락에 적혀 있는 것

- 나는 밤이 너무도 좋아. 그래서 낮에는 밤 위에 차양을 칠거야.

- 그래, 매미는 일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개미는 노래할 수 없어.

- 우리 할머니가 마약은 안 된다고 하셨어. 그리곤 돌아가셨지.

- 인생은 저절로 치유되는 병이야.

- 이 공장은 새들을 연기로 내뿜네.

- 우리 아버지는 정치가라도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셔.

- 행동은 이제 그만! 우린 소망을 원해!

- 희망은 가장 마지막으로 읽어버린 것.

- 세상에 오기 위해 아무도 우리에게 길을 물어 본 적 없지만, 이 세상에 살기 위해 우리에게 길을 물어봐 주었으면 해.

- 다른 나라가 있을 거야. 어딘가에.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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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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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가 출소한 이후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인권운동은 비전향 장기수로서 자신의 몸으로 당해온 반인권 상황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해서 조금씩 사회의 여러 문제로 넓어진다. 그래서 그의 인권은 생생하고 처절하다. 그런 인권에 대한 글들이기에 글들도 생생하고 처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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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 최서해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
최서해 지음, 곽근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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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를 실아가야했던 식민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소설 중 가장 단순하고 단호한 소설은 최서해의 소설일 것이다. 그렇다고 도식적이지도 않다. 숨막히는 삶은 그냥 숨막히게 그리면 된다. 치떨리는 상황을 읽고는 치떨리게 만들어야 한다. 지식인들처럼 이것저것 고민하면서 어정쩡하게 살지말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자. 식민지 조선이 뭐 그리 복잡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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