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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시인, 그들은 누구인가?

똑같은 시대를 살아도, 한 발 더 사는 사람들. 가슴 아픈 것을 보면, 가슴 아파할 줄 알고,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 남들보다 몇 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자신의 아픔보다 시대의 아픔을 더 빠르게 느낄 줄 아는 사람들. 내가 아는 시인은 그렇다. 진짜 시인이라면 그렇다. 아름다운 말보다, 뼈 아픈 말을 꺼낼 줄 아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이 느끼고 있으나, 차마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이들이 시인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은 아름답고도 슬픈 존재 아니던가. 김수영, 그야말로 찬란하고도 슬픈 존재다. 시대를 꿰뚫어 보며 온몸으로 고통스러워 했고, 시와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살았다.

 

 

강신주는 그 열정과 자유, 인문학적 정신을 이 책에 담았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한 개인이, 김수영에게 바치는 책이다. 김수영을 해석하고 해설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우리 시대에 들어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김수영이 비판하고, 아파하고, 안타까워한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별반 다를 게 없다. 반복을 거듭한 시대는 진화하기는커녕 제자리를 걷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어쩌면 더 와 닿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해야하는 시대에서 시대에 분노했던 김수영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시원하고 즐거우면서도 반성해야하고 되돌아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이야기했던가? 인간의 자유는 '대상적 활동(objective activity)'에 있다고 말이다. 앞에(ob) 던져져(ject) 나의 활동을 방해하는 저항에 대해 능동적(active)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급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라. 강풍에 몸을 맡기고 활공하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뿐이고, 강풍에 날려 가는 새는 오직 죽은 새 뿐이다. - 본문 30쪽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자유를 놓아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리고,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이들,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이들, 자유라는 것은 그냥 놓여진 것일 뿐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망각한 이들. 누군가의 삶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이들. 자유 의지를 멀리 날려버린 이들. 생각하지 않고, 각성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한다면 결국, 저 위의 권력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임을 부인해도 부인될 수 없는 시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친 김수영의 시와 정신은 시대의 부끄러움을 또렷히 보여주는 글들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것을 다시 일깨웠고, 작가의 이야기에 덧붙여 그를 마음과 정신을 상상하게 되면서 그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는 분명 쓰고 싶은 것을 썼지만, 그것이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삶의 즐거움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의 삶은 시대의 급류와 맞물리며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는 누군가를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시절도 있었다. 그는 전쟁에 휩쓸려 거제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나락에 빠져 보았고, 죽을 힘을 다해 돌아왔지만 아내는 친구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를 찾으려 갔지만, 아내는 쉽게 따라나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온 아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는 고통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닌척해도 상처난 정신은 돌이킬 수 없는 일. 불행은 쉽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설움은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온몸에 내재되어 있는 참혹한 상처와 설움, 분노의 씨앗들이 김수영을 김수영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온몸으로 쓰는 시, 온몸이 살아서 나오는 시, 온몸이 밀어내어 나오는 시, 그것은 시의 진실, 그리고 시의 의미일 것이다. 또한, 그의 모든 시들은 온몸으로 썼다는, 온몸을 밀어내며 썼다는 말일 것이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완성해내기 위해 그는 상처와 고통으로 온몸을 밀어내었고 그렇게 탄생된 시들은 읽는 이 마저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수영의 이상은 분명하다. 모든 사물이나 사태처럼 각 개인은 단독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닌데 단독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단독성을 되찾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교육과 관습, 권력이라는 외적 압력 때문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외부가 강제하는 제스처로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반대로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그러나 그 누가 노예로 살고 싶겠는가? 이것은 교복을 입을 수밖에 없는 학생들, 특히 여고생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보면 분명해진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자신이 입는 교복에 깨알 같은 변형을 주면서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한다.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교복 양식이 계속 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것이 시의 원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본문 152쪽

 

 

개인은 시대에 잡아 먹힌지 오래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슷한 방향으로 비슷하게 수긍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잡음 없고, 피곤하지 않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한 '개인'을 '모두'에 집어 넣는다. 개인은 '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우리' 속에 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나혼자 튀는 것, 그것은 언제나 미움을 받아왔다. 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하지만, 생각해보면 튀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몸부림 치는 이들이었다. 튀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것이 싫어서, 비슷한 삶을 거부하기 위한 반항이었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 행위였다. 이제야 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가 '단독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지만, '단독적인 존재'를 향한 야유는 생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남 생각이 내 생각인 것처럼 덧칠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의 생각대로 살면서도 내 생각대로 산다는 착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다. 생각해보면, '단독적인 존재'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조금 더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깨어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단독성을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몸부림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김수영의 '시'였고, 김수영의 '글'이었다.

 

 

김수영은 시인만큼은 모든 사람이 시인일 수 있는 사회를 꿈꾸어 왔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인들이 현실의 낡음은 자각하지 않고 남의 제스처를 흉내내 시만 새롭게 쓰려는 모습을 보며 절망했다. 억압된 시대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단독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시를 써내려고만 했으니, 그의 고민은 컸을 것이다. 설움도 없고, 자신만의 제스처도 없는 시인들에게 "뒤떨어진 현실에서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시를 위조해 내놓"고 있다고 일갈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들의 태도에 대한 강한 분노였다. 온몸을 밀어내며, 온몸으로 살아내며 쓰는 그에게는, 시대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시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슬펐을지.

시대는 흐르고 있었다. 혁명인 듯 보였지만, 혁명이 아니었고, 권력을 깨부순 듯 보였지만 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있는 대중을 속이고, 결국 다른 권력이 모습만 바꾼 채 지배한다. 4.19혁명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실패를 인정했지만, 또 다른 혁명을 꿈꿨다. 완전한 혁명은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 그는 혁명의 좌절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자유를 꿈꿨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재와 억압에 대한 분노로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할지라도, 그들 내면은 이미 권위주의로 훈육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가난한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권력이 없던 사람이 소망하던 권력을 얻으면 권력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로 이 점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선(善)과 정의(正義)의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피해의식 탓에 그들은 언제든지 억압받는 자로 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예는 주인이 되기를 소망할 뿐, '주인과 노예'라는 억압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의 왕조를 붕괴시킨 혁명이 항상 화장을 새롭게 고친 또 다른 왕조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 준다. 억압으로부터 인간, 혹은 자유를 회복하고자 한 혁명의 결말치고는 아이러니하다. - 본문 346쪽

 

 

온몸이 더러워지는 진창에 빠져, 나를 알아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하여도, 끝까지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자유 의지와 살아있음을 이야기 했고, 그 어떤 것도 그를 막아설 수 없었다. 우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억압과 독재 위에 살고 있다. 아무리 자유로워졌다고 하여도, 정신은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어딘가를 서성이며 헤매이고 있다. 권력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간들은 자유의지를 희미하게 했고, 오로지 힘이 나의 존재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고 살아 왔다. 그것은 '나 자신', '나의 온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던가? 그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김수영은 현재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우리가 혁명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쳇바퀴 돌 듯 계속 회전만 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시는 정신이다. 이루어내야할 정신이다. 삶이다. 세상이다. 모든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세상을 바라는 꿈이다. 모두가 시인이 되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희망이다. 자각이다. 일깨움이다. 서러움이자, 고통이다. 뼈아픈 일침이다. 진실이다.

외면하고 싶은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가 더욱 소중하다. 모두가 외면했던 진실들과 당당히 마주하며, 거대한 시대와 맞선 그. 그리고 그를 다시 한번 읽게 해준 강신주.

거대한 도끼가 되어 시대를 내리찍은 그의 시. 그의 시와 그의 마음, 그의 모든 것이 이 시대를 나아가는 열쇠가 되길 바란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1960. 6. 15)

 

 

 

 

시인을 생각하다

이 세상의 시인들은, 온몸을 밀어내 시를 쓰는 시인들은, 시인이었고, 시인인, 시인일 것인 시인들은 이 세상을 참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속적이나 벗어날 수 없는 자신들의 공간에 갇혀, 그 순수한 마음을 감추어 보려고 술을 마시고, 어둠을 벗삼고 세상과 단절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눈을 뜨기만 해도 괴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걸 알기에, 온 몸을 밀어내 혼자 시를 쓰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시를 쓰지 않는 시인도 시를 쓰는 시인도 어딘가에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시인의 시는, 시 속의 시인은, 시 밖의 시인은 항상 진실과 마주하며 고통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아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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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1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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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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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돈을 쓰는 걸까? 돈에 의해 쓰임 당하는 걸까?

 

돈으로 다 되는 세상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살 수 있다. 세상에 돈 있으면 안 되는 게 있을까 싶을 정도다. 상품을 넘어, 권력, 지위, 감정마저 사고파는 세상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워져 간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공기, 잔디, 산, 새....." 아이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많은 것들이 대부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허무해져 버렸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일수록 돈에 묻혀버린 것들이 많다. 

 

세상은 돈에 의해 발전한다. 그리고 돈 때문에 발전한다. 돈을 떠나선 구닥다리 삶만 있을 뿐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 도시에서 적응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 돈은 소비되고 있고, 집 밖을 나가는 순간에 시작되는 모든 행동에 돈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황폐해져가고, 이기적이 되고, 은둔생활을 하게 되는 것도 대부분 돈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 풍요로워진 대신, 따뜻함과 아늑함을 잃어간다.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돈의 유혹이 달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나온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도 돈에 의해 거래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충격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예측이 가능하지 못한 것,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 등은 물론, 윤리적으로 그래서는 안 될 것, 도덕적으로 거래되지 말아야 할 것들도 이미 돈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해도 사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미 신념이나 결정권마저 돈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이제 돈은 수단과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 주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례들은 미국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시기만 조금 다를 뿐이지, 우리에겐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아마도 형태만 다를 뿐 어디선가 이런 사례들을 롤모델 삼아 적극 활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돈으로 사고 팔면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존재한다.

 

 

돈의 잔인함, 그 안에서 조종당하는 인간

 

경제학을 인센티브의 학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시장의 영향력을 일상생활까지 확대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경제학자를 행동주의자로 묘사한다. 1970년대에 게리 베커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했던 '그림자 가격'은 실질적이지 않고 암시적이었다. 그림자 가격은 경제학자들이 상상하거나 가정하거나 추론하는 은유적인 가격이었다. 하지만 인센티브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경제학자나 정책 입안자가 고안하고 만들어내고세상에 부여한 제도다. 인센티브는 사람들이 체중을 감량하거나 더욱 열심히 일하거나 환경오염을 자제하는 데 더욱 분발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 본문 125쪽

 

흔히 인센티브는 성과급으로 알고 있다. 누군가가 회사 이익이나 발전에 성과를 냈을 때, 그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지는 성과급. 격려나 포상의 개념인 인센티브는 이미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버렸다. 이민을 허용하며 받는 금액이라든가, 오염권을 사는데 쓰는 금액이라던가, 바다코끼리나 검은코뿔소를 사냥할 권리를 사는 금액이라던가, 약을 복용하거나 금연, 체중 감량을 독려하는 건강유지금이라던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다이어트 워>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며, 체중 감량의 목적을 미션에 맞게 잘 이루어내면 거액의 상금을 주며 축하해 준다. 다이어트라는 쇼를 보여준 대가다.

 

사실 '인센티브', 즉 대가를 지불한다 라는 말로 포장되었을 뿐, 과연 '인센티브' 자체가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마약 중독자에게 불임시술을 장려하며 돈을 준다는 게 옳은 일일까? 마약에 중독된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다는 것 뿐, 출산의 권리도 태어날 권리도 고려하지 않았다. 불임 수술을 한 것에 따른 성과급이란 것은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똑같이 지구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지구를 오염시키고 파괴할 권리를 갖게 되고 또 누군가는 그 권리때문에 피해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지고 만다. 지구의 환경이 돈만 지불했다고, 회복되고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을 지불했다고 해서 지구는 깨끗해지지도 복귀되지도 않는다. 죄책감이나 불편함을 '돈'으로 덜려는 마음, 그것을 받아들여야 옳은 것일까?

 

이 책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 돈이면 안 될 게 없다. 1박에 82달러면 교도소 감방을 업그레이드해서 즐길 수 있고, 러시아워에는 8달러를 받고 나 홀로 운전자가 카풀차로 이용하도록 허용한다. 인도인 여성의 대리모 서비스는 6250달러면 충분하고 어떤 법적 제재도 받지 않는다. 미국으로 이민하는 권리는 50만 달러에 살 수 있고, 멸종 위기에 놓인 검은코뿔소는 15만 달러만 주면 사냥할 수 있다. 1500달러에서 2만 5천 달러까지 연회비를 지불하면 의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받고 원할 때 진료 받을 수 있다. 1톤에 13유로를 지불하면 탄소배출권을 살 수 있고, 자격미달이어도 거액의 금액만 기부하면 명문대 입학도 가능하다.

제약회사의 약물 안전성 실험대상이 되면 7500달러를 받을 수 있고, 민간 군사기업에 고용되어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가하면 매달 250달러에서 매일 1천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의회 공청회를 참과하려는 로비스트를 대신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밤새 줄을 서고 좌석을 확보하면 시간당 15~20달러가 지급된다. 학력이 부진한 댈러스 소재 학교에 다니는 2학년 학생이 책을 읽으면 권당 2달러가 지급되고, 비만인 사람이 4개월 안에 체중 6킬로그램을 감량하면 378달러를 받을 수 있다. 아프거나 나이 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보험 증권을 사서, 피보험자가 살아있는 동안 보험료를 불입하고 당사자가 사망하면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피보험자가 일찍 죽을수록 투자자의 수익은 올라간다.

 

돈의 활용도가 놀라울 정도다. 어떠한 권리도, 어떠한 서비스도, 어떠한 의무도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망설일 필요도 없다. 돈이 있기 때문에,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돈으로 교환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돈이 필요한 사람과 돈이 많은 사람이 윈윈하는 것이다. 철저한 수요와 공급 형태다. 그 안에 윤리나 도덕적 가치는 사라진지 오래. 그것은 돈과 교환되었다. 삶과 죽음마저 거래되는 시장,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돈을 버는 세상. 죽음마저 거래된다면 돈의 한계는 과연 있는 것일까?

 

청소부 보험을 둘러싸고 제기될 수 있는 도덕적 반박의 근거에는 동의의 부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원이 이런 제도에 동의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못마땅한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정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직원에 대한 회사의 태도다. 청소부 보험은 직원이 살아 있는 것보다 죽었을 때 더욱 가치가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면서 직원을 사물화한다. 즉 회사는 직원의 가치를 직원의 업무에서 찾지 않고 직원을 상품선물(商品物, 일반 상품을 매매 대상으로 하는 선물 계약-옮긴이)로 다루게 된다. 기업 소유의 생명보험이 생명보험의 목적을 왜곡한다는 반박도 있다. 한때 유족에게 안전망 역할을 했던 생명 보험이 지금은 기업을 위한 세금혜택 정책의 일종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세금 체계가 왜 재화와 용역의 생산보다는 직원의 사망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회사를 부추기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 본문 189쪽

 

직원의 죽음도 돈으로 환산하는 회사.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면서, 얼마나 참혹한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일까? 거대 기업 또한 인간이 만들고 세운 회사이거늘, 직원을 회사의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다면 기업이 원하는 것은 돈 그 이상 이하도 아닐까? 삶과 죽음마저 시장이 되어야 하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돈이 결국 인간을 잠식하며 인간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는 '돈'의 잔인함 앞에서 가치를 논한다는 게 아이러니해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몫

 

마이클 센델은 해결방법을 말해주지도,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사례들과 경제학자들의 견해, 경제 흐름의 추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쪽과 저쪽에 선 견해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한쪽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 이미 나마저도 돈으로 많은 것들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돈으로 해결해도 괜찮은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을 때도 많다. 이 모든 사례는 어쩌면, 극히 극단적이고 일상 속에서 접하기 어려운 사례들이기 때문에 놀라웠고 충격적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돈으로 해결하는 일들은 타인이 보기에는 놀랍거나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 그만큼, 시장은 다양해졌고 한계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디까지 돈으로 해결되어야 할까? 라는 의문과 걱정이 든다. 인간의 이성과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돈으로 거래되는 많은 것들. 그것들을 제재하지 않고 돈의 흐름과 필요의 흐름에 내맡긴다면 결국 인간은 스스로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세상은 점점 풍요로워지고 있고, 돈만 있으면 갖지 못할 게 없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만 가고 삶보다는 죽음을 택한다. 인간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수단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개인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너무도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마저 하나의 상품이 되어 사고 팔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지구가 파괴되어 사라지기 전에 인간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분명 살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사지 말아야 했던 것들이 있었기에 삶이 소중하고 인간이 가치로웠다고 믿는다. 위기 의식을 느끼고 각성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 가치, 그 이유마저도 희미해질지 모른다.

 

'살 수 없는 것들을 셀 수도 없게 된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게 과연 행복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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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만남 속에서 삶이 급선회되기도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거나, 힘들고 고된 삶 속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 다시 일어날 힘을 얻거나, 어떤 상황에 감동을 받아 전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다. 이런 소중한 만남도 어쩌면 타이밍이다. 마음과 상황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도 그 뿐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박철웅 씨는 원순 씨를 만나며 삶이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만나, 11년간 근무했던 직장을 정리하고 원순 씨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삶에 조금 지쳐있었지만, 원순 씨를 만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어찌보면 세상은 예측 불가. 소셜디자이너로 낮은 자리, 눈물로 젖은 자리, 힘든 자리에 사는 사람들을 돕고 응원하며 살던 원순 씨. 악독한 정권을 만나 뜻에도 없던 '서울 시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정말 백지였다.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조직'도 없었고, '정당'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돈'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가 살아온 족적만 있었을 뿐, 순수하게 그를 따르는 사람들만 있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위대한 당들이 그를 위협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세훈이 물러난 자리 나경원으로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서울시민들을 물로 본 것. 하지만, 상황은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고 원순 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이 책은 그 지난했던 순간,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 박철웅 씨는 원순 씨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고, 그 상황들과 고민들을 기록했다. 시민과 박꿈(박원순과 함께 꿈꾸는 서울) 회원들은 그를 응원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바라는 선거의 모습은 모두가 함꼐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함께 뜻을 나누고 성과를 나누는 것만큼 기쁜 일도 없을 터였다. 경선인단선정시에도 인증한 후 함께 홍보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재미 있는 선거였다. 시민들이 주최가 되어 자발적으로 움직이니, 누구에게는 끝도 없이 들어가는 선거자금 때문에 곤혹스러울 선거가 축제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 86p
 
어쩌면, 시민들은 이런 상황을 원했을 것이다. 함께하는 삶, 함께하는 선거, 함께 만드는 시장. 권력이나 조직, 돈에 좌우되지 않고, 시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직접 찾아서 우리의 말을 듣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원순 씨에게 바란 것은 그런 것. 약속을 호떡 뒤집듯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믿고 응원해준 만큼, 기대한만큼 더 열심히 뛰는.
 
저자는 원순 씨를 수행하며, 상황들을 낱낱이 기록에 남기면서 즐거움, 어려움, 당혹스러움, 개선할 점 등을 찾게 된다.
 
"정당의 조직력과 자금력은 정말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정당에 대한 가벼운 우월감이 내 속에 있었는데, 막상 마주하고 보니 귿르의 힘이란 장난이 아니었다. 시민후보 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인적.물적 자원으로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94p
 
경선을 치르면서, 불안한 마음도 가득했고, 열정과 즐거움으로 하는 일도 실수가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시민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마음이 앞섰기에 실수를 하며 배우고, 우왕자왕하기도 했지만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원순 씨를 응원하고 있었다.
 
상대편에서는 '기부금'을 네거티브로 이끌어내는 기상천외한 전략도 펼쳤고, 원순 씨의 사생활도 물고 늘어졌다. 선의로 한 행동들도 진흙탕물에 빠져 상식은 물건너간 정치판을 실감하게도 했다. 하지만, 그 비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행동했기에 스스로 진흙탕물로 들어가는 면모를 보이며, 원순 씨의 지지율을 높여주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생각하게 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 그의 행보는 칭찬받아 마땅하고, 존경받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정치판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런 기본적인 진실이나 사실들은 묵살되고, 티끌보다 작은 것들이 진짜 그의 모습인 것처럼 확장되기도 한다. 사실 정치판이라는 게 착하고 순한사람이 버티기 쉽지 않다는 것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원순 씨에게는 뒤를 받쳐주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스스로 발로 뛰어주고, 스스로 행동해주는 지지자들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간신문에 실린 온갖 흑색선전에 아침부터 기분을 잡친다. 출근해 컴퓨터 모니터를 켜면 쏟아지는 원색적인 헤드라인들에 또 한 번 무력감을 느낀다. 미디어로는 원순 씨를 소개하고 알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하기까지 한 지경이었다.
그뿐인가! 일과를 마치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팬카페와 페이스북, 트위터에 들어와 보면 우리편이라는 사람들도 날이 시퍼렇게 세우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하든 그대로 상처가 되었다.
우리는 직업 정치인도 아니고 선거를 많이 치러 본 정당 지지자도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달관하여 받아들일 줄 아는 성인군자도 아닐 뿐더러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경험과 지식도 부족했다. 서로에게 내뱉은 한마디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다녔고, 다시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 168p
 
원순 씨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했던 저자의 생각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분명, 더 잘 살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지만 가끔은 이런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부딪혔다고 누워만 있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힘들어 하면서도 원순 씨 곁을 지키며 자기가 할 일을 꿋꿋하게 해나갔다. 원순 씨의 '경청투어' 일정과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 올렸고, 그가 일정 중에 전하는 마음 담긴 말들을 지지자들에게 전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할 준비를 단단히 해낸 것이다.
 
선거가 10여일 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동행취재기를 접고, 유세 활동 힘을 쏟았다. 광화문 유세에 참여하고, 희망합창단을 구성해 다같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지지활동을 펼쳤다. 원순 씨는 원순 씨대로 새로운 개념의 유세방인 '박원순과 함께하는 거리 이야기 콘서트(박콘)', 경청카페 '마실'도 열었다. 시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시민을 위한 시장으로 살아가겠다는 원순 씨의 다짐이 담긴 유세들이었다.
 
"그렇다 '밥'이 문제였다. 단지 어린 아이들의 급식 이야기가 아니다. 상식과 원칙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 모습은 '잘 먹고 잘사는 것', '그것도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다. 따뜻한 밥 한 공기에 대해 차별되지 않는 삶,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이었다. 상식이고 원칙이었던 것이다."  - 196
 
어쩌면 세상은 원순 씨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진영의 후보는 1억원 피부과 논란으로 시끄러웠고, 대통령 '내곡동 사저'가 드러났다. 알아서 척척척 그들이 엑스맨이 되어 원순 씨를 지원해주었다. 바람개비를 든 시민들은 썩어빠진 세상이, 1%를 위한 세상이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바뀌길 바라고 있었다. 그 열망과 희망이 원순 씨를 만들어낸 것이다.
 
SNS로 퍼져나갔던 투표 독려, 안철수 교수의 마음의 지원, MB정권에서 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나꼼수'의 지원, 그는 서울시장이 되었고, 아직 세상의 주인은 국민이고, 서울시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어쩌면, 그것은 작지만 큰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 지난한 과정을 함께해오며,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는 다른 길의 삶을 걷게 되었다. 원순 씨를 만나 급선회한 삶.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기쁨을 찾았던 삶. 그와 같은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을 내었기에 원순 씨가 시장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장 크게 남기고 가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모든 정치행위의 목표지향점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주체가 되어 모든 일들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으로 이번 선거를 치러냈다. 어느 한 정치세력도 아니고, 이념도 아니며, 돈도 명예도 아닌 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람'의 모습이 오롯이 전달되는 정치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내일의 희망을 현실에 구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268p
 
이제 서울시장이 된 원순 씨를 잘 지켜보며, 비판하기도 하고, 응원하는 일만 남았다. 그가 약속한 것들이 이루어져 나가는 서울시가 되는지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그에게 가졌던 꿈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기를 그가 증명해야 한다. 그가 말했던 희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서울시'가 되기를. 그리고, 이 서울의 희망이 전국에 퍼져나가기를. 저자가 원순 씨를 만나 삶이 바뀌었듯, 서울시민도 원순 씨를 만나 변화되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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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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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사회, 정치, 인물, 문화를 아우르며,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견해를 읽을 수 있었던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슬쩍, 시끄러운 이슈나 지나쳐버리고 말았던 현상들을 되짚어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듯 해서 보람있다. 잠시 잊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고개를 돌려버렸을지 모르는 사건과 문화적 현상들.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보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응집되어 있는 책이었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두고, 우리의 심리상태나 의식을 읽어낸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의식화'된 무엇은 우리 삶을 깊숙하게 파고들었으니 말이다. 왜 우리는 '김수한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슬퍼하고 아파했는가? 왜 정부는 욕을 먹으면서도 '미디어법' 통과를 강행했는가? 왜 우리는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우리가 연예인을 정치인보다 도덕적으로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막장 드라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상생활에서 수다의 주제가 되고, 뒷담화의 가쉽이 되는 하나의 이야기들은 '비평'이라는 것과 합쳐져 또 다른 시각을 도출해내고 있다. 우리의 '억압', '욕망', '뒤틀림', '변화', '행동 양상' 등 하나의 사건과 주제가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 사건과 주제들을 한 번 더 되씹고, 생각해 볼 시간과 기회를 준다.  

거짓과 불편함, 창피함, 진실의 회피를 감추기 위해 거대한 껍데기를 뒤집어 쓴 사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숨기고 있는 '키워드'로 작용한다. 지리멸렬한 외모 지상주의, 범죄자의 신상털기, 뒷 이야기 이슈화, 헐벗겨지는 연예인, 자살로 몰고 가는 사회의 비정함. 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중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선동하는 것도 모자라 방관하고 있는 모습들. 그의 글에서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었다.  

가벼운 주제를 무겁게 끌어내고, 무거운 주제를 가볍지만 진지하게 끌어나가면서 밀고당기기를 하듯 '문화비평'의 새로운 맛을 보게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의 글들은 눈을 좇아가면서 바삐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 숨고르기를 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기에 뜸을 들이듯 깨닫게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엄연한 범죄자를 예쁜 얼굴 때문에 미화하는 일은 외모지상주의로 인한 병리 현상이라는 것. 비판이 편한 건 언제나 그 비판의 도마 위에 비판자 자신은 높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자가 그 비판의 대상에서 빠진, 반성 없는 비판이야 말로 또 다른 병리 현상이다. - 83p <몸창-얼짱 신드롬은 무엇인가> 

부자 신드롬을 통해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대중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비단 부자라는 직설적 상징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대중적 갈구를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중략)... 미국형 신경제의 몰락과 신흥 계급의 몰락은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자본주의의 행복 담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모두 부자가 되는 사회보다는 가난하지만 모두 행복한 사회가 분명 더 실현 가능한 일임에도 부자의 판타지는 오늘도 리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소거시키기 위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147p <부자 신드롬> 

오늘날 불륜 드라마는 현실의 가부장제를 넘어가려는 중간계급의 (여성) 판타지다. 이때 중간계급의 (여성) 팥나지라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이런 드라마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무엇을 감추기 위해 발명된 스크린이라는 것이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감추려는  상황이 불륜의 징조를 유발한다. 그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란 '사랑의 부재'를 증언하는 자본주의의 물질주의다. - 75p <불륜 드라마,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여자 연예인들의 자살은 한국의 문화산업구조에서 일개 노동자의 처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연예인들의 운명을 드러내는 징후다. 이들의 자살은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연예계가 사실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관철되는 지점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회전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연예계라는 기계 장치도 더 빨리 돌아갈 수밖에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는 바로 속도다. 속도가 빠른 이가 모든 것을 먹는다. 이런 속도의 논리가 남성의 것이라면, 이런 남성의 욕망 구조에 복무하는 것이 여자 연예인들의 이미지다. 이 욕망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 276p <여자 연예인의 자살>  

물질주의와 자본에 이끌리면서, 수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과 가지려하는 욕망이 더 강한 게 사실이다. 우리는 물질을 욕망하며, 하나만 원하는 외곬수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본다. 세상은 변화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조금씩 우리를 옭죄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때다. 다양한 현상들이 하나로 귀착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결국, 자본과 물질주의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이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고 있으며, 심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알면서도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유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야 말로 비극으로 치닫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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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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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금융 위기가 세계 경제에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촘촘히 그물망처럼 얽힌 경제적 이익이 도를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의존도가 심해졌다고 할까? 물론 미국은 거대한 자본을 가진 국가이며, 신자유주의를 마음껏 받아들이고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익에만 눈이 멀어 마구자비 경영을 해온 그들의 탓도 클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여러 나라의 역사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점에 종착하게 된다. 미국.   

미국이 금융 위기로 허우적 거렸던 지난 2008년 이후로, 세계는 불안의 시대로 돌입했다는 것. 미국이 주춤하고 흔들리며 위기는 시작되었고, 그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것도 미국이 될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는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대공황이 일어난 지 80년이 지났다. 강하고 성공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모습이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다. - 374p 

결국,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어서, 그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인지. 허무함.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미국이고, 심각한 기후 변화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도 미국이다. 나라간의 긴장 상태를 부추기는 것도 미국인데, 무분별한 운영으로 경제 위기를 불러온 것도 미국임을 아는데. 결국 세계를 위한 최선의 희망이 미국이 될 것이라는 논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미국 군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힘을 발휘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경제 위기의 여파로 대외적으로 관련되는 데 훨씬 더 신중해지더라도 이러한 진공 상태로 들어올, 통합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은 없을 것이다. - 322p 

이것은 자랑스러움일까? 불안의 시대를 불러온 것은, 누구였던가? 하지만, 뻔뻔하게 이 사실을 '유일한 세력'이라는 말로 미화하고 있다. 이것은 꼭 위협처럼 느껴진다.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의 힘으로 너희들을 찍어 누르리라. 미국이 이기지 않으면, 결국 세계는 지고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가득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설득당하고, 세뇌당하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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