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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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세상을 만들고도, 반성하지 않는다. 어른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갓 어른이 된 그들에게 강요한다. 세상을 바꿀 힘은 너희에게 있다고. 누가 그런 힘이 반갑다고 말하는가. 필요없다. 이미, 만들어진 힘이 휘두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강요란 말인가. 대학 생활이 시작되자 마자 수많은 고민이 한꺼번에 밀려오는데 말이다. 

내 대학 생활은 어땠던가? 다행히도, 취업에 목매며 살진 않았다. 그랬어야 했는데도 말이다. 그것보다 급한 다르 무엇인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과도기 학번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거나. 2000년도 학번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누리면서 난 무엇을 해야할 지 몰랐다. 그랬기에 그냥 무엇이든 했다. 하지만, 지금 대학생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그것을 잘 알기에, 그 안에 속하지 못하면 낙오자라 말한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나는 인간은 삶에 대해 새로운 질문이 많아질수록 세상을 새롭게 살아갈 용기가 더 많아지는 존재라고 믿는다. 질문과 함께, 질문에서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인간은 새로운 사회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내가 학생들과 함께 나눈 위로이자 희망이며 격려이다. - 27p 

지은이 엄기호 선생은 어쩌면, 지금 대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선생이 아닌가 싶다. 수업하기에만 급급한 교수들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지 못하고 토익 점수와 스펙을 향해 달려가다가 멈출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더 큰 상실감에 빠질 수 있다. 그 마음을 위로하고, 힘을 줄 사람은 분명 그 시간을 거쳐온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래도 좋은 직장에 가야한다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이렇게 청춘을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쯤 있다는 것은 젊은 날의 위로이며, 격려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도 뭉클했다. 어쩌면, 내가 고민했던 것을 그들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고민하는 것을 그들이 고민하고 있다. 대학, 정치, 사랑, 학교, 돈. 그 안에서 허우적 거리며 누군가가 설정해놓은 기준에 들지 못하면 우울해 지는 청춘. 대부분 상위 1%를 원한다고, 나마저 그것을 향해 달려갈 필요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넌 그냥 네 길을 가도 된다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우리는 서로가 경쟁자일 뿐,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슬프다. 

입장이 다르다는 말은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그 질문은 그들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견주어보아야 한다.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내놓는 답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모독이다. - 26p 

우리는 모두 생각이 같지 않다. 그리고, 다 똑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다. 남이 원하는 대로 살 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우리는, 세상이 맞춰 놓은 길에서 조금 어긋난다 싶으면 불안해 한다.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조금씩 조금씩 생각을 잠식 당하며, 기준 안에 드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왔다. 

어찌 보면 학생들은 교육의 실체가 폭력이라고 교실에서 몸으로 깨달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교육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초월한 척하지만 권력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절달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기 때문이다. 훈육이란 말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학생들은 가장 믿지 않는 말은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교육이고 사랑이라는 말, 바로 그 거짓말이다. - 120p

수많은 체면을 봐왔다. 나의 공부도, 담임의 체면이 되고, 부모의 체면이 된다. 반의 체면이 되고, 학교의 체면이 된다. 공부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학만이 자유가 될 거라고 믿고 공부를 한다. 하지만, 대학에 왔을 때 거기서 또 불꽃튀는 싸움이 시작된다. 명문대가 아니다. 잘 나가는 과가 아니다 부터 또 시작되는, 서열, 계급, 그룹 싸움. 대학생들은 지쳐만 간다. 누구를 위해 그 싸움에 동참해야 하는 걸까? 그것 또한 깨닫지 못한다는 것.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참혹함이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는 게 참혹하다.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거쳤지만, 다시 시작되는 싸움은 많은 대학생들을 지치게 할 뿐이다.  

나는 숨을 쉬고 생각을 하는 인간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할 이유도 있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권리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며, 꿈이 무엇이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나는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육되며, 그 손길이 닿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가축일 분이었다. 야생으로 되돌려 보내지면 다시 울타리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가축이 되어버린 것이다. _ 명성-62p 

이 책 안의 청춘들은 솔직하고,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게 기쁘다. 아마도, 수업을 하며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로 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한 고민이라 할지라도, 고민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찾는 것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 힘을 끌어준 엄기호 선생에게 나마저도 고마워졌다.  

착취를 당하는 이들에게는 착취하는 자들이 눈도 돌리지 않는 것, 즉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이 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느끼고 향유했던 감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삽질과 열정은 다시 자본이 착취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는 '순수한 유희'에서 만난다. -234p 

그들은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말에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말하고, 가끔은 '잉여'인간인 것 같아 열패감이 든다고도 말한다.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스펙을 쌓아가는 게 힘들지만 어쨌든 애쓴다. 자신을 모르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안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있지 않다 하여도, 그들은 꿈이 있고 나아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잣대로 그들을 재단하는 것은 우리다. 그리고, 그런 기준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도 우리다. 그들은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 학원화 되는 학교가 아니라, 자신을 성찰할 수 있고, 사유하게 하는 학교를 원한다. 하지만, 외면하는 것은 우리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우리다. 

청춘, 그 단어 하나에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청춘 속에 있으면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청춘을 지켜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의 고민이, 그들의 두려움이 그들 것이라고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니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하면서, 꿈을 가지라고 하면서, 열정이 최고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께 고민해야할 문제다. 우린, 이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입학 시즌이다. 수능 점수에 맞춰, 인기 있는 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선배와 부모의 의견에 더 충실히 따르고, 대학이라는 간판을 따기 위해 눈치를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혼란과 혼란이 꼬리를 물고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원하는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입학 하자마자 스펙을 채우기 위해 정신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신들은 지나온 이라면 누구나 되돌아가고 싶은 청춘이라는 것이다. 빛나는 청춘 속에서, 고민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청춘아! 슬퍼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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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의 사랑학
목수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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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감정일까? 순수하게 사랑만 했던 때는, 언제였던가? 이젠, 사랑에도 많은 계산법이 따른다. 사랑 한 번 하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는 미래, 조건, 상황들을 따져보게 된다. 점점 구질구질한 계산법에 지쳐, 사랑을 했는지, 사랑을 하고 있는지, 생활이 되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이 한 둘은 아니겠지. 

사랑의 형태나 방법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에 따라 붙는 조건들은 천차만별이다. 정말, 이젠 조건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나도 오염되지 않은 '야성' 그 '야성'만으로 순수하게 사랑만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목수정은 <야성의 사랑학>의 서두를 열며 '한국남자들은 왜 더 이상 거리에서 그녀들을 쫓지 않나'라는 물음을 던진다. 잊고 있었으나, 기억나는 것. 방전되어버린 사랑들은 이제 자취를 감추고, 조건과 계산 아래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연애하는 사회는 행복하다.

이 명제를 앞에 두고, 우리의 사회는 과연 행복한 것인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도처에 장애물, 그래서 사랑을 멀리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역으로 그 장애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든 벽이 아닌지 말이다. 그녀가 말하는 야성의 사랑학이란, 관습도 조건도 고정관념도 다 벗어던지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세상을 살면서 어디 그런 사랑학을 가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랑을 하면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너무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삶에 바람처럼 찾아오는 사랑의 소용돌이가 내 심장을 두드릴 때, 눈앞에 평소 내가 그려 왔던 바로 그런 연인의 모습을 한 이가 지나갈 때, 준비된 훗날을 위해 직관이 말해 주는 신호를 무시하거나 생물학적 욕망만을 직업여성들을 통해 해소하던 사람은 영영 사랑을 느낄 수 없거나, 그런 건 소설에나 나오는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리게 된다. 돋아 오르는 열정의 뿔을 칼로 계속 베어 내기만 하면, 어느 순간 열정은 자라나기를 멈추는 것이다. 그 자라나는 열정의 뿔의 이름은 바로 '야성'이다. - 45p

먼저,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는 것.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하기도 전에, 사랑으로 가는 길을 닫아버리곤 한다. 그 설렘, 그 두근거림.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부정하는 것일까?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랑하고 싶다고.

일에 성공하는 이만큼 부러운 이도 사랑에 성공한 이라는 걸 잊곤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일도 필요하지만, 사랑없이 살아가는 건 황폐하고 메마르다. 우리 사회에서는 불쌍하게도 사랑을 배울 수 없다. 사랑을 배우기 전에, 성공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성공하는 법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냥 좋은 대학에만 가면 되는 거다.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 지위와 명예, 돈을 갖게 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이미 우리는 많은 예들 속에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결국,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고, 성공하는 법만 배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황폐하게 변한다는 걸. 

결혼에도 등급이 필요한 사회에서 연애란 사치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랑의 행위를 억압하는 사회에서 자라날 수록 사랑을 숨기느라, 감추느라 급급하다. 혹시라도 부모에게 들킬까봐, 혹시라도 누군가가 손가락질 할까봐. 그렇게 꼭꼭 가둬둔 사랑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목수정. 그녀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우리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힘껏 안아주는 남자와 사랑하길 바랐다. 그녀는, 애정이 결핍된 남자를 만나 크나큰 고통을 경험했다. 잘못 배운 사랑이, 건강하지 못한 사랑이 누군가의 인생에 치명타를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외친다. 사랑, 건강하게 하라고. 억압, 관습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그것은 남녀간의 연애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사랑, 친구와 친구의 사랑. 사랑은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므로. 우리들의 사랑은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수적 계산이다. 또한, 자율적인 이야기를 거부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도 힘들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억압하고, 부모에게 복종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사랑을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창조적인 교감이다. 반면 도리는 창조성, 자발성, 상대성을 거부한다. 원인이 어떠하고 개별적 환경이 어떠하든 인간이 지켜야만 하는 기본적 약속, 이유를 불문하고 가야하는 일이다. - 139p

정말 유림에서 쫓아와 개발새발 할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의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 어떤 형태로 묶여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성을 잃고 헛소리라고 할 수만은 없다. 많은 자식들은 부모와 정서적인 교감을 못한채 수많은 강요에 치여 억울한 듯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한 첫 경험을 부모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숨겨야 할 모텔 뒷담화가 아닌 건강한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유치한 어른, 유치한 부모가 되지 않는 방법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사는 것이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도, 아이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어린 시절에 가능한 많은 가능성을 접하게 해주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엔 그 어떤 실패를 할지라도, 따뜻하게 격려해 주는 것. 그러고선 재빨리 부모 스스로의 삶으로 돌아와 열심히 자신의 영역을 사는 것이다. - 202p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거리를 헤맨다. 룸싸롱에서 어린 여자를 찾고, 호스트바에서 어린 남자를 찾는다. 돈으로 육체적 욕망과 유희를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사랑에 목마른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기형적인 형태로, 변태적인 욕구로, 물질을 들이밀 뿐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지갑을 열지 않는 인색한 사람도, 어린 여자에게는 명품백과 차를 서슴없이 선물한다. 그녀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시간을 내준다. 사랑하지 않는 줄 알지만, 사랑 비슷한 것이 필요한 사람들. 한 밤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만 진짜 사랑을 찾았으면 좋겠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 나를 둘러싼 세상은 급속도로 변모한다. 지나쳐 버리고 잊어버렸던 모든 지점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상은 풍부해지고 아름다움을 되찾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반대로 해왔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을 변혁하고, 그런 후에 나에게 사랑과 자유를 허락하려 했다. 지금까지의 혁명이 언제나 깃발을 꽂고 나자마자 뒷걸음쳐져 갖던 이유이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은 과거에 권태를 느꼈던 바로 그곳에서 지금은 열정을 느낀다. 무의미하고 텅비어 보이던 세상은 순간 의미와 모험, 위험, 선물과 이로운 우연들로 가득 채워진다. 사랑의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처방이다. - 238p

자, 사랑을 하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사랑을 못하고 있다고 투덜거릴 필요가 없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이 만들어 놓은 사랑의 틀에서 놀아나기 때문에 사랑을 못하고 있는 이가 더 많다. 아이와 사랑을 하고 싶다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와 함께 놀아야 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믿고, 결혼을 하고, 섹스리스에 빠져 다른 사람을 찾는 사랑. 그런 사랑 하지 말자.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좋아해달라고 강요하는 사랑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이 없다고 투덜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배워야 할 무엇이라고 할 때,
우리가 찾는 사랑의 원형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아는 것에서
그 배움은 시작된다. - 2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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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많은 디자인 씨 -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김은산 지음 / 양철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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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디자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멋진 디자인을 바라고, 반짝이는 디자인에 대해 감탄은 하지만 우리는 디자인에 숨겨진 것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스티브 잡스는 휴대폰 하나로 세상을 바꿨다. 세상의 흐름을 바꾸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디자인. 이제 그 디자인의 철학도, 의미도 깊이 들여다 봐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비밀 많은 디자인 씨>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책이다. 디자인의 사회적 의미에서부터 디자인에 담긴 국민성까지. 단순한, 디자인에 대한 지식일 거라고 예상했던 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디자인은 일상의 행위에서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사용자가 공감할 수 있다. 나오토는 먼저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습관적인 행위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데에서 디자인을 시작한다. 기능과 형태의 논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사물을 사용하는 무의식적인 기억을 찾아내어 사물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한다. – 47p

생활 속의 디자인. 이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과제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더욱 섬세하게, 더욱 간결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젠 대량 생산하며 쏟아내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시대는 지났다. 대중들은, 조금 더 특별한, 독특한, 멋진 것에 지갑을 열고 있다. 이미 디자인은 넘치고 있고, 그 넘치는 지점에서 벗어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디자인. 그것에 주목하는 시대가 왔다.

현대 디자인 교육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디자이너 나즐로 모홀리나기는 디자인은 전문가들의 직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삶의 방법이자 삶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 60p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다다르고 나니, 디자인은 단순히 소비의 개념을 넘어선 게 아닌가 싶다. 삶의 방법이자 삶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디자이너 나즐로 모홀리나기의 철학에 공감했다. 인간의 행위, 삶 자체도 디자인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 철학, 목표를 따라 하루하루를 디자인 하듯이, 디자인도 책임이 뒤따르게 되었다.
서울 청계광장에 세워진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 이 똥 모양의 구조물은 작품이라고 하기에,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만큼의 비용 지불 가치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가 그의 작품을 받아들이고, 돈을 지불했지만 그것은 청계천 광장에 맞는, 청계천 광장에 대한 철학이 담긴 디자인 구조물인지 묻고 싶다. 소요된 경비만 35억 원 정도. 서울 시민들의 동의는 얻었는지도.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채 선택된 디자인은 디자인이 아니라 쓰레기가 된다. 이것은 작품을 만든 사람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그 디자인을 받아들인 자들의 태도도 닮겨 있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디자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관 관계를 고려하는 것도 디자인 과정의 일부다. 디자인은 사회적 가치와 무관하지 않다. 디자인은 사회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그러므로 디자이너 스스로 사회적인 역할과 윤리의 문제와 직면해야 한다. 디자인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디자인은 그저 지저분한 현실을 보기 좋게 포장하거나 깨끗하게 보이도록 외피를 덧씌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반부룩의 말처럼 그런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컨베이어’에 불과할 것이다. – 194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좀 더 심하다고 본다. 가끔 디자이너들은 혼동하기도 한다. 내가 디자이너인가, 오퍼레이터인가의 사이에서 말이다. 타협과 협의의 차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디자이너는 그저 배치만 해주는 사람에 불과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것은 디자이너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디자이너를 대하는 자세, 디자이너가 대하는 디자인의 자세가 달라지지 않고, 끌려다니는 것이 편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술적인 업무를 처리해주는 역할자가 될 것이다. 

유행을 만드는 디자인,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해 유혹적인 디자인, 소비의 형태만에 집중한 디자인도 있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디자인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코파티메아리나, 제이드 등은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디자인을 소비하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에 환경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소비에 집중된 디자인들이 점점 진화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디자이너’로 평가 받는 미국의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는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여느 선량한 시민의 역할과 다를 바 없다. 좋은 시민이란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자신이 속한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것이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더 많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197

이 책이 다른 여타 디자인책과 달리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디자인을 통해 문화와 삶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획일적인 디자인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의 삶이 이제야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디자인은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데에도 활용되고 있으며, 신념과 철학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무대가 되고 있다. 창의적인 디자인을 생각하기 앞서 우리의 생활을 고민하고, 사회를 고민하는 디자인. 디자인의 가치를 새롭게 짚어볼 수 있어서 의미있었다. 

디자이너가 아주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것. <비밀 많은 디자이인씨>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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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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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쯤 이었던 것 같다. 벌써, 13년 전, '동물농장'과 '1984'를 읽고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전해인가, 그 해, <동물농장>이 논술시험에 등장해 이슈가 되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읽어볼 수 있었다. 꽤 지났지만, 그의 상상력과 시대를 바라보는 날카로움, 세밀함에 감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왜 쓰는가>를 만나게 되었다.  

에세이를 읽다 보면, 개인적인 생각과 주관, 통찰력을 잘 알 수 있다. 작가의 취향까지도 말이다. 조지오웰의 몇 편의 소설에서 느꼈던 날카로움은 에세이에서도 잘 나타나 있었다. 그는 세인트 시프리언즈 예비학교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억압적인 학교 생활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버마에 인도 제국경찰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도 보여지듯, 그는 그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경찰을 그만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코끼리를 쏘다>라는 에세이를 보면, 버마 경찰로 부임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훔쳐볼 수 있다. 코끼리를 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도,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군중의 심리에 밀려 코끼리를 사살하게 된 조지 오웰.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 42p 

인간의 모순과 한계, 그것은 곧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주는 작지만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찰을 그만 둔 후, 노숙자, 접시닦이 등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고 방송국 직원, 중등학교 교사, 헌책방 직원 등을 전전한다. 그 직업들 속에서 그가 써온 에세이들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그러한 에세이들 중에서 29편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그는 파시즘에 맞서 의용군이 되어 싸웠고, 영국의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의용군으로 스페인전에 참전했지만, 부상을 입고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영국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영국, 당신의 영국>이라는 에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 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 - 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 107p 

공공연하게 부패와 타락이 계속되고 있으며, 허상과 가면을 쓰고 우아하게 구는 자신의 나라를 날카롭고 실랄하게 비판한다. 비유와 상징 속에서 풍자와 해학을 일삼으며, 좌로 우로 넘나드는 그의 비판은 무섭기까지 하다. 과연, 이시대를 살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렇게 쓴소리를 하고 있는지, 문필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 반성까지 해보게 한다. 

전쟁의 진실이란 무엇일까?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에서 그가 말하는 전쟁의 진실과 거짓. 결국, 거짓이 진실처럼 역사적 사실로 남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스페인에만 적용되는 말같지는 않다. 이미, 전쟁 속에서 많은 왜곡과 거짓, 그것들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미 기록된 진실된 역사마저 사실이 아닌 것처럼 바뀌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런 것들이 나로서는 대단히 두렵다. 이 세상에서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들곤 하기 때문이다. 결국엔 그런 거짓들이, 아니면 그 비슷한 거짓들이 역사가 되어버릴 개연성이 다분한 것이다. 스페인내전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 기록될까? 프랑코가 권좌를 계속 유지한다면 그가 지목한 이들이 역사책을 쓸 것이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있지도 않았던 러시아 군대가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며, 학생들은 앞으로 그렇게 배울 것이다. 반대로 파시즘이 결국 패배하여 꽤 가까운 미래에 스페인에서 모종의 민주 정부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전쟁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될까?....(중략).... 아무튼 결국엔 '모종'의 역사가 기록될 터인데, 전쟁을 실제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그 역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온갖 실리적 목적을 위해 거짓은 사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 148p 

진실을 말하는 힘, 세상을 보는 통찰, 그리고 그 안에서 상황을 고찰하는 능력은 실로 대단하다. 글을 쓰는 이가 어떤 자세를 갖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글로써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경험했던 모든 역사 속에서 나온 진실이리라. 부패와 타락, 부조리를 보아왔으나 수긍할 수 없었고, 힘있는 권력으로 자신을 감싸운 조국에 굴복할 수 없었고, 자신의 신념인 사회주의도 비판적인 자세로 보아왔던 조지 오웰.  

우리 시대의 정치적인 글쓰기는 거의 다 조립식 장난감 세트의 부속처럼 맞추어진 구절들로만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기 검열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솔직하고 힘 있는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생각해야 하며, 두려움 없이 생각하게 되면 정치적인 통념을 따를 수가 없다. 통념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는 동시에 너무 심각히 받아들여지지 않던 '신앙의 시대'에는 달랐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는 개인의 사고 영역 중 많은 부분이 그가 공식적으로 믿는 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 있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 223p 

글쓰기에 대한 그의 신념이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 눈치보지 않고 소신있게 풍자와 위트까지 갖춘 그의 글. 역사의 중심에 서서, 역사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다른 역사를 만든 것은 글의 힘이었다. 조지 오웰의 글의 힘은 대단했으며, 많은 반성을 하게 했다.  

그가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그리고 글쓰는 모든 이들에게 그 물음은 돌아간다. "당신은 왜 쓰는가?" 
글 속에 행동을 담지 못하면, 그 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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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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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책을 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 가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자신이 필요한 생각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 읽고 있는 책이 쌓여 생각의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책은 늘 곁에 있지만, 책장을 여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책장을 여는 순간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말한다. 

로쟈, 이현우 씨의 신간이 나왔다. <책을 읽을 자유>. 책 한 권에 몇 권의 책이야기가 있는지,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방대한 양과 생각, 책에 대한 평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십년 동안 써 온 서평이라고 하나, 서평 하나에 책 한 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서평 하나의 길이가 구구절절한 것도 아니다. 스마트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한다. 가끔은 얄미울 정도로 책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자제한다. 그 책으로부터 얻은 생각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서평들을 읽으면서, 내가 쓰는 서평 방식도 돌아보게 되었다. 구구절절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그처럼 생각을 정리하고, 몇 권의 책을 묶어 간결하고 단정하게 말하는 방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떨지. 

그가 소개한 책은 거의 인문학이다. 간혹, 문학도 있지만 그것도 고전이다. 생각을 하기 위해 책을 읽는 다는 듯, 성찰과 비판도 따라야 한다는 듯, 그의 거침없는 넘나듦에 기가 질릴 지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충분히 읽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 17p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이 읽었던 것일까? 아직도 '책을 덜 읽었고', 아직도 '충분히 읽지 않아서' 계속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태자면, 아무리 매일 매일 책을 읽어도 '완변하고 충분히 읽었다'라는 마음은 갖지 못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책은 쏟아져 나오고, 또 이미 발간되었지만 읽지 못한 책이 많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반영하듯, 한 주제가 끝나고 나면 '로쟈의 리스트'가 간간히 등장한다. 읽고 싶은 책의 리스트들. 그것만해도 언제 다 소화될지 모르는 책들. 그에게 책을 읽을 자유는 끝나선 안되는 절대절명의 사명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읽은 책들, 읽고 나서 여기 저기 기고했던 글들이 모이니 작은 주제로 묶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책 읽기와 글쓰기, 교양, 고전, 행복, 인간의 본성, 고통, 정치, 사회, 역사, 폭력 등 방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의 스펙트럼은 번역에 대한 아쉬움과 비인기 책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책을 읽을 자유>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는, 책에 대한 내용이나 이 책이 좋다 나쁘다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다.  책을 읽고 다른 시각,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사유를 도와주는 것이다. 성찰의 기회를 주는 것. 그래서, 그의 책읽기를 자꾸 쫓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안나 카레니나'를 이야기하며, 행복의 의미를 논한다. 갖고, 갖고, 갖고를 반복하고도 행복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과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또한 '흰쌀밥에 고깃국'만 먹어도 행복하겠다는 시절이 있었지만, 그 몇 배를 뛰어 넘는 풍요에 도달하고도 아직도 행복을 좇고 있다면 우리의 '행복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사유 말이다.  

우리가 적어도 북한보다는 더 낫다고 으스대고 싶다면, '무지개 너머'를 좋는 일부터 재고해볼 필요가 있따. '주홍글자'의 작가 호손은 이렇게 말했따. "행복은 나비와 같다. 잡으려 하면 항상 달아나지만, 조용히 앉아 있으면 너의 어깨에 내려와 앉는다." - 97p  

또한, 시대적인 흐름도 간과하지 않으며, 정치적인 생각도 가감없이 말한다. 권력에 대한 책을 읽고 쓴 서평에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 대한 우리 태도를 비판하기도 한다. '돈'과 '권력' 그 거대함에 복종하는 세계(우리나라를 포함)에 책을 빌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경각심, 무비판적인 태도, 맹신하는 습관 등을 바꾸기 위해선 책을 좀 읽어주시길 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다. 

책 속에 완벽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속에 철학과 사유, 성찰, 사건 등이 섞이고 머릿속에서 소화되기 시작하면, 자기만의 주체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무서운 폭발이고, 자아를 다시 꾸려 나갈 수 있는 힘이다. 책의 작은 날개짓이 세계를 뒤흔드는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읽은 책은, 그런 힘을 충분히 갖고 있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생각을 다듬어 나가는 것,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계속되는 물음, 그리고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 그것들이 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책 안에 많은 답안들이 모여, 생각의 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책벌레 이현우 씨의 생각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자유>의 가치는 크다. 하지만, 그가 읽은 책들을 훑고, 내가 책을 읽을 자유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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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지기 2011-11-16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읽을 자유"로 검색하다 이 글을 발견해서 제 블로그 글에 링크했습니다. 먼저 알리지 않고 히여 폐가 된다면 말씀해주세요. http://livros.tistory.co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