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8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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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있어도 부족한 게 돈이라지? 사람 마음이 그런 것인지? 아님 이 물질로 가득찬 소비 세계 앞에서 욕망을 억누르기 힘든 것인지. 종종 '돈'으로 인해 생겨나는 일들은 인간의 존엄마저 무너뜨리곤 한다. 나 또한 '돈' 앞에서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곳곳이 돈이며, 시간 시간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유쾌한 입담꾼, 인문학자,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님. 그녀의 유쾌발랄한 비판이 '돈'에까지 와닿았다.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된 이 기획은 '돈'의 욕심과 탐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반성이라면 반성이랄까? 하지만, 쉽게 돈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서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경제 교육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돈, 돈, 돈'이 판치는 세상이다. 땅 한 평도 돈으로 환산된다. 얼마나 더 많은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을지에 따라 위로 위로 뻗어나가는 건물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900원 짜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인들은 수백만 원도 넘는 가방을 뽐내고, 빚으로 산 집을 뽐내며 대출금 때문에 허덕이고, 뭘 하고 싶어서 돈을 번다기 보다는 돈을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세상. 이러한 상황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러한 비판이 더 설득력 있었던 이유는, 그녀야 말로 '돈'을 제대로 쓰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소비'는 그녀가 말하는 '순수증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욕심과 욕망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욕망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도통 쉬워보이지 않는다. 

   
  자본은 화폐의 그와 같은 속성을 극단화한다. 돈이 돈을 낳는 것, 생식하는 화폐, 그것이 곧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특히 금융자본은 이런 화폐의 ‘속성’을 최고의 형태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미다스 왕의 오래 전 예언까지 실현하고야 말았다. 금융자본은 한마디로 버블경제다. 버블이란 거품이요 신기루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었던 돈과 인간, 돈과 살림 사이의 최소한의 연관관계도 해체해 버렸다. 마침내 대지가 사라진 것이다!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는, 그리고 휴식조차 없이 무한을 향해 달려가는 화폐, 금융자본! 하여, 이 자본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순환계를 파괴하고 잠식해 버린다. 정신분석에서 죽음 본능이 하는 역할, 병리학에서 암세포가 하는 역할을 삶 전체, 세계 곳곳에서 수행한다. 요컨대, 자본과 생명은 본래적으로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 필시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 67~68p  
   

화폐, 이것이 부른 공포와 재앙. 갈곳 잃은 멧돼지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것은 멧돼지가 포악해서가 아니다. 그 깊숙한 곳을 파헤치면 결국 '신자유주의'가 파헤쳐놓은 자연, 망가져버린 생태계가 있다. 곳곳에서 파헤치고, 짓고 올리고, 팔고 돈을 불리고. 그것이 다 인 것처럼 모두가 재앙을 쫓는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멧돼지'라는 동물은 자본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이 뿐인가. 여기 저기 삽질을 해대며 파헤치고 있는 강바닥의 재앙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개발만이 경제를 살리는 길인지 정확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분별하다. 그것은 다 '돈' 때문임을 우리는 한다. 하지만, 막지 못하고 있다. 갈등 때리고 있는 것이다. 눈가리고 아웅한다면, 손에 돈을 쥘 인간들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이다. 개발로 땅 값이 오르고, 개발로 건설사가 배를 불리고, 개발로 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거라는 착각에 빠지고. 결국 그 '돈'의 망령은 아이들의 소비행태까지 잠식해 나가고 있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가 '외식'이 아닌 '회식'이 된 세상이 왔다. 정말 부모들은 등골빠지게 돈을 벌어도 모자랄 판이다. 초등학교만 입학하면 양손 가득 안겨줘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휴대폰도 마련해 줘야지, 생일 파티는 물론이고, 방학 때마다 돈으로 덕지 덕지 칠한 캠프도 보내줘야지. 남들 하는 거 다해주다가 지쳐 쓰러진다. 더 웃긴 건 아이들은 감사해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도 않는다. 그냥 부모로서의 의무이다. 일반화된 아이들의 생활에 맞장구 쳐주지 못하는 부모는 능력없는 부모일 뿐이다. 그게 서러워 빚이라도 내서 키운다. 그야말로 행복과 평화는 '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이 오면 더불어서 많은 것이 함께 온다. 밥과 공부,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활동, 기타 등등. 현대인은 이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그러니 평생 죽어라고 벌어도 항상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인복으로 해결한다면? 돈을 버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 151p  
   

그녀는 가까운 예로 <수유+너머>에서의 돈의 흐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밥과 공부를 함께 하며, 사람과 함께 '돈'의 필요함을 채우는 공동체. 돈의 노예로 살지 않고, 돈을 나누며 사는 공동체. 이것은 정말 유익하고 필요한 롤모델이다. 조금씩 조금씩 느리지만 천천히 이러한 공동체가 생겨난다면, '돈'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사람'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쉽게 벌고 싶은 돈'도 많은 문제를 자아낸다. 고생은 하기 싫고, 돈은 벌고 싶고, 뭘 해서 벌어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고생은 피하고 싶은 현대인들, 대학에서 죽어라 토익, 토플에 집중해 대기업에 들어가면 재미없는 일을 하며, 무차비한 경쟁까지 견뎌내야 한다. 무조건 견뎌야하는 '직업'은 절대 행복을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비교적 돈을 많이 벌 수 있기에 견딘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우리 사회에도 절대 유익한 에너지를 줄 수 없다.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돈'보다 '재미', '즐거움', '행복'에 집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생의 핵심은 몸이다. 생각은 가능한 한 내려 놓고 몸을 주로 써야 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몸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 그러면 그 에너지를 주로 정신적인 데 쓰게 마련이다. 여기서 태과/불급이 발생한다. 안 써도 되는 심력을 지나치게 쓰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중적으로 어긋난다. 몸은 너무 안 써서 탈이고, 머리는 지나치게 골몰해서 탈이고, 결국엔 몸과 마음 둘 다 파탄에 이르고 만다. 실제로, 요즘 청년들은 거죽은 멀쩡한데 속은 다들 곯았다. 성인병, 노인병이라 할 것들을 이미 10대, 20대에 앓고들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고생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데, 이건 정말이지 ‘작전미스’다. 거꾸로 해야 한다. 고생살이를 기꺼이 해야 이 모순들이 해소된다. 몸이 수고롭게 되면 마음은 절로 쉬게 된다. – 83p  
   

위부터 반성을 해야 아래도 변화할 텐데. 아니 아래가 변화해야 위가 반성하는 것일까? '돈' 때문에 거꾸로 가는 사회에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점점 삭막해져 간다. 우리는 안다. 돈이 행복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알면서 놓지 못하는 그 물질. 그것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처에서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미숙 선생님은 언제나 이러한 반성을 끌어낸다. 작지만 큰 변화를 일으킨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소유로부터 벗어나건 소유의 현장으로 들어가건,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자유다! – 소유에서 자유로! 존재의 무게중심을 이렇게 옮겨 놓을 수 있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순수증여라는 ‘비밀지’에 도전할 수 있다. – 194p  
   

물질 안에서 의식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태연해질 수 있다면. 내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돈의 순환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부록에 등장하는 친구들을 보며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기도 하다. 44만 원에 행복해하는 김해완은 돈에 미래를 두지 않고, 자신에게 미래를 둔다. 44만 원으로 유쾌하게 사는 방법을 궁리한다. 시성의 보리기금 보고서는 '돈' 자체를 뿌듯하게 만들어준다. '돈'이 진정한 능력을 뿜는 것은 역시 '소유' 보다는 '자유'라는 말이 공감가는 부분이다.

   
  우리가 삶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재충전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빈 그릇이 되는 것이며, 한쪽 손을 들고 축복을 받은 후에 다른 손을 열어서 그것을 통해 그 축복이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베어 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형선호 옮김, 황금가지, 1999, 298쪽) – 200p  
   

삶도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해야 잘 굴러간다. 꽉꽉 눌러담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뻥'하고 터져버린다. '돈'도 마찬가지 아닐까? 축적하여 뽐내는 '돈'은 무가치하며, 재미없다. 자신에겐 한없이 사치스럽지만, 나눔을 모르는 사람은 탐욕스러운 돼지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돈'에 대한 기본부터 다시 배워야 할지 모른다. 돈으로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 그것을 꿈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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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39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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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군침을 흘리기는 처음이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나도! 회먹고 싶어!"를 외치며 허기짐을 느꼈다. 거기다 보너스는 인생의 맛도 함께 느낄 수 있달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듯, 바다 근처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듯 행복해졌다. 그런, 생생하고 잔잔한 느낌은 나를 마음 따뜻하게 했다.

사람들은 때론 힘들면 여행을 떠나곤 한다. 마음이 허기져서, 상처받아 슬퍼서, 인생이 피곤해져서 떠나곤 한다. 마음이 공허할 때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다가 아닐까 한다. 겨울바다를 보고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람도 있고, 끝이 없는 바다 앞에 서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사람도 있다. 바다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거기다 더해 많은 것들을 준다.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바다는 과한 욕심을 내지 않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라고 한다. 그 베품 앞에서 우리는 또 겸허해지곤 한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에는 수많은 어류들이 등장한다. 작가 한상훈 씨는 안 잡아본 물고기가 없을 정도다. 그 요리법도 꽤뚫고 있어 맛깔나게 설명한다. 게다가 삶이 담긴 에피소드도 엿볼 수 있다. 각각 소재에 얽힌 사연은 마음을 잔잔하게 하고 코끝마저 찡하게 한다. 찡하게 짠하달까?

갈치, 삼치, 모자반, 숭어, 문어, 고등어, 군소, 볼락, 홍합, 노래미, 병어, 날치, 김, 농어, 붕장어, 고둥, 거북손, 미역, 참돔, 소라, 돌돔, 학꽁치, 감성돔, 성게, 우럭, 검복, 톳, 가자미, 해삼, 마지막으로 인어까지 읽다가 배부를 이야기가 가득이다. 

한상훈 작가는 '생계형 낚시'를 한다. 생계형 낚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물물교환을 하고 이웃에게 그냥 주기도 하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낚시인 것이다.

   
  물론 팔지는 않지만 생계형 아닌 것은 또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종종 주기도 하고 그리고 뭘 받으니까 물물 교환이다. 할머니에게 주면 마늘과 파, 고추를 주신다. 친구에게 주면 술을 사거나 또 다른 고기를 준다. 육지에 보내주면 돼지고기가 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옛날형 낚시인 것이다.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 주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전에는 고기잡이 다녀온 사람은 으레 이웃에게 나눠주곤 했다. "반찬이나 하소" 툭 던져주기도 하고 미안해서 안 받으려는 사람에게는 슬그머니 놓고 휭, 사라지던 모습 흔했다. 가난과 풍요를 분별없이 공유하는 것, 그게 공동체이다. - 58p
 
   

 그의 낚시 철학,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의 낚시가 더 좋아졌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그의 재미있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슬며시 웃음이 나는 대목이다. 

   
  예전에는 "고등어를 어떻게 회로 먹어요?"라고 주로 반응했다. 살아서도 썩는다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요즘은 제주도 직송 고등어회가 왕왕 텔레비전에 나온다. 때문에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들어보니, 역시나 비싸다. 하긴 비행기 타고 간 게 값쌀 리가 있겠는가.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 못 사먹는다면 방법은 하나. 낚아 먹으면 된다 - 78p  
   

얼마나 명쾌한 결론인지.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봤다는 말은 한 번도 못가봤다는 말보다 더 불쌍하다니. 비싸다고 불평불만 말고 바다로 나와 낚아 먹는 쉬운 방법이 있다니. 후훗. 자급자족하지 않고 소비하려는 현대인들에게 명치를 걷어차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에 맞물려 또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밤바다라 볼락 낚시를 나갔을 때, 두런 두런 대화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낚시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도 훔쳐듣고 그것은 또 바다 위에서 얻은 이야기가 된다.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사업을 안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내가 말했잖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잖소."
"먹고살기만 하면 뭐가 문제겠냐. 너무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게 문제지."
보아하니 형제가 밤낚시를 하러 온 모양이다. 육지에서 실패를 본 동생이 고향에 온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형님 돈은 어떻게 해서든 벌충해놓을 테니 걱정 마시오."
"......"
"못 갚으면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릴라요."
"너는 사업도 너무 서두르다가 말아먹더니 죽는다는 말도 꼭 그렇게 하는 구나."   - 104p
 
   

바다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바다에 나간 이들 중 사연 없는 이가 어디있을까? 사람 사는 곳에 바다가 있고, 바다와 함께 사람이 산다. 바다에 나와 삶을 털어내는 형제의 모습. 눈을 감으면 그려진다. 그 깊은 바다에 형제와 함께 서 있는 듯, 그리고 볼락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떻게 먹는 게 맛있는지, 어떻게 하면 잘 잡을 수 있을지 말이다. 사람 맛에서, 생선의 맛으로 넘어간다. 이런 재미가 있다.
 

   
  낚시는 물었을 때와 물지 않았을 때, 두 가지의 인간이 만들어진다. 낚아내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백지장처럼 하얗게 기억이 없다. 생각은 사라지고 몸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오로지, 도망치려는 물고기와 잡아올리려는 사람 사이 힘의 기우뚱한 균형, 줄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허용하며 녀석을 지치게 하는 긴장의 순간들만 이어진다. 낚시에 빠진 동료작가 한 명은 이 순간을 오르가슴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툭.
채비가 터졌다. 세상에 줄 끊어진 낚싯대처럼 허무한 게 또 있을까. 낚시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몸에서 피가 쭈욱 빠져나가고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을. 집안이 망하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절망을. - 174p
 
   

몇 번 바다낚시를 해봤다. 대어를 낚은 것도 아니고 자잘한 물고기들이 배좀 채워보겠다고 낚싯대를 문 것이다. 툭 끊어지는 경험, 굉장히 허무하다. 하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허망함과 같을까? 생계형 낚시꾼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겠지만, 그가 써놓은 감정이 어쩐지 잘 느껴진다. 아마도 글 사이사이 낚시를 넘어 바다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라는 그의  속삭임이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어무이 아버지에게 문어를 잡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어와 씨름한 아이, 새끼를 나은 고양이에게 노래미를 넣은 미역국을 끓여줬더니만 미역부터 쭉쭉 뽑아먹더라는 이야기, 시장에서 복국을 팔던 아줌마 이야기, 섬마을에 시집와 친정도 못가본 여인들의 이야기.

이 책은 어류들이 팔딱인다. 회를 뜨고, 탕을 끓이고, 얼리고, 지지고 볶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살아있는 이야기. 팔딱거리며 뛰는 물고기들보다 더 팔딱이는 사람 사는 이야기 말이다. 싱싱한 바다 안의 생물들, 싱싱한 바다 밖의 사람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도 따뜻해지고 즐거워진다. 그리고 군침이 돈다. 살아야 겠다는 군침, 먹어야 겠다는 군침, 잘 살아야 겠다는 군침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은 이 책이 주는 선물이며, 행복이다. 읽어보시라. 이 군침도는 이야기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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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6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이 글 읽고나니깐 슬슬 배가 고파오네요^^;;
생선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ㅠㅠ
좋은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ㅋ
 
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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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가 몸을 불태우며 노동 현장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외쳤던 게 언제였던가? 노동 현장은 1970년대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표면적으로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 안의 사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자꾸 쏟아지는 물음들. 한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을 궁금하게 만들게 한 이 책의 힘은 대단했다.

노동현장의 진실을 보기 위해, 대학생들은 위장 잠입을 했고 그 때문에 대학생들이 쫓기던 시절이 있었다. 숨기려 하는 자와 파헤치려는 자의 처절한 싸움. 그것은 진실과 더 나은 생활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어쩌면, 그때가 더 인간다웠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4천원 인생>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표면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다른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실상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는 우리는, 자본이 준 번지르르한 포장에 쉽게 속곤 한다.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그 이면에 관심이 없다. 그게 정말 현실이다.

용감한 기자 넷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뛰어 들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이런 프로젝트는 준비했던 것일까? 그 용기도, 생각도 대단하다. 생각만 있고, 용기내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그들이 준비한 프로젝트가 경이롭기만 하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것은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또 다른 상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더 소중하다.

이 책에서는 4가지의 노동일기가 등장한다. 아줌마들의 식당 노동일기, 젊은이들의 마트 노동일기, 불법 체류자의 노동 일기, 공장에서의 노동일기. 어떤 노동이 더 강도가 세다, 더 힘들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고통 받으면서 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이 쉬운 것은 아니다. 사무실에 앉아 하는 노동도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고, 외부에서 하는 노동도 또 다른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차이가 있다. 인간다운 대접. 노동을 하는 이들을 부속품처럼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대우. 노동의 대가는 터무니 없었다.

기자들은 한 달 동안 노동을 체험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벗어나, 현장 속으로 들어가본 것이다.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마음이 턱 막혀옴을 느낀다. 기자라는 신분을 숨긴 채 본, 그늘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한 현실이었다.


아줌마의 노동

식당일이 끝나면 집안일이 시작되는 아줌마 노동자. 빈곤의 악순환에서 자신의 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돈 때문에 덜 배운 아이들은, 엄마의 뒤를 따라 식당일을 찾아 나선다. 돌고 도는 것까지 더해서 제대로 아프지도 못한다. 휴일은 한 달에 2, 그것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다. 감정 노동까지 해야 하는 식당일. 고약한 사장은 잠시 앉아있는 짬도 주지 않는다. 북적대는 고깃집에서 고기를 나르고, 물컵을 나르고, 반찬을 나르고. 바빠서 잠시 잊으면 손님들은 그녀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12시간의 노동. 그녀들은 은행 일을 볼 짬도, 아파서 병원에 갈 짬도 없다. 떳떳하게 휴일을 요구하지도 못한다. 그녀들은 사회의 약자, 하지만 식당에 온 사람들에게는 제대로된 서비스를 해줘야 하는 노예일 뿐이다. 거기다 사장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굴욕적인 대우도 참아야 한다. 나는 반성한다. 고깃집에서 빨리빨리 달라고 아우성치던 내 모습을. 그녀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내며 화냈던 내 모습을. 그녀들의 고달픈 감정 노동에 한 몫한 내 자신을.

 
젊은이들의 노동

마트는 일상화된 곳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으며, 쾌적한 곳에서 장을 볼 수 있으며, 곳곳에 선 이들이 나를 대우해주는 곳이다. 대형 자본은 마트라는 거대 소비 시장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소비자들과 노동자들은 갑과 을의 관계로 만난다. 마트만 이기는 시스템. 업체들은 마트에 입점하기 위해 경쟁을 하고, 업체들에 고용된 젊은이들은 마트의 결정에 의해 노동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하루 종일 서서 물건을 사라고 외쳐도, 소비자들은 그들을 없는 이 취급한다. 생각해보니, 마트에 가면 물건을 파는 이보다 물건에만 관심이 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자리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속속 자리를 채우고 있다. 부당한 대우와 환경에도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자신이 못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자책할 뿐. 하지만, 그 부당한 시스템에 톡톡한 몫을 한 것이 바로 우리이다. 그리고, 자본이다. 노동하는 청년들은 사회의 피해자이다.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누릴 수 있었어야 하는 것, 좀 더 인간답게 대우 받으며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줬어야 할 몫이란 말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른다. 대형마트 곳곳에 서있는 그들은, 마트라는 자본에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

불법 사람의 노동

온갖 궂은 일은 다하는 노동자들. 열악한 노동 환경은 고사하고, 단속의 불안까지 감당해야 한다. 부당한 대우는 고사하고, 그들은 마음 편하게 노동하고 싶다. 그것이 정말 큰 욕심일까? 불법 체류해 낳은 아이는, 국적도 갖지 못한 채 추방당한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찾아오는 경찰들, 그들을 피해 지역을 떠나지 못하는 그들. 10년 이상을 한국에 체류하고도 자신들이 일하는 지역을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과연 단속되어야만 하는 존재일까? 죽도록 일하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일까? 피곤에 지쳐 자신들을 돌보지 못하는 시간.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만 같다. 우리는 그들의 노동을 고맙게 활용하면서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루 12시간 노동, 일주일 6일 동안 잔업. 환기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유해물질들을 켜켜이 몸 속에 쌓이고, 죽도록 돈 벌고 자신들의 나라에 돌아갔을 때는 병과 죽음이 그들을 반긴다. 인간답게 사는 것, 인권을 외치는 우리들은 결국 위선자였던 것이다. 조립식 작은 방에서 한 잔 술과 텔레비전으로 인생을 달래는 그들의 시간.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도 챙기지 못하는 마당에, 왜 불법으로 체류하는 그들의 인권까지 챙겨야 하냐고 소리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그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 알려 하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누릴 자격도 없다

기계적인 노동

사람이 기계가 되는 시간. 대화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다. 가만히 서서 자기 라인에서 해야 할 일만 반복적으로 하면 된다. 보람도 없고, 누가 잘한다고 칭찬해주지도 않는다. 자존감도 없고, 멍 때리는 시간만 늘어난다. 자기를 버리는 시간. 기계가 되어 반복된 일만 하는 시간. 바로 기계적인 노동을 하는 시간이다. 인간이 공장의 기계가 된다. 그렇다고, 정규직과 파견직의 대우가 그렇게 파격적인 것도 아니다. 공장의 기계가 되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잔업, 철야의 반복. 시급 4000원짜리 직장인에게 연애는 사치며, 벌어도 남는 게 없다. 그조차도 파견을 주선한 업체에서 주선 비라는 명목으로 착취해 간다. 하루 만에 질린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들은 인격 대 인격으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계 대 기계, 공장의 부속품으로 만나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들고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사치이며, 시간 낭비이다.

기자들이 몸으로 때우며보여준 노동. 몰랐다고, 이런지는 몰랐다고 말해서 끝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면서 외면하는 노동의 현주소이며, 진실이다. 그들은 기사를 연재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피드백을 했고, 그 관심만으로도 변할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들의 노력과 고된 시간들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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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의 구절이 가슴에 와닿네요.. 울면서 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저와 관련은 없지만,, 책이든 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면 서글프고 씁쓸하더라구요..
이 글로 인해 각기 다른 노동자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ㅋ
 
<청춘대학>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청춘대학 - 대한민국 청춘, 무엇을 할 것인가?
이인 지음 / 동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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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쁘고, 혈기 왕성하며, 생각이 많은 청춘. 우리는 그 청춘에 무엇을 하고 사는가? 한국에 사는 청춘들은 그 시간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그 시간을 '자신'답게 살지 못하고 떠나보내고는 후회하는 일이 많다. 생각을 키우고, 미래를 제대로 사는 힘을 얻는 게 청춘일진데 너무 쉽게, 보이지 않는 강요에 밀려 수동적으로 사는 게 우리들의 청춘의 모습 아닐까. 

한 청춘이, 자신과 같은 청춘을 위해서 이 책을 발간했다. 청춘들에게 조언을 해 줄 사람들을 찾고, 그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많은 쟁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이미 많은 책들과 글, 강의를 통해 알려진 분들을 찾아다니며, 그는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의문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질문은 가끔 원초적이기도 하다. 

이 책은 청춘에 대한 물음을 갖는 이들에게, 혹은 방황한 이들에게 필요해 보인다.  
김선우, 고미숙, 강신주, 박남희, 이택광, 조정환, 김시천, 고병권, 김미화, 홍세화, 구본형, 우석훈, 한완상, 고은광순, 임지현, 한홍구, 서동은을 만나 우리들의 시간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그가 발품을 팔아가며 인터뷰한 이 분들은 자신이 말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제대로 살기 위해 공부한 대로 살기 위해, 그리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해야할 지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그 무엇을 쌓아가고 있는 분들이다.  

   
 

 지각은 외적인 것이고 사유는 내적인 것이지만 이 둘은 맞물리며 이뤄지죠. 생각은 자기 삶의 표현이에요. 몸이 불편하고 자기 삶이 힘들면, 그걸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은 표정에서 무거운 삶이 드러나요. 이건 비유가 아니고 정말로 그래요. 그래서 사람의 말보다는 표정을 많이 보고 있어요. 때론 표정이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니까요. - 189p 고병권

 
   

 우리의 청춘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고 살까? 취업에 갇혀, 돈에 갇혀 점점 무거운 삶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잃어버린 채 그 뻘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청춘의 명랑함은 그들의 특권이다. 특권을 누리지 못하면, 결국 지나간 후에 땅을 치고 후회하며 살게 된다. 가장 명랑하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생을 살아야 할 청춘. 우리는 그때를 잘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이들의 말이다.  

이들은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바꿔나가려고 노력한다.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공부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모두 주체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사회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각과 사유가 맞물려, 자신의 올곧은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젊음이들을 독려한다. 생각한대로 살고, 말한대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지만, 그 속에서 얻고 알게 되는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청춘들에게 할 말이 많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곧 공부니까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번뇌를 앓는 영역은 종교인들에게 맡겨놓고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달려갔죠. 내 몸의 주인은 의사, 내 영혼의 주인은 목사님이나 스님이라고 보는 게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내 몸과 영혼의 주인은 바로 나예요. 나 자신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지요. 공부는 지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존재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길이에요. 여기는 외부가 없어요. 어디까지는 내가 하고 나머지는 스님과 목사님 몫이 아니에요. - 52p 고미숙  
   

 공부 좋아하는 고미숙 선생님은, 나 자신에 대한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공부는 끝과 시작을 함께 한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이루어내야 할 숙제. 공부로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살아갈 힘을 배우라고 말이다. 공부하지 않으니, 세상이 살아가는대로 살 수밖에 없고, 남이 살아가는 길을 쫓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제가 1980년대 대학 다닐 때보다 지금이 진보했다? 엄청나게 퇴보했어요. 요즘엔 아무도 서로를 돌보지 않잖아요. 겉보기엔 화려하죠. 퇴보한 만큼 겉모습이라도 치장해야 하니까요.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에는 지성인을 찾기가 힘들어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할 것 없이 젊은 친구들을 보면, 자기 삶을 긍정하는 것을 배우는 게 아니라 생존을 배워요. 걔네들에게 인문학 통찰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장애가 있어요. - 71p 강신주  
   

 뼈아픈 말이다. 생존에 몸부림 치는 청춘. 누구를 탓해야 할까? 아니 탓하는 게 의미가 없을까? 결국, 하나만 믿고 하나만 추구하며 살아온 세월은 시대를 퇴보하게 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화려하고, 자본으로 만들어낸 세상은 편리해졌지만 그것만 쫓는 청춘들은 더 큰 걸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청춘이 해야 할 진짜 공부는 놓치고 사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바뀌길 기다리는 것은 청춘의 자세가 아니다.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청춘의 자세다. 정부를 비판하고, 시민의식을 갖고, 사회구조를 비판하며, 그 사이에서 반성하고, 공부해서 알아내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청춘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귀담아 듣고 있는가. 귀담아 듣지 못한 세상이 된 것을 언제까지만 탓하고 있을 것인가. 대학에 가고도 대학생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은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가. 결국, 남들이 가는 길을 나도 똑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하찮은 변명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런 말을 하죠.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너무 모른다고"요. 맞아요. 우리는 우리의 잠재성을 너무 몰라요. 그런데 이 잠재성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그러무르 공부를 해야죠. 살아 있다는 것이 공부고, 해보는 것이 공부예요. 하면 할수록 정말로 잘하게 되거든요. 긍정도 고도의 훈련으로 얻어진 산물 같아요. 한 번 긍정을 잘하면 다음 긍정이 더 쉬워지는 것 같고, 그 다음 긍정은 훨씬 더 쉬워져요. 신의 경지에 오르는 단계가 100까지 있다고 하면 1, 2, 3단계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나머지 50단계는 하루아침에 오를지도 몰라요. - 197p 고병권  
   

이 한 마디로 청춘이 해야할 일들이 다 요약된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공무원이 되어 돈 많이 벌고, 안정된 삶을 산다는 비슷비슷한 꿈에서 벗어나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 시간을 가져야 할 청춘. 나를 사랑하고, 꿈을 꾸는 삶을 살기 위해선, 공부하고, 찾고, 갈구하라는 그들. 입아픈 말들이 청춘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눈을 뜨는 청춘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왜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보길 바란다. 경험과 깨달음으로 전해지는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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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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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凡人)'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삶 속에, 시간 속에, 역사 속에 도처에 널려 있는 차별과 무시,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던가? 아님 모른척 하는 걸까? 우린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그 기준이 도대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과 맞지 않다고 해서 배척하고, 차별하고, 무리에서 내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얼마 전 한 기사를 읽었다. 대도시를 벗어난 농촌에는 꽤 많은 수의 다문화 가정이 살고 있다고 한다. 국제 결혼이 별 특별할 게 없는 마을들이지만, 학교에서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따로 남겨 한글 공부를 더 시키고, 집에서는 엄마의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꿈도 못꾼다고 한다. 식구들은 영어를 가르치지 못할 망정, 베트남어, 태국어, 필리핀어가 웬 말이냐며 호통을 치고, 학교에서는 한글이 뒤떨어질지도 모른다는 편견에 아이들을 남겨 방과 후 공부를 시킨다고 한다. 참 배려없는 이기심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잘난 마음씨다.

<불편해도 괜찮아>에서는 많은 인권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검열과 표현의 자유, 인종차별의 문제, 제노싸이드.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인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나는 청소년을 거쳤으며, 여성이며, 노동자이다. 다른 나라에 체류할 때는 인종차별의 문제와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인권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깨닫고 있지 못할 뿐.

김두식 교수는 이러한 인권들을 영화로, 문학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래서 더 맛깔나고 이해하기 쉽다. 어쩌면 그는 인권의 대중화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인권은 쉬워지고, 가치있는 것이 되며 생각해야 할 문제가 될 것이다. 

청소년 인권에서 말하는 '지랄 총량의 법칙'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우린 누구나 지랄 총량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죽기 전까지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도 했습니다. 사춘기에 호르몬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닿는 표현이었습니다.  -18p  
   

어른들도 '지랄' 떨며 살지 않는가? '지랄' 떠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며 가슴아프게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며, 왜 청소년기에 미친듯이 날뛰는 모습을 찍어 누르려 하는가? 그 시기에도 자유는 분명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청소년기에 누려야 할 인권을 헤치고 있진 않는지. 옷도, 꿈도, 자신의 계획도 철저하게 통제 당하는 아이들에게 인권은 얼마나 목마른 것일까?

영화 300에서 배신자를 척추장애인으로 묘사한 것, 오아시스의 장애인 여성이 자주적이지 못한 형태로 그려진 것, 이렇게 비장애인에게는 별 생각없이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장애인에겐 크나큰 상처가 되리라는 것. 섬세하지 못한 마음에서 누군가의 인권은 침해받고 있다.
MPAA에 대한 진실, 영화 화면을 개인의 기준에 따라 자르고 그 사실마저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는 권력자들. 영화 '똥파리'가 보여주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만나는 가부장주의와 혈연주의를 벗어난 가족의 재구성, 밀양에서 만날 수 있는 기독교 안에서의 고통, 군대 안에서 박탈당하는 자유와 신념 등 알고 보면 경악할 정도로 우리의 인권은 여기저기서 침해당하고 있다.

결국,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며, 알려하지 않으면 어둠 속에 은폐된 채로 스물스물 우리의 정신을 좀먹는 권력도 있다. 얽히고설혀 복잡하여도 우리는 파헤치고, 항의하고 저항해야 많은 이가 다함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모두를 죽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 속에 살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내가 죽이는 자가 되고, 피해자가 아닌 것에 기뻐하고 사는 것만은 다가 아닐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것을 신념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가해자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냉혹한 완벽주의와 힘만을 추구할 뿐이다. 욕망만을 따라가는 사회에서는 인권이 무시되기 일쑤다. 소수의 행복도 생각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만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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