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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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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가 안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국가에 대해 진지하고 밀도있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과연 국가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는 국가에게 어떤 존재인 것인가? 국가에 속한 나는, 어떤 국가의 모습을 바라고 있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받아든 나는, 여러 가지 고민과 함께 본질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국가의 모습, 그것은 무엇이고,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국가는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태어나기 시작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문화와 정치, 제도, 환경 등 국가 안의 많은 요인들은 삶의 요소가 되어 여기 저기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국가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모여 지금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의 국가는,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국가인가? 이상적이며, 행복한 삶을 이끌어주는 국가인가? 라고 말이다. 자신있게 말한다. 아니다. 물론, 점점 발전하고 나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자신있게 행복론을 말할 수 있는 국가는 아니다. 다수보다는 특정한 소수를, 모두 보다는 특권을 가진 이들을 생각하는 게 국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는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합벅적 폭력, 공공재 공급자, 계급지배의 도구부터, 누가 다스려야하는 지에 대한 논의, 국가를 향한 애국심, 정치와 도덕적 이상까지. 철학자의 생각과 이론을 빌려 하나씩 짚어가는 기본적인 흐름은 사실 유시민이라는 정치인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분명, 훌륭한 국가를 고민하며 정리했을 법한 생각들. 퍼즐처럼 맞춰 나가는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들. 그가 만들고 싶은 국가의 상은 이 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현 정부, 아니 현 국가의 모습에 대한 비판도 말이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국가의 목적을 오직 하나로 규정한다.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그리고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으며 어떤 수단이든 다 쓸 수 있다. 이런 이론이 현실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한 감정인 공포감, 무질서와 범죄 또는 외부의 침략에 대한 본능적 공포감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 37p 

 국가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사회 질서 유지와 국가 안전 보장이다. 다른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가난한 아이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장애인과 중증질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복지지출을 확대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쁠 것은 없지만 국가가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 42p 

사실, 현 정부, 현 국가의 모습이다. 질서를 잡겠다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많은 폭력을 자행했고 많은 사람의 입을 막았으며, 귀까지 닫길 요구했다. 국가주의 국가론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자신들의 부패와 무능력함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야말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지만, 보호받아야 할 국민을 외면하고 있지만, 그럴듯한 포장으로 우매한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밀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었다. 개인은 공동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이다. 개인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 권리를 지니고 있다. 설혹 그것이 그 사회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제약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철학적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 66p 

국가주의 국가론과 맞설 수 있는 자유주의 국가론. 그리고 목적론적 국가론의 결합이 이상 국가로 한발짝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되는 국가. 유시민의 바람처럼, 나도 이런 국가를 원한다. 국가는 나를 억압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나 아닌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주체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 어떤 삶도 희생을 요구해선 안 되는 것이 국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이상일 뿐. 그 곳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지도자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잠깐의 자격을 얻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의 리더가 되면, 그 본분을 잃고 날뛰는 지도자들이 생긴다. 지식과 지혜로 다스려야할 국가를, 권력과 힘으로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다. 많은 독재자들이 무너졌고, 폭군을 자처한 왕들은 언젠가는 국민에 의해 권력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 민주주의 제도가 보급되기 전부터 이미 역사는 많은 것을 보여줬다. 국가는 국민을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민주주의는 자칫 '다시 실망하기 위해서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결점 때문에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 108p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지도자를 뽑지만, 지도자들은 번번히 우리를 실망시킨다. 유시민이 말한 '비극적 이벤트'는 계속 되고 있다. 이상적인, 누구나 행복해지는 국가를 만드는 데에는 분명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행착오라고 생각한다. 우리, 원하는 국가를 만들어 나가는데, 이정도의 시행착오는 필수라고 여겨두자. 미리, 나의 권리를 포기하여 언젠가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을 꺾지 말자.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국가는 일정의 자유에 제약을 가해야하고, 더 공정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유를 제제해야 한다. 국가는 '방만한 자유'를 그냥 두고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익과 불이익의 손익 계산을 따지기 시작하면, 국민의 삶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그 계산 속에는 국가라는 큰 테두리의 신념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이 먼저 개입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삶을 가능하게 하려면 훌륭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 완성된 인간은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이탈하면 인간은 가장 사악한 동물이 된다. 무장한 불의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 인간은 지혜와 탁월함을 위해 쓰도록 무기들을 갖고 테어나지만, 이런 무기들이 너무나 쉽게 정반대의 목적에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덕이 없으면 인간은 색욕과 식욕을 밝히는 가장 야만적인 동물이 된다. 국가는 정의를 세움으로써 미덕을 북돋워야 한다. - 203p  

국가는 나를 지켜주는 테두리이다. 나를 있게 하는 힘이고, 어디서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때로 강해지려고 발버둥을 치고, 힘을 갖기 위해 나쁜 짓도 저지른다. 개인은 '애국심'이라는 감정을 내세워 국가를 위해 희생하려 하기도 하며, 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갖기를 바라기도 한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을 쫓아다는 것은 아닐까? 국민 한 사람 소홀히 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주는 국가, 그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국민의 누군가가 국가의 부당한 대우때문에 불행을 겪고 있다면, 세계에서 슈퍼 파워를 가진 강력한 국가라도 이상적인 국가는 아닐 것이다.  

이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 정치인, 지도자가 합세하여 뜻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난다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지만, 그 목적이 이익과 부합되었을 때는 잡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더 나은 국가를 만들겠다고, 더 좋은 국가를 만들겠다고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매달린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하지 않고, 국가만 생각해서 누군가가 희생해도 좋다는 발상은 거기서 거기라고 본다. 인간의 행복과 존중을 미뤄두고, 더 좋은 국가를 만들겠다는 말은 어불성설.  

자, 이 책을 읽고, 국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숨쉬며 살고 있는, 이 국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에게 국가란 어떤 의미이며, 어떤 것인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잊고 있었던 것을 깨우쳐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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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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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그를 제대로 알기에 다소 아쉬운 듯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는 그의 실천적 행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정한 지식인은 말 뿐만 아니라, 말한대로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 대단한 행동가이며 열정적인 실천가였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했다.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 다양한 논제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것.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활동.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뼈가 숨겨져 있고, 그의 재치를 이해하려면 짧은 글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정신병원을 가더라도 권력욕 때문에 세계를 왜곡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자기가 잉글랜드 은행 총재라는 사람도 있고, 왕이라는 사람도 있고, 신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와 유사한 망상이 학식 있는 사람의 모호한 언어로 표현되면 철학교수가 출현하고, 감수성 풍부한 사람의 감동적인 언어로 표현되면 독재자가 출현한다.      - 권력 : 새로운 사회 분석  

인생에 맞서기 위해서 어떤 신념이나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겁이 많은 사람이다. 이런 태도는 다른 영역에서는 경멸받지만 종교의 영역에서는 훌륭한 태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영역이라고 해도 비겁한 태도를 칭찬하고 싶지 않다.  -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다 

설득과 강합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은 옳지 않다. 설득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대다수는 사실상 강압의 일종이다. 누구나 수긍하는 설득 방식 역시 강압인 경우가 많다.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지구는 둥글다"고 말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네가 어른이 되면 그 증거를 검토해서 너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증거를 검토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 전까지 우리의 주장은 아이들의 정신을 봉쇄하기 때문에 '평평한 지구 협회'가 제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쳐도 아이들의 정신은 동요하지 않는다. "코를 후비면 안 돼" "완두콩을 먹을 때 나이프를 쓰면 안 돼" 따위 우리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도덕적 훈계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완두콩을 먹을 때 나이프를 써야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받은 설득의 최면 효과 때문에 나는 그 이유를 따져보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 권력 : 새로운 사회 분석 

 그의 이런 짧지만 강력한 글들을 읽고 있다 보면, 세상에 보편적 생각이라고 정립된 잣대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토당토 않은 생각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일반적인', '보편적'으로 정립된 생각들과 점점 악화되는 '권력', '욕망', '교육'에 관한 이야기들. 모든 현상과 생각들은, 한 번쯤 생각하고 해체해보고, 재정립하는 훈련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 것도 러셀의 글들을 읽읽으면서이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하나의 관점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고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실천과 행동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민간한 쟁점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 권력에 대한 조롱은 단순한 듯 보이지만, 깊은 사고에서 일어난 발언이었다. 그의 많은 '말', '말', '말'을 읽으면서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과연 그를 알고 있는 사람 이외에 다른 이가 이 책을 접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였다. 물론 그의 행적이나 식견과 통찰은 유익한 것이나, 그를 알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나 싶다. 여섯개의 주제로 나뉘었으나 조각조각난 글들은 집중력을 떨어트렸고, 그의 행적의 사전 지식이 없다면 누군가가 퍼붓는 독설 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의 여는 말, 닫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를 이해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남았다. 

'인도주의' 그것을 중심에 두고, 실천적 행동가로 활동했던 러셀. 그의 불타오르는 열정은 누구도 막아낼 수 없었고, 신념에 굴복하지 않았다. 평화와 인권을 위해 뛰었고, 사상가, 철학자, 수학자, 교육 혁신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 되었고, 그의 생각이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행동을 보여주는 말, 말을 보여주는 행동. 그래서 그가 아름다운 것이리라. 책에 대한 아쉬움은 뒤로 접고, 그가 이루어내고 싸워낸 것들에 대한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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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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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그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아픈 순간들이 있었다. 하나의 멍에를 가슴 깊숙하게 묻고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울진데, 그는 그 고통을 하나 하나 차근차근 말한다. 그것은, 대변이다. 그만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고통을 가진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항변해주는 것, 그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디아스포라 라는 운명을 짊어진 그에게는 풀어내야 할 것들이 많다. 끊임없이 글을 쓰고, 토론에 참여하고,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도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기에, 그것이 자신이 해야할 역할임을 알기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에 나온 평론집 <언어의 감옥에서>는 조금도 무겁고, 진지한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고뇌의 원근법>에서 만났던 부드러움보다는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과 조국에게 실랄한 비판을 했던 글들이 모여 있다.  

'디아스포라'의 입장에서 써온 글이기에 이전의 책들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도 있지만, 처음 서경식이라는 사람을 접하는 독자라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와 만나게 될 것이다.  

국어 내셔널리즘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모어와 모국어가 같은 사람들은 언어 다수자다. 언어 다수자는 자신의 언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는 그대로 자신이 속하는 나라의 국어다. 오직 그것만이 표준이고 다른 표준적 언어는 없다. 재일조선인은 자신에게 비모어인 조선어를 아무리 잘해도 끝내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다. 표준은 언제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 - 41p 

그가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다수자 사이에서 살면서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언제나 다수가 될 수 없는, 그렇기에 아주 사소한 문제도 무시된다. 그것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르기에 언제나 참담하다.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파울 첼란, 프레모 레비, 아메리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나라의 언어로 산다는 것, 자신의 고통을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생각한 고통 이상이었다.

이 책의 평론들에서 줄곧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책임이다. 침략 전쟁을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일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나라의 책임 회피, 디아스포라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갖지 않는 국가의 책임 회피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가 잘못한 것은 국민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해서, 그 잘못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게 국민이다. 국가의 명령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으며, 잘못되었던 것을 바로잡고 사과해야 하는 것도 국민 하나 하나의 몫이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면, 국가에 속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국가나 국민이나 모두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하다. 지식인들 조차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괴변이나, 얼토당토 않은 딴 소리를 늘어놓아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은 지역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죄와 보상은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지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식민지 지배 책임의 부정이라는 방어선은 소위 선진국이 국제적으로 연계해서 깔아놓은 공동의 방어선이다. 거꾸로 말하면 일본에 조선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것은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전 세계쩍 조류에 부합하는 보편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 326p   

이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관심이 없는 '위안부' 문제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사죄, 그리고 합당한 보상. 하지만, 가해자들은 한 몫 잡으려 한다는 괴변으로 그들에게 더 상처를 주고 있다. 위안부로 고통 받은 세월을 보냈음에도 일본에 정착해 재일조선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소수자. 그들은 국민과 국가라는 커다랗고 어마어마한 괴물에 대항할 수 없다. 철저하게 봉쇄하고 비난하고 막아서는 가해자들. 겉으로는 화해했다는 듯, 합의되었다는 듯 이야기하지만, 결국 고통은 소수자들의 몫이다.  

소수자 쪽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이해를 받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수자(가해자, 차별자) 쪽이 소수자에게 그런 노력을 요구하는 것에는 나의 전 존재를 걸고 반대한다. 이는 차별구조가 온전되고 있는 이유를 피차별자 쪽의 노력 부족으로 전가하는 데 편리한 레토릭이기 때문이다. - 312p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다. 언제 풀릴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역사도 사람도 외면하는 그들과의 싸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싸움은 아직도 계속 된다. 이 책의 평론 중에 80년대에 쓰여진 글들도 있다. 21세기에 묶여서 나왔다는 것은, 그때 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 논의되어야 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와 국민의 경계, 국가의 책임과 국민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소수자의 고통과 다수자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들이 소수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지 생각해본다. 이것은 비단 디아스포라들만을 국한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모어와 모국어 사이에서, 재일조선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디에 서야하는지 혼란스러운 위치에서 다수자들의 무언의 강요는 그에게 담론을 이끌어낼 힘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게 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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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 1881 함께 읽는 교양 9
조슈아 아바바넬.제프 스위머 지음, 유자화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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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프로그램에서 침대의 집먼지 진드기를 보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침대가 싫어졌다고 할까? 완벽하게 청결한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그 곳에서 자고 싶지 않다는 생각.  

어릴 때, 같은 반 친구에게 '이'와 '서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이가 튀어서 옮을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과연, 옆에 앉아 있는 짝꿍에게 옮아버린 '이'.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바퀴벌레는 죽기 직전 알을 쏟아낸다고 한다. 여기저기 약을 깔아놔도 그걸 먹고 죽는 순간까지 알을 낳는다니 이것이야 말로 강력한 번식의 소유자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집단이 너무 많아지면 집단 간 압력을 줄이기 위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니 정말 무서운 녀석들이다. 생과 사를 이익에 맞춰 조절하고 있지 않는가. 다 죽어도 바퀴벌레만은 살아남는다는 끈질긴 생명력. 으악이다. 

지구 대기 메탄가스의 30퍼센트는 흰개미의 방귀 때문이라니, 얼마나 많은 흰개미들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까? 소리 없이 침투하고 눈에도 띄지 않는 흰개미가 갉아대는 나무. 나무 집에 사는 사람이라면 흰개미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세상에, 점보다 작은 개미들의 집단 파괴력은 어디까지 일까? 

얼굴에서 뭔가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든다면 모낭진드기와 옴진드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만다. 내 얼굴의 간지러움이 벌레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인가. 몰라도 되었을 법한 사실에 온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 이 은밀한 동거에서 도망치고 싶을 만큼 악소리가 난다.  

아~ 이 벌레들이여 어쩌란 말이냐. 그것들에 대한 정보도 좋지만, 무한대로 확대해 놓은 부분 부분 그들의 모양새가 무서움을 넘어 끔찍함까지 전달해준다. 이러다간, 방바닥에 앉을 때도 어떤 것들이 기어다니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풀 밭에는 무서워서 앉기나 하겠어? 내 이불 위에서 활개를 치는 것들을 상상하다간 잠은커녕 발끝으로 서 있어야 할 지경이다. 

잠시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도, 같이 있을 이것들은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몰라도 되었을 법한 사실과 맞딱드리고 나니, 무섭다. 하지만, 알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적을 알고 나면 적과 조금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불이 꺼진 방. 그들만의 소리없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자, 적을 만나보시라. 적이 무엇을 하는 지 알고 나면 적과 멀어질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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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발전사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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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3년간 수많이 들었던 단어는 바로 '발전'. 4대강도 그,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시작되었고, 지금 이나라의 대통령을 뽑았던 것도 발전이 이유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발전'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모든 일에서 '발전'을 말한다. 개인도 '발전'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투자한다. 여기도 저기도 '발전' 때문에 때려 부시고, 다시 세우고, 돈을 더 받고. '발전'의 늪은 빨아들이는 속도가 강해 빠져나오려 하기 전에 묻혀버린다. 사람들은 '발전'의 광신도가 된 것처럼 그것이 최고인 줄 안다. 자문한다. 그 '발전'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 너? 국가? 전 세계? 

'발전'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돈'이다. 바로 '자본'. '발전'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이 많으면, '발전'하기도 쉽다. 그것이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냥. 사람들은 '발전'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된 '돈'에 침흘리고, 세계 나라들이 '발전'하고 싶은 이유는 '돈'이라는 이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거기다 덤으로 '힘'도. 

이렇게 '발전'의 늪으로 빠져드는 길목 앞에서 <反자본 발전사전>은 '발전' 안에 숨겨진 개념들을 끄집어내며, '발전'의 모순과 파괴력, 비인간적인 면을 낱낱이 파헤친다.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일지도 모를, 무서운 진실들이 눈 앞에 드러난다.  

발전, 환경, 도움, 시장, 요구, 한 세계, 참여, 계획, 인구, 빈곤, 생산, 진보, 자원, 과학, 사회주의, 국가, 기술.  

이 19가지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이 좋다고 생각하냐고 묻고 있고, 하나의 기준으로 봐왔던 세상을 다르게 보라고 부추기고 있다. 1949년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새로운 발전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우리가 누리는 과학 진보와 산업 발달의 수혜가 저발전 지역의 향상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새롭고 과감한 사업에 착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자기들 중심적인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맞는 것처럼 인식한다.  

말은 인식을 정의한다.그렇게 해서 말은 다시 대상이 되고 사실이 된다. 저발전이라는 개념이 실재하는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인다. 저발전은 이 세상이 하나이고 동질적이고 단선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는, 지극히 서양적이고 수용 불가능하고 증명 불가능한 전제를 지지의 발판으로 삼는 비교급 형용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 48p 

누군가가 나서서 인식의 프레임이라도 짜준 듯, 우리는 '발전'에 목말라 있었다. 그것도, 수십년간 미치도록. 하지만. 그 '발전' 속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해본다. 결국, 다툼과 죽음, 미움과 시기, 거짓과 위선들이 아니었던가. 자연은 점점 황폐해지고, 환경은 점점 파괴되어 간다. 지구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을 아무렇지 않게 부시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른 채 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마저 돈으로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저발전 국가'에서 사는 사람은 낮게 보기 시작했고,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것은 경제 자원이나 서비스의 생산이 아니다. 그런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이나 다음 세대를 살찌운다. 가난한 사람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경제학자들이 자원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리 자기가 사는 향토에서, 고장에서 자원을 조달하는 실요적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 350p 

'발전'으로 충만한 강대국들은 도움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약소국'들에게 '인류의 구원과 평화'라는 아름다운 모토 아래 도움의 손길을 뻗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는 '도움'은 그리 순수한 도움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분명, 그 도움의 손길 아래 깔린 '요구'는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그들이 더 높은 '발전'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자원'이나 '환경'과 '인력'을 값사게 사용하면서 그것이 구원의 손길인 것인냥 생색을 부리기도 한다. 자기들의 기준에 맞춰 '부'와 '가난, 빈곤'의 개념을 나누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그 개념을 세뇌해 '발전'하지 못하면 불행하게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마약에 손을 댄 듯, '발전;의 형편없는 의미를 알아버린 사람들은, 늪에서 나올 수 없다. 

지혜를 가르치는 여러 학파에서는, 특히 불교처럼 아직도 융성한 종교에서는 존재의 목적을 자각의 획득으로 규정하며, 쾌락을 절제하고 절대로 하나의 가치만을 무한정 쌓지 않고 다양한 가치 사이의 균형에 주목하는 것을 행복한 삶의 비결로 본다. 물질적 결핍을 우리는 창피스러운 가난의 유일한 기준으로 여기지만 전통 사회에서는 그것은 다른 유형의 결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소한 측면에 불과했다. 사람을 정말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세레르족은 믿는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입을 옷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다." 세레르 속담은 그렇게 못 받는다. - 533p 

트루먼 대통령이 '저발전'이라는 개념을 내세웠을 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던 것은 아닐까? 분명, 그들의 말대로라면 발전이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행복해져야 하며, 윤택해져야 한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말이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단어는 이제 듣기만 오싹하고 냉정하고, 무서운 개념이 되어 가고 있다. 강대국이 더욱 강해지려는 욕망을 뜻하며, 부를 가진 이가 더욱 부를 갖고자 몸부림치는 개념으로 생각된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그러한 공포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발전'이라는 이면에 감추어진 많은 진실들은 알면 알수록 불편하지만, 알아야 한다.  

'발전'이라는 말을 내세운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발전'이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죽일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줬다. 얼마나 많은 자연이 파괴되고 우리의 터전에 망가져가는지 깨닫게 해줬다. 그 확신 없는 '성장'에 믿음을 가졌던 우리는 크나큰 배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래도 '발전'만을 믿는가?  

어제 MBC에서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다큐를 방송했다. 사람에 상처받은 이들, 도시의 바쁨에 넌더리가 난 이들, 자본이 싫어 떠나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작가였고, 사람이었고, 이웃이였다. 누군가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목욕탕 나들이가 행복했고, 지리산 행복학교에서 배운 글 한 구절에 행복했다. 함께 모여 노래부르는 게 행복했고, 봄을 알리는 새싹에 행복했다. 그들은 '발전'을 떠나온 이들이었다. 부유하진 않아도,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있었고, 궁핍하긴 해도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허망하게 쫓아온 '발전'이라는 늪에서, 당당하게 빠져나가 행복을 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를 고통받게 하고 이루어낸 '발전'은 '성장'은 온전히 행복할 수 없다. 모두가 파괴되어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그 늪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사람만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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