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오락가락하고, 올여름은 혹서기가 길지 않아서, 복숭아 농사짓는 어느 아는 분이 수확이 좋지 않다네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은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그런 법이지요. 

아, 요즘, 마기 님의 시를 보면, 좀 기분이 오묘합니다.
처음에 시 특강을 할 때만해도,
마기 님처럼 시를 써본 적도 없다는 분이 과연 시를 지속적으로 올려주실지...
어지간한 배짱으로 그렇게 시를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을 했더랬는데... 

정말, 일취월장, 괄목상대... 청출어람 청어람도 댈 바가 아닙니다.
마기 님의 시는 참 좋아요. 나중에 제가 좋은 거 몇 개 뽑아서 문예지에 보낼까봐요. ㅎㅎㅎ
오늘 '진주'는 정말 멋지던걸요. 기대하지 않았던 시가 올라와서 더욱 놀라웠는지도 모릅니다. ^^
2천년의 세월을 눈물로 참아온 진주의 이미지와, 클레오파트라나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수능 용어로 '서사'라고 합니다.)가 얽힌 멋진 시였어요.  

그런 뜻에서 마기 님께 선물을 하나 드릴게요.
나희덕의 '귀뚜라미'입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나희덕, 귀뚜라미)

아마도 시를 쓰는 이라면, 또는 글을 쓰는 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거 같습니다.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윗줄은 자기 시를 자기가 읽으면서 자신감이 없어지는 대목이구요.
아랫줄은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바람이지요. 

지금은 매미가 하늘을 찌르는 소리를 내는 시절이래요. 여름이죠. 지금같은...
자신은 귀뚜라미구요. 매미 소리 걷히는 맑은 가을이 오면... 자신의 울음도,  
지금은 숨막힐 듯 귀뚜르르... 낮게 갇힌 소리인 자기의 노래가, 가을이 되면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될 수 있을지... 

이런 의문없이 시를 쓰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신을 더욱 갈고 닦는 절차탁마의 시기를 거쳐야, 돌 가운데서 옥도 탄생하는 법이겠지요.
마기 님도 먼 훗날, 저와의 우연한 인연을 고마워하는 후기를 쓰기는 시인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강요 같애. ㅋ)
의문은 의문대로 묻어두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를 써 주시기 바래요. ^^
시쓰기를 즐기시는 마기 님이 되시길...  

작년에 한창 유행했던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그룹이 있었죠.
그의 '싸구려 커피'를 저는 참 좋아합니다.
서민적이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뭐 솔직한 노래였죠.
요즘의 청년 실업을 적나라하게 노래했는지도 모릅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하고 달라 붙었다가 떨어진다
.......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다 한모금
아뿔사 담배 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어제 한 잔 진하게 한 사람이죠. 복장은 추리닝(트레이닝 하면 좀 추리닝같지 않다는... ㅋ). 것도 파란 색 추리닝. ㅎㅎ
해장으로 싸구려 커피를 마십니다. 미지근한...
눅눅한 싸구려 비닐 장판이 우굴우굴 우는데 발바닥이 쩍~
아, 온몸으로 청년 실업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88만원 세대'란 짱나는 용어보다, 얼마나 온몸으로 쩍~ 합니까.
사오정, 오륙도 운운하더니, 이제 삼팔선을 넘어 이태백으로 전락합니다. ㅠㅜ
아, 우울한 88만원 세대의 우리 아이들이여...
학원 보내서 될 일이 아니에요. ㅠㅜ
(세면 년, 세까지 벌면 둑놈, 창업하려면 세란 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십대 반은 수...)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구분이 안 가는 장자적 삶을 사는 이 청년에겐,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상황이 옵니다.
해가 뜬다, 뭐 취직도 하고 인생 창창하게 푸른 하늘 보며 살아야 하는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뜨기도 전에 집니다. 취직같은 거 해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일자리가 없다는... 이태백의 비애. 

십 년 전, 한스 밴드의 <오락실>에서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된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형상화 한 데 비하면,
훨씬 더 슬픕니다. 어두운 미래죠.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까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엔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꺼 내꺼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오 너무너무 냉정해/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 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한스밴드, 오락실>

 

지금은 비록 미약한 존재인 귀뚜라미가, 가을을 기다리듯, 의지를 가지고 바람을 가지고 사는 일이 희망이겠지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이야기처럼,
마지막에 남은 놈, '희망' 말입니다. 

오늘은 더할 나위 없는 '절망'을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 언어의 마술사,
역설의 달인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를 몇 편 보겠습니다. 
'희망의 정수박이'는 들어보신 어휘인가요? 스님의 대표작 '님의 침묵'에 나오는 말이죠.  

1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4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5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6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7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읍니다
8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9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0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저는 학교 수업이 개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들이 너무 많은 수업을 하기 때문이에요.
개그맨들은 1주일에 한 번 웃기면 되지만, 교사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웃겨야 되거든요.
그치만, 웃기지 않은 수업은 실패한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맨날 개콘을 일부러 찾아서 봅니다. 아이들과 말이 통하기 위해서죠. (사실 제 수준이 그만큼이기도 하구요.ㅋ)  
근데... 시 특강 읽으시다보면, 별로 안 웃길 때도 많죠. ^^
성인 상대라서 좀 쫄아서 그래요. ㅎㅎ 

이 시는 10행으로 되어있는데요. 4/4/2 전법을 씁니다. 축구 용어지만...
우선 수비수로 도입부의 4행까지는, 서술어가 모두 <갔습니다> 입니다.
수비수는 뭐 축구에서 얼굴도 잘 안 나오죠. 늘 골 넣는 사람만 인정하는 더러운 게임 아닙니까?
4행까진, 어려울 거 없어요. 그냥, 우리 헤어졌어요~~ 이거죠. 

그 다음 4행. 8행까지가 박지성의 미드필더입니다.
수비도 하고, 공격도 이뤄지는 그야말로 축구의 최강자들이 접전을 벌이는 곳입니다.
5행에서 '역설'이 나옵니다.
역설, 기억 나세요? 두 가지 상황이 서로 모순이 되는,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하나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함께 놓인...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이런 상황 이해가 가십니까?
그이의 목소리만 들으면 세상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귀먹고 말죠.  

나미란 가수 노래 중에,  '사랑이란 묘한거야'가 있는데요. 딱 이거죠.
안 보이고, 안 들려요. ^^ 눈멀고 귀멀죠.
그리고 그이의 얼굴만 생각하면 머릿속은 온통 상상의 나래를 타고 퍼즐조각들이 돌아다니죠.
삶던 빨래 태워먹는 거 일도 아닙니다. ^^
지독한 사랑에 빠진 거죠.
근데, 일상 언어로는 '향기로운 말소리에 귀가 뜨이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일반적이죠.
이런 걸 역설이라고 합니다.
(한글 맞춤법에는 '님'이 아니라 '임'이 맞습니다. 고전이라서 그냥 님으로 적을게요.) 

그대하고 걸을 때면/ 나는 지나가는/사람들이 안보여/나의 눈에 가득 고인/그대 얼굴 하나 때문에

우리 둘이 속삭일땐/다른 사람들의/이야기는 안들려/내 귓가에 밀려드는/그 목소리 하나 때문에

사랑이란 묘한거야/모양도 없는 것이/살금살금 다가와서/내 마음을 채워주네

사랑이란 묘한거야/빛깔도 없는 것이/시시각각 변하면서/내 마음을 물들이네

우리 둘이 만날때면/나는 뙤약볕이/쏟아져도 안더워/우리들이 만날때면/겨울에도 나는 안추워<나미, 사랑이란 묘한거야>

6행에서 이별로 놀란 마음이 나오죠. 슬픔. 대놓고 슬픔.
그치만 7행에서 반전이 됩니다.  
이별을 쓸데없이 '울음, 슬픔'으로만 만들면 제 스스로 사랑을 깨뜨리는 결과가 됨을 이 화자는 압니다.
그래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희망의 정수를 만들죠.
회자정리 거자필반(만난 이는 이별하고, 떠난 이는 돌아온다)...
이런 윤회의 진리를 믿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두 줄. 이 부분은 최전방 공격수입니다. 독일의 클로제나 아르헨의 메시의 자리죠. 브라질의 호나우두나.
폼도 죽여줍니다. 앞의 4,4에서 패스해준 볼을 골로 연결시키고,
골을 넣고 세레머니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축구 선수의 꽃이죠.
이 시에서도 이 부분이 가장 화려한 꽃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두 줄이지만, 짧고 굵게! 강하게! 가는 겁니다.

전에 '깃발' 설명할 때, 아아~~하는 것은 반칙이란 말을 했는데요.
사실은, 한국의 시들은 향가, 고려가요, 시조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계속 저 4/4/2 전법을 구사하고 있거든요.
근데, 마지막 부분의 2행 앞부분에 감탄사를 넣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그러니, 마지막 부분의 아아~~는 퇴장당할 정도의 반칙은 아니라고 봐도 됩니다. ^^ (깃발,이란 시도 4.4.2 전법이거든요.)

또 나오죠. 역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안 보냈다... 함께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더 간절한 화자의 마음이 느껴지시죠?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부재, 님이 가서 현실에 없는 상황을 '님의 침묵'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님이 현실에 없다고 화자는 "굿바이, 세상에 반은 남자!" 이렇게 쿨하게 변하지 않죠.^^
님이 없지만,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사랑의 노래는 님의 부재를 둘러싼 화자의 마음을 계속 감싸고 있죠.
마치 향 연기가 번져서 향 냄새가 가득하듯... 

아아아~~~ 저는 저 마지막 구절에 참 애착이 갑니다. 
축구로 몰아붙이자면, 완벽한 드리블에 완벽한 슛으로 '골~~~'을 얻은 거 같습니다.
님의 침묵과,
스스로 이기기 힘든 사랑의 노래와,
그리고 님의 부재를 휩싸고 도는 나의 사랑 노래...
어쩌면, 종교적으로 승화된 느낌까지 나지 않습니까? 
그 사랑은 얼마나 깊고 큰 사랑일는지요.

만해 한용운의 일생으로 보아, 님을 조국, 또는 부처 등으로 해석하지만, 그저 사랑하는 님으로 봐도 멋진 시 아닌가요? 

모순되는 어휘들을 딱, 붙여서 잘도 써먹는 역설의 달인, 만해 스님의 다른 시를 보시죠.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어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한용운, 나는 잊고저> 

<남>은 일반적 진술이고, <나>는 역설적 진술이죠.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면 님 생각하는 거지만, 난 잊고자 한대요.
궁금증 유발 효과 만점이죠. 이게 뭔 말이래? 이러고... 

다음 두 줄은 사유를 설명합니다.
잊으려니 자꾸 생각이 나서, 임을 잊을 수 있기나 한지, 생각해 본 거죠. 

그 담 석 줄은 재밌습니다. 잊으려면 생각이 나고, 생각하면 또 잊히지 않으니, 잊으려 노력도 말고 생각도 안하려 해볼까... 
그 담 석줄두요. 내버려 두려도...
그리 아니 되고, 님 생각뿐이라고 커밍 아웃~ (뭔 스님이 이래 연애시를 잘 쓴대?) 

그 담 넉줄... 뭐, 잊을 수도 있어요. 구태여 잊기로 들자면... 잠잘 때나 죽고 나서나... 허걱,
못 잊는 단 말을 이렇게 쎄게... 하시는군여...  

마지막 두 줄... 또 아아~~ 뭐, 전통의 계승이니깐, 봐주자고 그랬죠?
사랑하는 마음, 그래서 생각나는 마음보다,
당신을 사랑해선 안 되는 상황, 또는 사랑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굳이 잊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 그것이 화자의 고통의 근원이네요.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무소(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잖아요.
사랑의 미몽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만 하니
눈 감을 밖에.<정지용, 호수>

참 이쁜 시죠?
한 줄에 다섯 자씩.
글자 수를 맞추려 노력한 표도 나구요.
그대 얼굴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화자는,
그대 얼굴을 손바닥 둘로 폭~ 가립니다.
그렇지만,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은 호수만 해서... 가릴 수가 없죠. 눈 감을 밖에...
에고, 그렇다고 가려진답니까?
만해 스님처럼, 잠과 죽음뿐이기로... 괴로운 거죠. ^^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문정희, 가을노트>

이별한 후, 마음은 '가을'이 되어버렸대요.
조그만 상처에도 우수수 옷벗는 나무처럼 춥고 외로워 떨었지요.
까만 씨앗처럼,
아직도 못다한 말과 못다한 노래가 많이도 남았는데,
사랑이 져서, 가을 들녘에 놓인 볏단같이 쓰러졌네요.  

지난 번, 강은교의 <사랑법>은 '실눈 뜨고 보는 것'이었잖아요.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는...
그 모든 걸, 실눈 뜨고 보는 자리.
그대 등 뒤에 있는 큰 사랑의 자리.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이 시에서 <사랑법>은 '조용히 물드는 것,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 죽을 때까지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좀 여러 가지여서 정리가 한 방에 되지는 않습니다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이별 앞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 들고 오그라 드는...
초 마이크로 나노 수준의 입자처럼 되어버리는... 그런 거요.
마음 속에 눈물이라도 번져 나가듯, 세상 모든 일에 슬픔이 물들어 버리는 마음
세상의 찬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감당하는 일...
그리고 사무치고 사무쳐서 죽을 때까지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가는 것이라고...
한용운 스님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역설이나,
강은교의 '실눈 뜨고 보기'에 비하면, 이 시의 화자는 훨씬 마음이 여린 사람으로 보입니다. 

뭐,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별의 상황에서 그렇게 의연할 수만은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목도 좀 센티멘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죠. <가을 노트>라...
하이틴이 열광할 법한 멜랑콜리...한 회색의 노트와 슬픔... 

마지막에서 자기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네요.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은 사랑... 눈에 보이죠? 형상화.
이별의 슬픔이라는 '추상'을 슬프고 앙상한 뼈로 '구체'화 시키기. 그게 형상화입니다.
슬프고 앙상한 마음만 남은 데 비하여, 뼈란 단어 하나가 가진 힘이 크죠? 

오늘은 이별에 대한 시를 몇 개 다뤘습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일들이야 일상다반사(스님들이 차마시고 밥먹는 것처럼 흔하다는)인 것이지만,
정말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못 만나기도 하구요.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자꾸 부딪치기도 하지요. 

'시'라는 것은,
만남, 또는 이별이라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마지막 행처럼,
당신의 침묵을 마치 그윽한 향연기처럼 휩싸고 도는 사랑의 힘 

무거운 눈물 대신
환한 웃음 한 번 주세요 <마기 님, 이별 부분> 

이별의 상황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던 스님의 구절처럼, 무거운 눈물 대신 환한 웃음 한 번 주세요~
이렇게 표현한 마기 님의 시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지요. 

그치만, 좀 더 직설적이고 시크한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떠나는 주제에 뻔뻔스럽다~  

이렇게 톡, 쏴주는 센스도 작렬할 수 있겠습니다. ㅎㅎㅎ 

연애시 전공 박사 스님의 시를 한 편 더 보시죠.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대로 말하는 것과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 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桃花)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 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 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 볕에 얼마나 바래서 백설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가도 마음은 붉어갑니다.
피는식어가도 눈물은 더워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언덕엔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한용운, 거짓 이별>

이번엔 '이별'을 애초에 거짓,으로 부정하고 나서네요.
우리는 지금 헤어져 있지만, '거짓 이별'의 상황이란 것입니다.
거짓 이별이니까, 그 상황은 곧 종료될 것이고, 둘이 짝 만나서 붙어있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지만 아무리 거짓 이별이래도, 이별은 이별이니깐,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아쉬움...
(에효, 스님 맞는 겨?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 운운할 때 알아봤어~)
시간이 흘러... 머리가 희어지고, 피는 식어가도...
(아, 거짓 이별인데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나 봅니다.)
그래도... 마음은 더욱 붉어 가고, 눈물은 더워간답니다.
이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리는 마음은 커지고, 진해지는 거네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요?
올해 수능에서 ebs를 엄청 강조하는데, 거기 해설을 본다면,
"이별이 끝나고 만날 수 있다해도, 또다른 삶의 그늘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뭐, 이러고 있는데요.
그 위에서 <거짓 이별>이 우리를 떠난다고 했으니, 이제 <만남>을 기대하게 되는 건데 말이죠.
독자의 기대처럼 <화려한 만남>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 상황입니다.
이별이 가고, 죽음이 옵니다.
이 죽음은 '개체의 생명이 끝남'의 의미이기도 하겠고, '부정적 상황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앞의 것으로 본다면, 이별이 끝나는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일 것입니다... 이렇게 풀 수도 있겠구요.
뒤의 것으로 보면, 이별이 끝나지만, 다른 어려운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구절일지도 모르겠네요.

아, 저의 시 특강은 [희미한 착각속에 화려한 오해]가 빚어낸 글입니다.
1. 저의 희미한 착각
   알라딘의 많은 분들이 시에 배고파 하실 거야. 
   내 개그를 읽으면 사람들이 킥킥 웃을 거야.
   글샘의 시 고르는 안목에 다들 감탄을 보내고 있을 거야.

2. 저의 화려한 오해 
   내 글을 읽고 많은 분들이 시를 즐길 수 있게 될 거야.
   내 특강이 올라오면 사람들이 반갑게 찾아 읽을 거야.
   마기 님도 꾸준히 내 특강에 화답하는 시를 올려 주실 거야. 

그렇지만, 혼자 착각하고 오해하는 헛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이 일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일반인들에게 유쾌한 시 특강을 하는 일이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아무 계획없이, 틈틈이 특강을 올렸고,
제 탓에 마기 님 머리만 하염없이 세고 있을지 모를 일인데요.
제가 몇 달 간은 글을 조금만 쓰려고 합니다.
뭘 좀 하려고 하거든요. 딴짓을... ㅎㅎㅎ
당분간 일주일에 한 번, 오늘처럼 금요일쯤... 올릴 계획입니다.
마기 님이 제일 좋아하실 소리군여. ^^ 

마기 님 시는 더 많이 올려 주셔도 좋습니다. 특강과 관계없이... 마기 님 시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에요.
저도 제 특강을 간혹 읽어보곤 하는데, 어떤 부분은 엉성하고, 어떤 부분은 저도 재밌게 읽곤 합니다.
계속 쓰다보면, 좀더 나아지는 구석도 생기겠죠.
어떤 때는 좋고, 어떤 때는 나쁜 글도 있는 법일테니깐요. 

피자에서 싫어하는 토핑을 다 골라내고 나면, 피자가 맛이 없어진답니다. ^^
싫어하는 토핑도 다 얹은 채로, 그대로 드세요~ (완전 강요 ㅋ)  

정희성의 <숲>을 엔딩 포엠으로 덧붙입니다.
나무들은 제가끔 서있는데, 우린 그걸 <숲>이라 부릅니다.
사람들도 제가끔 서있는데, 우린 <알라디너>라고 부르죠. ^^
알라딘이란 공간에 서있는 나무들이, 간혹은 <숲>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외롭게 지나치는 낯선 그대와 <숲>에 선 나무가 되고 싶은 저녁입니다.
(이거 뭐, 연애편지 쓰는 멘트 같어. ㅋ)
내친 김에, '낯선 그대'여, 사랑해요~
(아우, 소름돋았어요. ㅋㅋㅋ)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있더군
제가끔 서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면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정희성, 숲>

** 뱀의 발바닥 :  포이트리 poetry와 포엠 poem의 차이는, 
                        앞의 것은 <시>라는 장르를, 뒤의 것은 한편의 <시>를 가리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창동의 영화는 <한편의 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이 시>란 거니깐, 포이트리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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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번 특강,,,
엄청 웃고 또 울었어요.
금요일만 특강이 올라온다는 말씀은 웃을 일이면서 울음이 나기도 합니다.
몇 달에 걸쳐 뭔가를 하신다는데...잘 해내실거라고 믿구요, 쬐금 섭섭하기도...ㅎㅎ.
희미한 착각과 화려한 오해...는 착각과 오해가 아닐지도 몰라요.
착각과 오해라는 주제로 시를 써볼까나? 푸히히~

글샘 2010-07-31 09:56   좋아요 0 | URL
12월까지 시험준비를 좀 할 게 있어서요. 재미는 있지만 천천히 올릴게요.
착각과 오해도 좋겠네요. 시 주제로 ㅎㅎ

세실 2010-07-3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지용 시인의 호수. 참 예쁜 시죠. 이 시를 소리내어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응? 또 아련한 추억?? ㅎ
님 시 특강 참 좋아요.
근데 달랑 2편만 나를 위한 시 특강이었고, 그 담엔 계속 마기님을 위한 시 특강이라 이거죠?
(사람이 말야 치시하게 화답시 해주는 마기님만 예뻐하고, 시 못쓰는 세실은 무시한다 이거잖아.
뭐 또 딴 이유 있냐고..중얼 중얼 중얼.....하품!)

비로그인 2010-07-31 00:17   좋아요 0 | URL
같이 골룸~~하실래요?

세실 2010-07-31 06:14   좋아요 0 | URL
풋. 시러 시러.
나두 글샘님 놀리는 재미^*^

글샘 2010-07-31 09:58   좋아요 0 | URL
좋다니깐 고맙습니다. ^^
시를 열심히 쓰시는 마기님께 하는 강의인데요. 세실님도 같이 들으심 되니깐 삐지진 마셈.
무시하는 거 아니걸랑요. 딴 이유는... 비밀! ㅍㅎㅎ
세실님 놀리다가, 당했다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0-08-02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동안도 존경스럽다고 생각했었지만,
즐거워서 하시는 일이라는 한마디에 훨~멋져보이십니다요~

전 옛날에 6개월짜리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강의를 하면서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내가 힘들게 오랜시간 공들여 얻은 지식들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때 그 허허로움 때문에 책을 더 들이팠었어요.

사나흘 뜸했던 거 같은데,헐~특강 두편에 답시 두편이라니...3,4주 자릴 비웠던 것 같습니다~

글샘 2010-08-02 23:37   좋아요 0 | URL
아, 멋져보인다는 말이 젤 좋네요. ㅎㅎㅎ
이러면 착각과 오해가 심화되는 수가 있습니다.

음, 6개월짜리 강의를 하신 분이라... 수강생이 엉망이었던 모양이져. ㅋㅋ
저처럼 수준 높은 수강생을 두고 강의하면, 샘물이 솟는 것처럼 글이 퐁퐁 나온답니다.
그래서 제가 글샘, 아니겠습니까. ㅎㅎㅎ
3,4주나 자리 비우시면 출석부에서 지워버린다는... ㅎㅎ

pjy 2010-08-0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정어린 페이퍼인데 보면서 자꾸 드는 딴생각~
다람쥐가 귀뚜라미를 먹던가?ㅋㅋㅋ
아무래도 주말에 너무 돌아댕겨서 더위먹은 모양입니다^^

스님이 연애 시를 잘쓰는 이유는 신도들이 주저리주저리 말해도 찰떡같이 잘 들어줘서 내공이 쌓인게 아닐까요?ㅋ
원래 간접경험이 상상의 나래를 쓰고, 한발짝 떨어져봐야 제대로 보이는 상황이 많이 있잖아요^^
착한척 널부러져 있는 사랑시를 보면 쫌 답답합니다~
전 아리랑파라서 일단 가시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야되고! 덤으로 구관이 명관인줄 반성한뒤 돌아와야됩니닷!

글샘 2010-08-02 23:39   좋아요 0 | URL
다람쥐는 귀뚜라미를 먹습니다. ㅎㅎㅎ 쥐 종류는 잡식성이에요.
그런 때 있잖아요. 자꾸 별것 아닌 생각이 꽉 물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그럴 땐, 그냥 냅둬요~~~

만해 스님은 결혼도 했던 사람이에요. 따님이 한 분 계셨져. 근데, 그 따님을 일본놈 호적에 출생신고를 안해가지고설라무네... 호적도 없었다는... 그나저나 사랑시엔 달인 급이에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