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이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뚜렷한 이유는 모르겠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은 '참 바르고 정이 많던 아이'라는 것. 그런 것 있지 않는가? 하나를 하더라도 이리저리 재고 또 재고, 이걸 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까 머리부터 굴리고. 그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과감한 모습도 좋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도 멋졌다.

남녀공학은 광역시 통틀어 2-3개 학교에 불과했던 암울했던 시절, 평범한 범생이라 여고생을 만나는 어떤 기회조차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에 입학한 나. 그렇지만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3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하지 못했다. 두 번 모두 짝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지금도 친하게 만나는 내 동기와 후배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나는 고백조차 하지 못한채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서야 했다.

그 아이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은 지나서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92년 12월 겨울의 대천 엠티.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엠티 술파티 도중에 우리는 밖으로 몰래 나왔고, 그 추운 바다 앞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벽, 일이 있어 일찍 가야 한다는 그 아이를 따라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자연농원 눈썰매장에서 엉덩이도 다쳤고, 대한극장에서 엠마누엘 베아르의 '겨울의 심장'도 봤다. 그렇지만 사귀자는 나의 제안을 그 아이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나는 군대에 갈 예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에 가야 할 사람이 어찌 그런 무모함으로 사귀자고 했는지는 모른다. 처음으로 온 기회를 놓치고 싶었지 않았겠지. 우리 사이는 어정쩡하게 이어졌고 3월이 다 되었다.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지만 나의 제안에 쉽사리 입질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형이 쓰러졌다. 무서운 병에 걸린 것이다. 서울에 입원을 해야 해서 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 군대 입영을 6월 말로 연기했다. 형을 간호하고 잡일도 하면서 틈틈이 그 아이를 만났다. 어쩌면 형이 우리 둘 사이를 이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는 동안 점점 그 아이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 때 그 장소. 학교 안 연못 근처길을 함께 올라가면서 그는 사귀자는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표현을 둘러 둘러했다. 5월 초였다. 

생생히 기억나는 날짜 5월 22일.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과 학교 앞에서 술을 마셨고, 나는 그날따라 과음을 한 모양이다. 꼴에 집까지 데려다준다면서 나와 중곡동 그 아이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쭈욱 잠을 잤다. 누가 누굴 데려다줘야 할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나는 결국엔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토악질을 시작했다. 어딘가 비닐이 있었을까? 그 악몽같은 시간이 지나고 차에서 내렸다. 골목길을 올라가면서 나는 찬 바람에 술기운이 어느정도 가셨나보다. 갑자기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중곡동 어느 골목 안에서 토악질한지 30분도 안된 그 입으로 난 키스를 했고, 그 아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양치질은 커녕 물로 헹궈내지도 못한 그 입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첫키스의 경험을 공유한 우리는 아니 나는 그 순간이 황홀했다. 그날 밤부터 나는 그 때의 어렴풋이 기억나는 상황을 마치 바둑에서 하는 것처럼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 때의 그 느낌을 최대한 간직하려고 애썼다.

한달 후 군대를 가기 위해 부산 집으로 떠나는 기차에 나란히 앉았다. 드디어 천안역. 그 아이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 위해 내렸고, 나는 잠시 따라 내렸다. 그리고 그 짧은 정차 시간동안 우리는 플랫폼 안내판 뒤에서 어느 멋진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포옹신과 키스신을 연출했다. 지금도 내 기억 속 카메라는 마치 드라마 질투 마지막 장면처럼 그날 서로를 껴안고 있는 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 우리가 떨어져 있을 그 오랜 시간동안 이 키스를 오래오래 맘 속에 간직할테야..  우리 둘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두번째 키스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방위였다.  아니 단기사병이었다.

4주 후부터는 맘만 먹으면 매일 매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서울과 부산이란 물리적 거리와 차비라는 현실적 거리가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끊임없이 주고 받은 편지, 그리고 편지.

2001년 기록적으로 눈이 많이 왔던 어느 겨울날. 우린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어느 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지인들이 모인 성대한 피로연을 치뤘다. 난 또 쓰러졌다. 전문용어로 '장렬히 전사'했다. 서울의 모 호텔로 가는 도중 나는 또 토악질을 했고, 그 입으로 첫날 밤 첫 키스를 나눴다. 그게 끝이었다. 바로 꿈나라로 향했다. 우리의 첫날밤은 그리 허무하게 끝났다. 진짜다.

 

오늘도 그 아이에게 '실망이야' 란 소리를 들었다.  아직까지 나는 그 아이에게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자고 있는 첫째 아이 촉촉한 기저귀를 갈아주는 순간 발사한다. 요가 다 젖었다. 젠장.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참, 형은 힘든 투병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은 너무나 멀쩡하게 잘 산다. 결혼을 못해서 그렇지..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05-11-02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만적인 사랑얘기예요. 하지만 첫키스는 님만 황홀했을것 같은 느낌이.... ^^;;
두번째 키스가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2001년 그 눈많이 오던날 결혼하셨군요. 저는 그날 우리 예린이 임신해서 배가 엄청 불러가지고 주차장에서 우리집 서방이랑 차에 앉아 음악 틀어 놓고 눈구경했던 생각이 갑자기 나네요. 헤헤~~

검둥개 2005-11-0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의 댓글에 추천을 하고 싶어요. ㅋㅋㅋ

너무 감동적인 로맨스에요. ^ .^ 근데 왜 저는 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문장에서 자지러지고 마는 것인가요!!! 아참, 겨울의 심장 그 영화 좋지 않던가요? 전 고등학교 때 친구랑 가서 봤는데. (재미 없다고 쿠사리 진짜 많이 먹었더라는 ㅎㅎㅎ)

줄리 2005-11-0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키스 정말 영화같네요. 진짜가 더 영화같기도 한건가요. 남 첫키스 이야기들이 왜 이리 재밌는지 모르겠어요.^^

인터라겐 2005-11-0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남들은 다들 로맨스 소설 쓸 분량이 나오는데 .. 으 지는 너무 허무하게 결혼을 했구만요...

진주 2005-11-0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보기 드물게 순진한 총각이었고마난. 첫키스의 여인과 결혼했으니.
늘 행복하시길 바래요^^

엔리꼬 2005-11-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맞아요.. 지금도 계속 투덜대요.. 내 첫 키스 돌리도~~ 를 외치고 있죠.. 그 눈많았던 나날들을 기억하시네요.. 반가워요.
검둥개님.. 뭐, 감동적일 것이야 없고요.. 겨울의 심장을 기억하시는 분이 또 계시니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개봉된 이름은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포레의 시실리안느 바이올린 연주곡이 제 귓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다시 보고 싶은데 dvd가 안나오네요.
줄리님.. 음. 제 기억속에는 영화같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별로 안멋있었을 수도 있어요.. 원래 키스 이야기가 재밌지 않습니까? 하하
인터라겐님.. 님은 이제부터 추억을 켜켜이 쌓아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야 이제 애 낳고 로맨스와는 담을 쌓았으나 님은 아직 앞길이 창창하지 않습니껴?
진주누님.. 요즘 총각은 아니었죠. 이미 10년 전이니.. 이번에 삼성경제연구손가에서 발표한 자료 보니 저도 가까스로 X세대에 속하더군요. 그럼 신세대인가? 후후 행복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urblue 2005-11-0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첫키스, 첫사랑과 결혼하신 분이 또 계시다니.
영화같은 얘기, 잘 읽었습니다. ^^

biseol 2005-11-02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서재 마실을 오지 않고,
기회가 되어도 플라시보님 서재에만 인사해오다
뒤늦게 서림님께도 인사드려요..(꾸벅)

서림님은 어찌하다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즐겨찾기를 한 것도 최근의 일.. ([펌] 한 초등교사의 일기를 보고 이전 글도 읽어 봐야겠다고 결정)

어느분의 댓글에 소리없이 즐겨찾기한 분이냐고 서림님이 물으셨을 때
혼자 움찔..ㅋ

바쁜 아침 시간인데 로맨스 소설 읽었을 때처럼
가슴이 간질간질해서 님께 첫 댓글을 남깁니다..

인사한답시고 말이 많아졌네요..
담에도 눈인사 찡긋! 하겠습니다.

조선인 2005-11-0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악질한 입으로.... -.-;;

가시장미 2005-11-0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곡동 어느 골목 안에서 토악질한지 30분도 안된 그 입으로 난 키스를 했고, 그 아이는 거부하지 않았다. -> 으하하하하. 역시. 로맨틱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군요.
형. 약속대로 제대로 깨주셨네요. ^-^; 근데. 참....... 은근히..... 낭만적이네요.
그런데. 지금도 그분이랑 함께 하시다니. 너무 행복하시겠어요. 으흐흐흐. ^-^
첫키스의 추억을 되세기며 지금 함께 하는 사람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또 지금의 생활에 활력이 될 수 있었으니. 저에게 감사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ㅋㅋ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엔리꼬 2005-11-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 이 것이 영화화된다면 흥행참패할 것입니다. 물론 얼마나 각색하느냐에 따라 누가 연출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저희 연애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아요..
스미레님.. 반갑습니다. 최근에 즐찾이 몇명 늘어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즐찾을 하게 되었을까 정말 궁금했었는데 커밍아웃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님의 서재는 너무 썰렁해요.. 많이 많이 채워주시길.. 가슴이 간질간질하다는 느낌이 어떤걸까요?
조선인님... 그게 사랑 아니겠습니까? 지금이라면 못해도 그때는...
가시장미님... 덕분에 저도 추억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사랑이랑 이어진다고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닐겁니다. 현재가 중요하니깐요.. 그리고 지금 첫사랑이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추억에 잠기는 것도 나름 운치있지 않나요? ㅎㅎ

moonnight 2005-11-02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눈물이 글썽하게 만드는 이야기네요. 읽기 아까울 정도로 예뻐요. ^^ 마지막에 형님께서 지금 건강하시다는 멘트 남겨주셔서 반갑습니다. 다행이에요. ^^

oldhand 2005-11-0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열의 눈길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있게 첫키스의 추억을 회고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셨군요. ^-^ 잘 읽었습니다. 흐흐.

icaru 2005-11-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때 그 아이" 분이...지금의~ 우아!!
서림님의 글을 따라~ 92년 대천 엠티로 낭창낭창 걸어들어갔다가 나옵니다~ 우아~

울보 2005-11-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너무 멋져요,정말 형님에게 잘해드려야 겠어요,,형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운명이 빗기어갔을수도,,,,

엔리꼬 2005-11-0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눈물까지 글썽거리시다니.. 황송하옵니다.. 늦은 밤 잠깐동안 글 썼을 뿐인데... 읽기 아깝다는 말은 더더욱 황송하옵니다.
oldhand님.. 흐흐 특권은 가졌지요.. 그렇지만 그 아이 만나기 전에 흘려썼던 일기장은 집안 어느 곳 꼭꼭 숨겨진 곳에 있답니다.. 워낙 정리를 안하는 아이라 별로 들킬 염려가 없어요..
icaru님.. 요즘 대천은 너무 변했더구만요.. 예전만 해도 다들 민박집에 갔는데, 요즘은 콘도로 가는 경우도 많다죠? 얼마 전 둘이서 대천 다녀왔어요. 그 때를 회상하면서..
울보님.. 네. 그런데 연애질 하느라 사실 형님 많이 돌봐드린 것도 없어요.. 우리 엄니만 고생을 하셨지요. 형님 아니었으면 그때 헤어지고 더 멋진 여자 만났을 지 누가 압니까? (돌 날아오는 소리 슝슝~)

로드무비 2005-11-0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십니다.
첫키스의 여인과 결혼, 어여쁜 아이 둘!^^

형님도 건강하시다니 정말 다행이고요.
(그런데 슬그머니... 형님 춘추가? 궁금.)

엔리꼬 2005-11-0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제가 생각해도 장합니다.. 형님의 춘추는 로드무비님보다 아래, 저보다 위 입니다. 대략 30대 중후반..

날개 2005-11-0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라고 부르시는 뉘앙스에서 애정이 폴폴 느껴지는군요..ㅎㅎ

마태우스 2005-11-02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버이트 후 키스...영화에만 있는 줄 알았어요^^ 서림님 멋져요!

엔리꼬 2005-11-02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폴폴 이란 단어가 한참 제 마음속에 머물다 갔어요.. 폴폴.. 그 아이라고 하기엔 덩치가 좀 큽니다. 쩝
마태우스님.. 많은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과연 여자측에서도 이 키스를 멋졌다고 기억할까요? 과연?

sweetmagic 2005-11-04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뒷북 감동하고 있는 매직...

엔리꼬 2005-11-04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반갑습니다. 누추한 제 서재에 다 방문해주시고.. 님도 연애 잘 하고 계시죠? 멀리 떨어져 있단 말 들었어요.. 이쁜 사랑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