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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보물 상자 (반양장) - 작은동산 1 ㅣ 작은 동산 7
메리 바 지음, 데이비드 커닝엄 그림,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울창한 숲과 초록빛 언덕 위의 산딸기 색 외갓집'
이렇게 묘사되어있는 집은 주인공 남자아이 잭의 외갓집이다. 내 아이들이 기억할 외갓집은 이런 풍경화 같은 외갓집이 아니라 복잡한 시장을 걸어들어가 좁다란 골목을 끼고 있는 2층집이다. 아랫층은 장삿집이고 2층으로 올라가는, 역시 좁다란 계단을 올라가서 좁은 입구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면 외할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서 문을 열어주는 집이다.
작은 액자에 담긴 한편의 긴 서정시처럼 아기자기하고 고운 글과, 색감을 한톤 낮춰 아련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삽화만으로도 이 책은 우리의 마음에 위안을 준다. 이 이야기는 '가족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3대가 함께 보면 좋겠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슬픔을 함께 한다는 것,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 그보다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추억의 공유라고 생각한다. 기쁜일이든 궂은일이든 함께 하는 기억들, 그 기억들을 어떤 상자에 고스란히 담아 간직하고 물려줄 수 있다면 그 끈끈한 유대감이란. 그런 돈독한 유대감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떤 사회집단에 속하더라도 자신의 역량을 자신있게 펼 수 있는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한다.
건강했던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예고도 없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게된 외할아버지는 점점 기억을 놓치는 일이 많아진다. 옆에서 그걸 안타깝게 지켜보며 손자로 하여금 그런 할아버지를 돌봐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는 외할머니는 지혜롭다. '추억상자'는 원래 잭의 외증조할머니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역시 가정에서 피어나는 미소에는 여자의 몫이 큰 것 같다. 슬기롭게, 다정하게 그리고 분별있게.
'추억상자'는 '가족끼리 겪었던 행복했던 순간이나 집안의 전통이 서린 물건들을 담아두는 특별한 상자'를 말한다. 외할아버지는 노을진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보시다,
"집안의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상자를 채우고 소중히 보관하면, 나중에 나이 많은 어른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추억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겠지?"
이렇게 아직은 다 크지 않은 손자에게 말한다. 자신의 병을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는 때때로 가물거리는 추억의 자락들이 못내 안타깝다. 이 액자글과 나란히 있는 삽화는 주황색 하늘과 짙푸른 초록의 숲이 상당히 대비되어 보인다. 이 두가지 색은 대비되면서도 서로 조화로운 색이다.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외조부모는 그윽한 눈으로 노을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고 손자는 그런 분들을 고개를 갸우뚱해선 보고 있다. 테라스의 울타리난간과 이들의 긴 그림자가 테라스 마룻바닥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듯 늘어져있다. 평온하다.
살아가는 힘은 시종일관 새로 생기는 것들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날 아주 사소했던 추억들을 손에 꼬옥 쥐고 그걸 되씹으며, 흐뭇해하며, 그렇게 세월을 엮어간다. 추억은 당시엔 아무리 쓰고 모진 것이어도 세월이 그것을 굴리고 굴려서 예쁜 모양이 된 조약돌처럼 만들어준다는 것에서 잇점이 있다. 더군다다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들이 추억상자에 담긴다면, 팍팍한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이런 건 미래지향적이지 않다고? 혹은 너무 나약한 심성 아니냐고?, 이런 책보다는 지식을 줄 수 있는 책 한권 더 읽히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님이 있다면 말하고 싶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각, 그분들이 아끼고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애정, 가족에 대한 공유의식 같은 것이 없이 지식만을 추구하는 헛똑똑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좀 느리게 가도 제대로 가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며 잔잔한 감동에 젖게하는 이야기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내 아이들이 훗날 추억의 장에서 꺼낼 외조부모님에 대해, 나의 부모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잭. 엄마가 많이 속상해 할지도 몰라...... 이 할애비가 더 심해지거든, 그 상자를 가져다 보여주렴. 내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엄마가 볼 수 있게......" 역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