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 열차
헤미 발거시 지음, 크리스 K. 순피트 그림, 신상호 옮김 / 동산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요즘 아이들이 '피난 열차'라고 하면 그게 무슨 기차인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흔 셋의 연세로 지금도 건강하신 내 아버지는 피난열차에 몸을 싣고 남으로남으로 내려왔던 이야기를 내 어릴 적에 종종 들려주셨다. 이 책에서처럼 정말 열차의 지붕에까지 빽빽히 올라앉아 가는데 바로 뒤에서는 폭파음과 함께 한강다리가 끊어지더란다. 걷고 또 걸어서 발가락은 동상이 걸리고 발바닥 허물도 몇번이나 벋겨지더란다. 그렇게 부산까지 왔다고 하셨다. 나도 그런 이야기들을 무슨 옛이야기처럼 듣고 자랐는데 하물며 요즘 아이들에겐 무슨 무용담쯤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피상적으로 알고만 있는 6.25전쟁과 휴전상태, 그리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 정신적 상실감 같은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않다. 이 책은 아이들이 겪지 못했던 과거 우리의 아픈 역사를 좀더 생생하고 실감나게, 좀더 피부에 와닿게 묘사하여 보여주려는 노력이 십분 발휘되었다. 잊히기 쉬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아이들에게 잘 접근시켜주는 것이 어린이책이 지향해야 길 중 가장 의미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글쓴이와 일러스트레이터 모두 한국과 관련이 깊은 사람들이다. 상상으로 꾸민 이야기도 들어있지만 대부분 작가의 가족들이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인 수미의 딸이다. 수미는 외할머니로부터 피난열차의 아픈 기억을 듣는다. 수미가 '나'를 내세워 독백을 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편안한 문체에 아이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엄마는 앞날을 설계하기 위해 군대를 가고, 외할머니와 꽃마을에 사는 수미는 4시면 지나가는 기차를 놓치지 않고 꼭 본다. 멀리 떠나있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수미의 어깨를 다독이며 외할머니는 이산가족의 아픔으로 문드러졌을 속내를 살며시 꺼내 들려준다. 긴긴 이야기 속에 우리역사의 혼란했던 시절의 이야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다. 정든 고향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종용하는 전쟁. 4식구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숲길을 숨죽여 걷고 암흑의 강을 위태로운 배을 타고 건너고 또 하염없이 걷는다.

드디어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하는 가족의 운명 앞에서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하고, 외할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때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수미의 할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야기는 잦아든다.

절정의 장면은 물론 피난열차가 그려진 장면들이지만, 장면마다 수채화로 그린 삽화가 무척 강한 인상을 준다. 풍부하고 사실적인 인물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준다. 삽화를 그린 사람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한다. 그리고 작가와는 부부관계인 것 같다. 사랑하는 아내와 한국의 선조께 이 책을 바친다는 헌사가 인상적이다. 아프고 부끄러운 우리의 과거를 이렇게 똑바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만든 이 책은 정말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은 모두 우리랑 닮은 얼굴이고, 외할머니의 주방은 서양식으로 꾸며져있지만 가스레인지 위에는 뚝배기가 놓여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단란했던 시절의 그 당시 우리네 집안 세간살이와 옷매무새도 세심하게 잘 그려놓았다. 비단 보료에 자개문갑, 신선로, 청자백자, 아름다운 병풍 그리고 고운 색감의 한복을 볼 수 있다. 북한군이 서울로 밀려오고 가족이 지하실에 숨어있는 장면에서도 한 켠에 작은 항아리가 놓여있고 가족은 돗자리위에 서로 기대어 앉아있다.

첫번째 삽화와 가장 마지막의 삽화를 보고 있으면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맑고 시원스런 수채화 풍경 안에 길다란 기차가 오랜 세월의 긴긴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기적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 쳐 들리지 않으면 이제 기차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미는 그렇게 그려본다. 외할머니는 모진 세월의 바람을 따라 그리움일랑 모두 떠나 보내고, 엄마를 보고 싶다고 뾰루퉁해있는 손녀를 위해 숄을 덮어 감싸준다.

이 책의 원제는 Peacebound Train 이다. 평화를 손에 쥐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게다. 표어처럼 남발하는 단어이지만 정작 그게 얼마나 소중한 단어인지,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가슴으로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이 한편의 생생한 이야기는 집안사정으로 엄마와 당분간 헤어져 지내야하는 수미의 아픈 마음과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차'라는 매개물로 하나로 엮어낸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쉽게 풀어서 나눠볼 수 있는 동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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