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사자 안용복 힘찬문고 2
이주홍 지음 / 우리교육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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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사자 안용복>앞에는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낸' 이라는 수식어가 작은 글씨로 붙어있다. 이 책은 부산의 문학가 이주홍 선생의 동화로서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거기에 울릉도와 독도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있는데, 이는 안용복의 어머니가 아들 며느리를 앉혀놓고 들려주는 형식으로 적혀있다.

이 책의 초판 연도는 10년 전이다. 그 때도 독도분쟁으로 온 국민이 분개했던 일이 있었고, 머릿말에서는 이 책이 정신을 맑고 개운하게 해 주리라 믿는다고 적혀있다. 물론 이주홍선생이 아니라 임신행님의 글이다. 독도문제는 언제든 다시 일본에 의해 불거져 나올 사안이다.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인식과 바른 지식이 중요함을 깨닫고 순수한 애국심으로 이룬 한 개인의 희생이 얼마나 거룩한지 느끼게 되면 좋겠다. 정부 차원의 강경책과 책임있는 태도도 절실히 요구됨을 알 수 있다.

5학년 아이들과 만 4년 전에도 이 책으로 독서수업을 한 일이 있다. 이번에 다시 이 책을 보며 좀 답답했던 점은, 안용복의  목숨을 건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정관리들이 내린 억울하고 부당한 처사에 아이들은 여전히 별 노여움을 못 느끼고 있더라는 점이다. 무엇이 부당하고 무엇이 정당한지,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버러지 같은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니 판단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은 아이들의 태도에 다소 놀랐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게 아닌가싶다.

이 동화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사실과 민담의 직조가  잘 되어있어 전해져내려오는 옛이야기를 구수한 입담으로 듣는 것처럼 읽어내려가기가 흥미롭다. 어머니의 부산말씨가 투박하니 친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안용복의 어머니와 어느 수군의 입을 통해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심리적인 가까움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독도와 울릉도에 관한 역사적기록이나 지리적 위치 같은 것으로 왜국의 도주에게 논리적인 반박을 하는 부분은 안용복의 입을 통해 나온다. 이는 역사를 바로 앎이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할 과제임을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이 책으로 하여금 안용복을 비롯하여 독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독도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자원적 가치을 알며, 나아가 우리 것을 지킬 수 있는 저력을 기르고자하는 아이들의 눈망울에 빛이 더하여지면 좋겠다.

이주홍선생은 이 책을 쓰게된 이유를 "나라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는 일 이상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안용복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은인인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한 인간의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 실감 있게 잘 알게 될 줄 믿는다." 라고 밝혀두었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요즘, 새겨볼 만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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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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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12쪽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한 해질녘 황혼과 동트는 여명이 아름다운 것은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이며 가능성이다. 대립은 서로를 소멸시킬 뿐이다.-13쪽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연대이지, (남성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22쪽

고통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다.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져서는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서는 안 된다. 죽음이라는 사실(fact)은 육체적으로 우리를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idea)은 우리를 구원하듯이 말이다...... 나는 열등감과 분노, '불평 불만'은 새로운 인식, 즉 실천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25쪽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34쪽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35쪽

여성주의는 세상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하고 정치화하도록 돕는 것이다.-43쪽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44쪽

어머니는 대단한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픽션이며,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임의적인 이데올로기다. 아들이 필요로 하는 변화무쌍하며 한없는 요구의 대상, 이것이 어머니론의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는 변화하지 않아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희망과 자신에게 부과된 희망을 구별하지 못한다.-65쪽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72쪽

아버지의 연장으로는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 벨 훅스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도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 버지니아 울프-77쪽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인간의 감성과 사랑이 평등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을 에로틱하게 느끼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등을 에로틱한 것으로 느낀다면, '위안부 누드'는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86쪽

남성문화와 여성문화가 동일하게 학습되고 상호 존중되어야 여성들은 남성과의 차이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지금처럼 남성의 목소리가 일방적이고 유일한 것일 때 즉,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가시화되지 않을 때 남녀 모두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기 쉽다.-97쪽

가부장제 사회는 여서의 좌절이나 분노, 우울증 같은 학대당한 경험의 표현을 억압하는데, 여성이 자기 고통에 직면하지 못할 때 섭식장애가 나타난다. 폭식이나 거식은 언어화되지 못한 여성문제가 머무는 도피처, 연막인 것이다.-101쪽

가족은 친밀성과 자발적인 상호 보살핌의 공간이 아니라 지나치게 도구적이다. 기러기 아빠는 이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이는 남성이 희생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가족이 자녀교육의 성공, 즉 출세지상주의와 경쟁논리로 가득한 공적 영역에 얼마나 종속적인지를 보여준다.-107쪽

여성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 역사, 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125쪽

나는 모든 남성이 여성문제에 대해 '무지몽매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남성을 깨우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여성주의 정치학'이 내 삶의 다양한 준거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내가 '계몽적인 인간'이 될까봐 몹시 두려워하는 사람이다.-129쪽

여성의 피해의식이 피해자로서 지니는 사회구조적 의식이라면, 남성의 '피해의식'은 가해자의 정신분열, 프로이트식으로 말한다면 죄의 투사이다.-145쪽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장이 대립할 때, 당연히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성폭력뿐 아니라 모든 인권 이슈의 기본 시각이다. ...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은 피해자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150쪽

표현의 자유는 아무 때나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일 때만 권리로 존중될 수 있다.-158쪽

인권은 사회의 권력 관계와 관련 없이 추상적, 초월적으로 본래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구성되고 쟁취되는 경합적 가치관이다. 인권은 언제나 피억압 집단의 개입을 기다리는 과정적 개념인 것이다.-159쪽

여성주의의 인권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근대적 개인, 근대적 주체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과 동시에, 기존 인권 개념의 기준 자체에 도전한다. 정의(justice)로서 평등한 인권은 같아짐(same)이라기보다는 공정함(fairness)을 추구하는 것이다.-178쪽

연령주의의 문제를 회피하는 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식의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인간의 나이는 임의적인 인식과 제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억압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적,사회,심리적인 물적 토대를 가진다.-189쪽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는 계엄령이 필요없는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나 소망은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다.-199쪽

모든 대상과의 소통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대화의 과정이란 나와 상대방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와 상대방이 대화의 관계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대화의 관계에서는 누구도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이해하려고 한다. 대화로부터 무엇이 드러나는지는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따라서 대화는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의미의 재창조이다.-215쪽

이름짓기는 정치학이다. 명명(命名)의 과정과 결과는 명명하는 집단의 시각과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용되는 언어는 그 언어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연속선의 한 지점일 뿐이다.-226쪽

성판매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각은 역사적으로 다르다. 4천 년 전 중동의 수메르 사회에서 성판매 여성들은 지혜롭고, 교육받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남성을 길들이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이후 도시 국가에서 가족 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 '아내'와 구별되기 시작했다.-232쪽

목소리와 침묵에 관한 이슈들은 여성주의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 설정 과정에서, 누구를 배제하고 누구와 토론할 것인가, 누가 말하고 누가 들을 것인가, 어떤 주제를 토론하고 토론하지 않을 것인가는 모두 권력 관계의 결과임을 알고있다.-238쪽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성별화된(gendered) 주체이자, 시각 주체(the seeing subject)로서 근대적 남성 주체와 군사주의의 필연적 연결성을 보여주는 매우 뛰어난 반전영화이다. <알 포인트>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타자와 공존할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남성의 자기 분열과 죽음 고백한다.-242-243쪽

이때 평등은 공정함(fairness)이라는 정의가 아니라, 남성과의 같음(sameness)을 강요하는 남성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때문에 여성의 '평등한' 군대 참여는, 역사상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채택된 적이 없고 어떤 여성해방 이론에서도 주장된 일이 없다.-252쪽

총을 쏘는 것, 과녁을 맞추는 행위는 보는 행위다. 미술에서 원근법은 인식 주체인 개인의 등장과 함께 발명되었는데, 근대적 의미에서 이러한 보는(인식) 주체는 백인 남성을 의미한다. ......보이는 대상은 성애화된다. 사격, 사정, 투사, 촬영하다(shoot)는 모두 '쏜다'는 뜻을 포함한다.-268쪽

군 제도에 동원되는 피지배 계급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여 지배 계급 남성과의 연대와 동일시 욕망을 극복하고 여성들과 연대할 때, 군사주의에 대한 사회적 문제 제기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273쪽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re/formation)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앎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자기 몸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자신의 확장된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277쪽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처럼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태(變態 , metamorphosis) 의 고통을 뜻한다. ...... 의식화는 '변절'이나 '전향'이 가능하지만, 변태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278쪽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에 저항하는 여성주의는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민주주의를 대립시키지 않는 사유 방식이다.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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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水巖 > 조병화 - 입춘을 지나며


                         입춘을 지나며

                                                  - 조   병   화 -


                    아직도  하얗게
                    잔설이  남은  숲길을  걸어서
                    절로  올라가면


                    그곳,  어디메에서  들려오는
                    어머님의  기침  소리


                    생시에  듣던  그  기침  소리지만
                    어머님과  나   사이는  저승과  이승이다.


                    멀리  숲  위에  봄냄새  나는
                    붉은  해는  솟아  오르고
                    나의  이  이승의  길은  아직  안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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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영과 사리영 바우솔 작은 어린이 5
이영희 글, 이진경 그림 / 바우솔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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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은 동화다. 아리영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의 다른 이름이다. 요즘 한글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아리영'과 '사리영'이란 이름이 귀염성스럽다. 표지의 두 아이들을 보면 단번에 쌍둥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뺨은 불그스레해져있다. 

이 책은 한참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띠며 형제간에도 티격태격대는 일이 많은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일곱살 생일날 할아버지가 주신 선물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 벌로 할아버지로 부터 창고에 갇히게 되면서 아리영과 사리영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한다. 바로 도깨비나라에 가게 되는 것이다.

아리영과 사리영은 도깨비들이 하는 짓을 보며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싫은 건지를 깨닫는다. 사이좋은 자매가 되기까지 믿지 못할 일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도깨비들은 역시 사람에게 복을 주었음이다. 훈계적이지 않으며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라 지루하지 않다.

삽화들도 하나같이 수수하고 따스하다. 아리영과 사리영이 색동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도깨비가 고양이로 변해 방울을 달고 할아버지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나중에 다시 노랑나비로 변신하여 교실로 날아든 모습은 마음속에 환한 빛과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인상은 아리영과 사리영이 창고의 궤짝 위에서 황금빛을 발견했던 장면의 삽화와 연결된다. 무언가 좋은 징조가 일어날 것 같은, 마음 속 기쁨, 화사한 내일의 느낌이 전해져온다.

아리영과 사리영이 사는 집은 오래된 집으로 전통한옥의 구조를 하고 있다. 책의 뒷장에는 한옥의 구조를 평면도로 그려놓아 재미있는 자료가 된다. 이야기의 가운데 부분에서는 우리나라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풀어놓아 도깨비에 흥미가 있는 아이들에게 더욱 재미를 줄 것이다. 걸림이 없이 흐르는 이야기솜씨에 정겨운 삽화가 어우러져 좋은 내용을 건강하게 표현한 동화라고 생각된다. 도깨비와의 만남은 아이들이 꿈꾸었던 시간인지도 모르지만 꿈을 통해 마음이 실팍하게 되살아났으니, 읽는 내내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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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하룻밤의 만찬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김영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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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 이후로 내게 주어진, 영원할 것만 같은 숙제는 종교문제이다. 종교가 없었던 친정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시부모님들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몇 해 전 세례까지 받았다. 하지만 늘 체증처럼 답답하고 어느 땐 지리하고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몇 해 전 교회를 다닐 때에는(물론 어른들 눈 때문이었지만) 교회의 어느 인자한 전도사님 덕택에 나는 찬송을 하며 흐느끼기도 하고 그분들의 기도를 받으며 솟구치는 눈물을 감출 수 없기도 했다. 지금은 이 책의 주인공 닉 코민스키처럼 책상자의 가장 아랫부분에 넣어둔 성경처럼 교회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적도구는 '대화만이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한다'는 저자의 신념이 낳았다. 예수와 단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란 아무에게 올 수 없지만, 진정 갈망하고 고민한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진다. 이 대화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 자신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기 때문이다.

풀코스로 나오는 고급레스토랑에서의 대화는 억양을 조절하게 만들어 격앙시키지 않고 감정에 흐르지 않게 한다. 다음 메뉴를 들고 서 있는 웨이터 때문에 적당한 지점에서 대화가 끊기기도 하며 대화의 호흡을 조절하게 하는 잇점이 있다. 사실 단 둘만의 대화에 긴장하고 어색해하며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만찬이란 고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는 마주보며 정곡을 찌르는 대화를 나눌 때 내 안의 감추어둔 상처와 상실감을 쳐다보는 일이 잠시 고통이더라도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닉은 조롱조로 예수를 호칭하며 냉소적인 말투로 대화를 시작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상대의 태도와 어조에 점차 자신의 중심을 찾고 좀더 솔직해진다. 여태 그러고 싶었던 상대를 갈구하고 있었음이 진실일테다. 닉의 이런 불안감을 상쇄해줄 만치 예수의 화법은 통쾌하며 확고하다. 상대로 하여금 신뢰하게 하고 동요하지 않게 한다.

예수는 닉을 정말 선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순수하고 착한(?) 우리는 그만큼 위악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말에 의하면 신과 멀어져 자신 안에 깃들어있어야할 신의 성질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통해 나타나고 우리를 통해서만 사랑을 보여준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사함'과 '영생'에 대한 이론도 예수의 입을 통해 쉽게 전달된다. 영생이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칭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의미가 있다함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순간부터 내 삶이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 그것은 사랑의 삶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아찔했다. 그럼 기독교도이면서도 사랑의 실천을 하지 못하는 부류는? 대답은,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완전무결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그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자신의 선함을 믿어선 안되는 데 말이다. 이 책은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를 비교설명하며 기독교적 입장에서 그 창시자나 계시의 진실성에 대하여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 점이 다소 거슬리지만 과학적인 사실과 더불어 우주관을 제시하며 논리적인 지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을 만하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이 가장 갈구하는 것은?, 이라는 예수의 질문에 닉은 머뭇거리며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고 예수는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단호히 받아넘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곁에서 위로와 사랑을 주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은 지금도 문 밖에 있는데, 들어오라고만 하면 내 영혼의 집안에 들어올 수 있을텐데, 우리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는 나의 영혼을 온통 차지하고서 그 존재를 밀어내고 있는 것의 정체를 생각해보게 한다.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듯 비근한 일례를 들어가며 그 사랑의 부피와 질감을 납득시킨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품고 지냈던 신에 대한 증오, 직장 내 비리에 대한 자신의 비겁함, 부딪히기만 하는 아내와의 뾰족한 관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일상의 지리함 그리고 어린시절 품었던 자유분방한 모험심의 퇴색. 삶의 이런 문제들을 이제부터 닉은 현명하게 해결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다음에 한번더 예수와의 저녁식사를 제안한 것으로 보아서 희망적이다.

비기독교인이라면 여기까지 빨려들듯 읽어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완전히 믿어지지 않는 점도 있을 것이다. 나같이 어설픈 신자는 물론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오래 묵혀두었던 자신과의 대화! 닉처럼 나도 지금 멀리 하고 있으면서도 늘 잊지 못하고 마음 쓰이는 그 존재와 마주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몇 해 전 찬송가와 기도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멈출 줄 몰랐던 기억만큼은 아니어도, 가슴 가운데 묵혀두었던 자그만 덩어리가 불거져나오는 느낌이다.

에피타이저와 샐러드, 메인요리와 디저트 그리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서 귀가를 하기 전, 닉은 예수와 악수를 나눈다. 닉이 멈칫하자 나도 긴장을 했다. 무언가 반전이 있다고 했는데 무엇일까. 그의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 확연히 드러나는 고통의 흔적은 흔히 알고 있는 상식과 달라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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