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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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자림 > 파블로 네루다의 '시'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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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6-1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블로 네루다의 몸속에 이런 말들이 알알이 들어차 있다가 한꺼번에 다 쏟아져 나온것 같네요. 와 시란 이런거군요.좋은시 잘 읽고 갑니다 잘 퍼가겠습니다.
 
 전출처 : 비자림 >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신  현  림

       

  빈민가 담벼락 같은 가슴을 뚫고 겨울이 온다

  슬픔은 미친 종처럼 울고 슬픔은 끝없이 나는 연

  저 환장한 연을 잡았으면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너를 안고 나는 갈매기였

으면

  아우야, 추운 너를 안고 어머니가 금강산을 날으셨

구나

  애인아, 그리운 너를 안고 나는 바닷속을 달렸더구나


  마음으로라도 날고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날들

  열린 차창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던 날들

  불탄 아현동 사람들이 무덤으로 던져진 어제

  저녁이 오기도 전에 식탁의 빵들은 부패했다

  장송곡보다 무거운 원피스를 입고 너는 꿈 속 강변

을 헤매고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싸락눈으로 날린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토실토실한 쓰레기나 불리며 살고

  작별의 꽃을 던지며 사나니

  술잔은 자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더라


  기나긴 밤마다

  아무 위로 없이 남겨진 나의 너여

  더 이상 탄식의 나팔을 불지 마라

  현세가 지옥인 때는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무자비한 세상,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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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림

마음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걷는다

숨어있던 오래된 허물이 벗겨진다

내 허물은 얼마나 돼지처럼 뚱뚱했던가


난 그걸 인정한다

내 청춘 꿈과 죄밖에 걸칠 게 없었음을


어리석음과 성급함의 격정과 내 생애를

낡은 구두처럼 까맣게 마르게 한 결점들을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나의 등잔이 타인을 못 비춘 한시절을

백수일 때 서점에서 책을 그냥 들고 나온 일이나

남의 애인 넘본 일이나

어머니께 대들고 싸워 울게 한 일이나

실컷 매맞고 화난 주먹으로 유리창을 부순 일이나

내게 잘못한 세 명 따귀 때린 일과 나를 아프게 한 자

마음으로라도 수십 번 처형한 일들을


나는 돌이켜본다 TV 볼륨을 크게 틀던

아래층에 폭탄을 던지고 싶던 때와

돈 때문에 조바심치며 은행을 털고 싶던 때를

정욕에 불타는 내 안의 여자가

거리의 슬프고 멋진 사내를 데려와 잠자는 상상과

징그러운 세상에 불지르고 싶던 마음을 부끄러워한다.


거미줄 치듯 얽어온 허물과 욕망을 생각한다

예전만큼 반성의 사냥개에 쫓기지도 않고

가슴은 죄의식의 투견장도 못 된다

인간의 원래 그런 것이라며 변명의 한숨을 토하고

욕망의 흔적을 버린 옷가지처럼 바라볼 뿐이다


고해함으로써 허물이 씻긴다 믿고 싶다

고해함으로써 괴로움을 가볍게 하고 싶다

사랑으로 뜨거운 그 분의 발자국이

내 진창길과 자주 무감각해지는 가슴을 쾅쾅 치도록


나는 좀더 희망한다

그 발자국이 들꽃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나

나를 깨워 울게 하도록

 

<세기말 블루스> 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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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와 국자 전쟁 - 3 소년한길 동화 3
미하엘 엔데 지음, 크리스토프 로들러 그림, 곰발바닥 옮김 / 한길사 / 200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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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또 한번 읽었다. 6월이면 호국보훈의 달을 기념하여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하는 책들을 함께 읽게 된다. 이런 주제로 나와 있는 어린이 책이 많이 있지만 미하엘 엔데의 이 책은 독특한 상상력이 재미를 더 하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삽화가 환상적이어서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냄비와 국자 전쟁은 결코 나뉘어져서는 행복할 수 없는 것들의 전쟁과 합일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에게 냄비와 국자처럼 함께 있어야 더 좋은 것들을 말해보게 하니까 단순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이외에 '남자와 여자'를 꺼낸 아이가 있다. 기특하다.

냄비와 국자는 왼쪽과 오른쪽의 나라를 상징한다. 이 두 나라를 이간질하고 고소해하는 심술궂은 마녀는 이 나라에 각각 국자와 냄비를 선물한다. 외세의 침략과 선물공세를 두고 이렇게 비유한 대목부터 눈길을 끈다. 국자와 냄비를 가진 왕과 왕비는 서로 자기 것을 꼭 쥐고 나누어 쓸 생각은 없이 남의 것을 탐내기 시작한다. 서로 바꾸어보자고 협상을 하기도 하지만 쓸모없는 물건이긴 마찬가지다. 결국 비밀요원을 고물장수로 변장시켜 도둑질을 하게 한다. 물건은 도로 제 자리로 돌아왔지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는 걸 느낀다.

하지만 욕심은 욕심을 낳고 급기야 전쟁이 일어난다. 상대가 가진 것을 무력으로라도 빼앗을 생각에 이른 것이다. 나라는 잿더미가 되고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린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고집만 부리려는 왕과 왕비의 마음은 다른 나라와 서로 대화를 할 기회조차도 앗아간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돌아갈 생각만 하니까 서로 만날 수 있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다. 이들은 산꼭대기에서 만나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고 그곳에 올라가보니 뜻밖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어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책 표지의 그림을 보면 상상해볼 수 있다.

3학년 아이들과 이 책을 보며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있는 우리의 현실과 빗대어보았다. 아이들과 나누어보기에 적당한 정도에서 그 원인과 통일에 대한 생각까지 가볍게 나눠보면 좋겠다. 아이들은 대체로 마녀의 계략대로 노는 어른들이 어리석고 아이들이 오히려 지혜롭고 착하다고 말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부르기 어려워 읽기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용의 흐름(냄비와 국자가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합쳐지기까지)과 상징들을 잘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하일 엔데다운 고급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근사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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