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브라이 뒹굴며 읽는 책 4
마가렛 데이비슨 글, J. 컴페어 그림, 이양숙 옮김 / 다산기획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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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내게 '당장 몸의 어느 한 구석에 심한 불편이 닥쳐온다면?' 하고 질문해보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언제 닥쳐올지도 모를 장애에 미리 대비하여 살고 있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선천적 장애보다 더한 고통과 극복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는 후천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장애 이전의 경험이 극복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안타깝다.

<루이 브라이>는 자신에게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불행에 굴하지 않고 어둠의 장막을 걷고 빛을 바라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빛은 자신은 물론 자신과 '같은 불편'으로 어두운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 같았던 이 세상의 많은 눈 먼 사람들에게 희망을 밝힌다. 삶을 밝히고,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글자'라는 도구를 눈 먼 사람들의 손에 쥐어 준 것이다.

남이 아무도 하지 않는 생각과 오로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평생을 바친 루이 브라이. 당시에 기성세대의 틀에 박힌 사고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명예욕과 뒤엉켜, 참신한 브라이의 점자 발명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더 빨리 세상에 나올 수도 있었던 브라이의 점자는 몸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몰이해로 불구덩이 속에 타들어가면서 이미 건강을 많이 잃은 브라이의 가슴까지 타들어가게 하였다.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팠다. 인물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도 이런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인물의 삶은 위대하다. 그것이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의 극복기라면 더할 수 없는 감동과 더불어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고통과 굴욕의 시간을 견디고, 어둠의 방에서 지적 호기심으로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샘물같은 힘을 준 루이 브라이. 그의 업적은 겨우 15세의 나이로 시작하여 길지 않은 생을 그와 함께 외길로 걸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였던가! 세상 모든 '브라이'에게 이보다 더 절실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주 간결한 문체가 외길인생의 루이 브라이를 조명하는데 썩 잘 어울린다. 초등 4학년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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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루이브라이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시간을 어둠속에 살았겠죠. 점자는 위대한 발명품이에요. 보물창고에서 나온 '루이브라이-점자로 세상을 열다'란 그림책도 저학년 아이들이 보기에 딱 좋아요.^^

프레이야 2008-03-26 19:16   좋아요 0 | URL
정말 대단한 발명품이죠^^
저학년 루이브라이 인물이야기도 있군요. 보물창고에서..
 
말괄량이 기관차 치치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
버지니아 리 버튼 글, 그림 |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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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기관차 치치는 자꾸 엄마손에서 벗어나 제 마음대로 뛰어가려는 아이를 닮았다. 천방지축 제 모습을 뽐내며 제가 제일인양 예쁘게 보이려는 아이의 심리를 치치를 빗대어 잘 보여준다. 다루기는 힘들지만 눈을 반짝이며 깜찍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모습이 그렇듯이, 치치는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앙증맞다.

이 그림책은 전체적으로 아주 역동적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의 몸짓처럼 생기발랄하다. 직선보다는,구불구불한 철로와 마음대로 피어오르는 연기, 사람들과 동물들의 손짓 발짓 모두 살아있다. 흑백의 그림이 이런 느낌을 더 잘 표현해 준다. 흑백사진 속에서 더 풍부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버튼의 다른 그림책에서도 그러하듯, 이 책에서도 글자는 그림의 한 부분이다. 글자의 배열을 보면, 그림의 구도와 너무 잘 어울리게 자리하고 있다. 글자는 구불구불 살아 움직이는 철로가 되기도 하고, 마름모꼴이 되기도 하고 삼각형을 이루기도 한다. 다양한 시각적인 재미를 주며, 역동적 느낌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치이이.....치.....ㅊ.....ㅊ' 녹초가 다 되어 주저앉아 버리는 치치를 글자의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게 하기도 한다. 글자와 구도, 선의 느낌만으로도 풍부한 인상을 주는데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나절의 일탈에서 다시 돌아온 치치는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아이처럼 대견한 말을 한다. 이제 새록새록 입에 단내를 내며 잠이 들 아이같다. 자면서도 연신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아이는, 엄마 손을 뿌리치고 저 혼자 달려가려는 치치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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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책날개를 달아 주자
김은하 지음 / 현암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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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좋은 책을 늘 가까이하게 해 주고픈 나로서는 두꺼운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기대감으로 책장을 넘겼다. 저자는 일선에서 어린이 독서지도를 다년간 이끌어온 사람으로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며 느낀 문제점과 추구해야할 점 등을, 본질적인 것에서부터 보다 구체적인 부분으로 좁혀들어가며 지적하고 있다. 주부들의 안이한 부업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쉽게 달려들려는 예비 독서지도사들에게는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책은 길고 긴 한사람의 일생을 두고보면, 중요한 인생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지만, 사람간의 두터운 애정과 자연과의 교감을 무시한 독서편력은 오만이자 숨쉬지 않은 지식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군데 군데 객관적인 견지를 잃고 흥분하여 부르짖는 곳이 있지만, 저자의 자신감과 신념이 어느정도인가 가늠하게 해 주는 부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신문활용교육, 백과사전 고르기, 식물도감 생활에서 활용하기, 고궁 답사를 위한 책 고르기 같은 주제는 다른 곳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부분이라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이외에도 어린이 책 전반에 걸친 일그러진 부분들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한글조기교육은 아이들이 당연히 마음껏 누려야 할 아동기를 엄마의 편의대로 축소시키는 것이라는 점은 되짚어 보아야한다.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는, '책'을 매개로 엄마와 아이가 하나되는 행위이다.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이 더 많은 쪽은 엄마라고.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이 '독서운동권'이 되어, 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아이들 마음대로 책을 고를 수 있게 풀어놓을 수 있는 환경을 이끄는 실세가 되자고 한다. 눈을 밝히고 비판적인 시각을 기르는데 이 책이 한 몫 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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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개 파랑새 그림책 17
나자 글 그림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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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강아지가 등장하는 그림책은 수없이 많이 있다. 그래도 이 그림책이 아주 새로운 느낌을 주는 건, 푸른 개의 에메랄드같은 눈빛이다. 커다란 몸집의 푸른 개. 두 귀는 순하게 아래로 쳐져 있지만, 그 눈빛만은 무엇이라도 집어 삼킬 것 처럼 깊숙하다. 이집트 태생의 작가가 그린 작품이라 호기심이 더한다. 한 장 한장 캔버스 유화를 보는 듯하다. 굵고 힘찬 터치와 강렬한 명암의 대조가, 샤를로뜨와 푸른 개의 눈빛만큼 강한 인상을 주며 서로 어울린다.

숲의 유령, 검은 표범과 맞서 샤를로뜨의 단잠을 지켜주는 푸른 개가 나오는 장면은, 섬뜩하다. 그래서 실감난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날카로운 이빨을 다 드러내고 시뻘건 혓바닥을 보이며 필사적으로 검은 표범을 물어뜯고있는 푸른 개를 비춰준다. 아이들이 흔히 꾸는 악몽이 연상된다. '동이 트면 슬금슬금 달아나는 무서운 꿈' 같은 '검은 표범'으로부터 샤를로뜨의 단잠을 지켜주는 '푸른 개'는, 아이가 잠들 때면 반드시 챙겨서 품에 안고 자는 공룡인형 혹은 곰돌이 인형같은 존재다. 아이의 무의식에 잠재하는 공포의 대상 혹은 정체모를 외로움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주는, 정서적 위안과도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푸른 개의 등에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 샤를로뜨는 '날아가는 기분'이다. 꿈에서 하늘을 마음껏 날아본 경험이 있으면 샤를로뜨의 심리적 해방감을 같이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이의 마음에 든든한 동무가 되어줄 한마리 푸른 개가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아이곁으로 다가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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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
찰즈 베이츠 지음 / 그린비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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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도 없이 많이 변형되고 살이 깎인 채로 시중에 나와 돌아다니는 <아기돼지 삼형제>는 불량식품이었다. 함량미달의 불합격 제품이었다. 그 이야기 안에 이렇게 많은 '인간정신의 은유'를 함축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공정거래에 저촉되는 행위인지, 독자를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 무책임한 태도인지 각성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한 구절 한 구절 따라내려가며 나의 발가벗겨진 내면 깊숙한 곳의 얼룩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위 내면의 성장을 겪어오면서 만났던 두려움. 그 앞에서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고스란히 잡아먹혔던 나. 내가 타인에게서 혐오하는 부분이라고 비판하는 바로 그 부분이 내가 정작 무의식의 자리에서 바라는 것이라는 신랄한 지적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시시각각 여러가지 얼굴로 나의 내면을 드리우는 '의식의 그늘'이 바로 늑대의 모습이다. 미성숙한 인식의 범주안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반쪽 자아인 늑대'는 늘 우리의 덜 익은 의식을 한입에 삼켜버릴 것이다. 늑대는 우리가 진정 통합하여 배우고 승화시켜야 할 삶의 과제이자 스승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불구덩이 속, 바로 그 곳에 진정 우리가 체득해야할 보다 완전한 진리가 숨어있다.

미성숙한 의식을 대변하는 두 돼지와는 달리, 세째 돼지는 '개인적, 문화적 습관에 기초하지 않고 자신이 획득한 지식과 반성에 기초하여 자아의 구조물', 즉 벽돌집을 세운다. 이 벽돌집의 안팎에서 늑대를 속이고 스스로 전술을 짜고 터득하면서, 결국 승리한다. '어둠을 흡수했고 각성된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곳곳에 숨어있는 은유와 심리의 원형들을 좇아가며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되짚어보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었다. 현재 나의 삶에서 나를 강박하고 있는 두려움이 오히려 역설적인 것으로 작용한다면, 나의 인식과 더불어 나의 삶이 보다 풍성한 것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아무리 잘 지은 벽돌집이라 해도 그 안에서는 결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나에게 다른 사람은 늑대일 수 있다. 그들을, 무슨 이유에서든, 피하기만 한다면 나를 비춰주는 참거울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의 늑대들과 부단히 악수 나누며 그들에게서 순간순간 배우고 하나되어, 마침내 그들에게서 초연해지는 나를 그려본다.

<아기돼지, 늑대를 잡아먹다>는 이런 개인적인 인식의 지평뿐만아니라, 지적, 종교적, 나아가 범세계적 관점에서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길을 일러준다. 개인의 문제는 결국 사회적, 국가적 문제를 초래하고, 한 사회의 모순은 원초적으로 개인의 모순은 간과하고는 치유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광범위한 의미의 모든 어둠의 그늘을 똑바로 보고 그것과 손잡고 그것 위에 우뚝 설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자아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벽돌집을 지었다고 '교만'의 우를 범하지 말고 '탐욕'의 덫에 걸려 스스로를 죽이는 꼴도 되지 말라는 지은이의 충고가, 빛나는 은유의 해석들과 함께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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