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 깊게 보았던 <비우티풀>의 감독, 이냐리투는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한다고 한다.  

 

무슨무슨 맨,이라는 제목에 대한 선입견으로 제목을 흘려듣고 있다가 올해 초였던가.

비비아롬님의 권유(내가 좋아할 영화라고 덧붙이며^^)로 <버드맨>을 만났다.

마이클 키튼과 에드워드 노튼의 훌륭한 연기,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끌고가는 특출한 카메라워크, 경쾌하고 드라마틱하게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타악기와 현악기의 적절한 소리 배치와 무대 뒤의 좁다란 복도와 복잡한 뉴욕거리,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의 현란한 앞쪽과 뒤숭숭한 뒤쪽 공간 구성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모든 장면들. 전체적인 속도감 못지 않게 놀라운 감각의 영화에 몸도 마음도 즐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왕년의 블록버스터 수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 속 버드맨, 리건은 고교시절 연극 활동 시, 자신의 연기를 본 레이먼드 카버가 냅킨에 써서 건네준 격려의 문구에 격하게 감동하였다. - Thank you for the honest performance. 그 냅킨을 여지껏 갖고 있는 60대 퇴물배우.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그 흔한 SNS에 조차) 존재감 없는 리건은 끊임없이 덤벼드는 또 하나의 자기 자신에 시달린다. 환청인 듯 그림자인 듯 늘 말을 걸어오는 그 목소리는 리건의 무의식에 자리하는 헛것으로 자신을 몰아대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상기시킨다. 그 이름은 버드맨.

 

영화는 과거의 영화로웠(다고 생각되는)던 자신을 차버리고 거듭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유쾌하고도 정밀하고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결미의 장면은 우리 영화 '해피엔드'를 연상하게 하는데, 열린 결말로 볼 수 있겠다. 관객은 여러가지 상상을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자신과 화해하고 버드맨 따위는 쫓아내버리고 재기에 성공한 조짐이 보이는 리건이 모종의 수치심을 느끼고 연극 속 에드처럼 자살한 것으로, 그러나 딸 샘의 눈에는 버드맨처럼 하늘을 나는 것으로 비쳐졌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소망(욕망의 다른 이름)과 자신의 소망에는 틈이 있는 법. 이러거나 저러거나 해피엔드가 아니라고 말하긴 어렵다.

 

"사랑에 대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대해선 창피해해야 마땅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217p)

 

영화 중, 리건이 제작 및 주연을 맡은 연극이 등장한다. 퇴물 영화배우 리건이 재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할지도 모를 중요한 연극이다.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제목 그대로다. 대사와 내용은 약간 변형되었지만, 기본 구도와 초반 대사는 소설 속 그대로이다. 에드워드 노튼은 침체기에서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리며 재기를 노리지만 여전히 갈등하며 자신과 싸우는 리건에게 촉매가 되는 역할이다. 영화 속 그는 리건과는 달리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배우로 나온다. 실제 연극무대에서도 활동하는 노튼의 연기도 조연이지만 빛난다. 무대에선 진실되게 사실적으로, 실제에선 사기꾼에 허풍선이 역할, 애매하게도 그게 삶의 진실이라고 믿고 배짱 좋게 말하는 노튼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다.

 

리건이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연극무대에 올리려고 한 건 잘못되었다고 말한 이냐리투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체로 끌어들인 목적이 무엇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결국 사랑을 떠벌리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창피한 줄 알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다른 많은 것들을 조롱하고 있다. 특히 바에서 늙은 여비평가와 리건이 나누는 대사는 적나라하면서 정곡을 찔러 통쾌한 맛이다. 그러고 나서 바를 나온 리건이 도시를 배회하다가 듣게 되는 어떤 남자의 독백은 우리네 삶과 비슷하다는 연극의 대사 같기도 한데, 배경음으로 깔리는 저음의 현이 처절한 심정의 리건을 대변한다.

" I don't exist. I don't exist."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랑함에 있어서조차도 우리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리건은 (무지에서든 자발적으로든) 다친 코도 재건했고 신문에는 '무지에서 왔지만 예상하지 못한 초사실주의'의 선봉으로 대서특필 되었다. 더구나 전처와 딸과도 예전의 사랑을 찾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거듭날 수 있는 이 순간에 진실을 통렬히 깨달은 게 아닐까. -  I don't exist. I'm not anything. I'm not anyone.

 

 

 

- 영화 'BIRDMAN' 중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말 알고 있는 게 뭘까? 사랑에서 우리는 초보자일 뿐인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 "(214p)

"...... 그런데 끔찍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어떤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먁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 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내 말이 틀렸나? ......" (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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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7-13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버드라는 말을 들으면 예전영화 버디가 먼저 생각나요~

프레이야 2015-07-13 20:37   좋아요 0 | URL
버디,라는 영화가 있었나요. 저는 첨이라서요~^^ 버디영화는 많지요.

지금행복하자 2015-07-13 21:26   좋아요 0 | URL
1984년 영화에요. 오래된 영화죠~ 니콜라스 케이지. 매튜모딘 주연이고 베트남전쟁이 배경이었던 것 같아요. 매튜모딘이 정신병원 침대위에서 날려고 하는 포스터가 생생해요~
아직 버드맨은 못 보았구요~^^

프레이야 2015-07-13 21:28   좋아요 0 | URL
아!! 찾아서 보고 싶네요. 좋은 정보 고마워요^^

고양이라디오 2015-07-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정말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15-07-13 20:38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다시 봐도 재미있어요. 둘이 엉켜서 싸우는장면도 그렇고 리건이 팬티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상황도ㅎ

2015-07-13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5-07-13 21:15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참 고마워요. 리건이 진짜 하늘을 나는 버드가 되면 좋을까요. 사랑을 말할 때 우린 창피해해야 된다는 카버의 글귀, 찔리지않고 배길 수 있을까요^^ 참 하찮은 게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면 좀 나으려나요

고양이라디오 2015-07-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ㅜ 정말 좋은 영화였고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언제 꼭 다시 보고 싶은 영화네요. 이 영화때문에 카버의 책도 읽어보게 되었고요^^

프레이야 2015-07-14 02:00   좋아요 0 | URL
네ㅎㅎ저도 영화 보고 그 단편을 찾아 읽었어요^^ 너무 유명한 제목이니 ‥

라로 2015-07-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멋진 글에 제 닉네임을 언급해주셔서 영광입니다요~~~~~^^*
더구나 잊지 않고 봐줘서 더 고마운~~~~!! 그 맘 알아요?????ㅎㅎㅎㅎ

프레이야 2015-07-15 21:02   좋아요 0 | URL
아롬님 아니었더라면 패스했을 수도 있었던^^ 낄낄대며 봤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