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현존 수필가 최민자의
2006년 작 수필집을 뒤적이다 내 꼬리뼈에 대한 뜬금없는 생각이 든다. 나는 꼬리뼈가 유난히 두드러진 편이라 좀 딱딱한 의자나 방바닥에 방석 없이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하다. 있던 꼬리가 퇴화한 흔적이라고 우겨볼 만한 물증이지만 딱히 근거가 있다고도 볼 수 없는 신체일부다. 유월 수양버들이 서 있던 물가 그늘에 앉아 물잠자리의 꼬리를 보며 수평과 수직에 대한 단상을 떠올렸던 기억도 어느새 오래전의 일이다.

누군가는 최민자의 문장을 두고 훔치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고 말하는데 그게 깎아놓은 밤톨 같은 문장의 세련된 맛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성찰의 내공과 지적 깊이, 무한한 상상과 은유의 세계를 훔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눙치고 뒤집어 유머까지 전하니. 그러므로 누구의 어구나 문장 또한 완벽히 훔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흉내만 내는 게 될 뿐. 흔히 글 쓰는 사람들이 수련하는 방법으로 필사를 권하는데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필사보다는 자신의 문장을 그저 쓰고 또 쓰는 게 좀 거칠더라도 낫다는 쪽이다. 나는 좋은 문장을 읽어도 바로 잊어버린다. 원래 암기나 메모를 잘 안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시켜서 메모하는 경우에도 다시 들춰보는 일이 잦지는 않다.

최민자의 수필집을 읽다가 나도 나의 꼬리뼈에 달아둘 꼬리 몇 개쯤 살 수 있을까, 유쾌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혹시 왕년의 고관대작이 꼬리를 장만하러 내 가게에 들르면 만면에 미소를 띤 나는 기름 바른 여우꼬리를 살짝 감추며 상냥하게 물어볼 것이다. "무슨 꼬리를 드릴까요, 손님?"
"글쎄‥ 요즘 새로 나온 참신한 물건 없소? 없으면 그저 이 꼬리 저 꼬리 다 관두고 살래살래 잘 흔들리는 강아지 꼬리나 하나 주구려."
그러면 나는 진열장 뒤에서 요즘 가장 잘나가는 삽살개 꼬리를 비장의 무기인 양 꺼내 보일 터이다. 짭잘하게 흥정을 마치고 나서는 먼저 장착해 본 경험자로서의 노련하고도 친절한 한마디 훈수도 잊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손님, 꼬리라고 무조건 흔들어서 좋은 것만은 아니랍니다. 삶이란 타이밍 아닙디까. 아무리 훌륭한 꼬리라해도 적시에 내리고 비상시에 감출 줄 알아야 합니다. 위급할 때면 도마뱀처럼 자르고 달아나는 호신술도 익혀두어야 할 테고요."
"여보쇼, 내가 방금 꼬리 자르고 도망쳐 온 왕도마뱀이란 말이요."
-46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5-06-2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민자 전 잘 모르는 작가네요~~~^^;; 기억하겠슴미다. 최민자~~~.

프레이야 2015-07-01 06:53   좋아요 0 | URL
이름보다 세련된 글이에요^^

hnine 2015-07-17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지금 막 구입했어요.
깎아놓은 밤톨 같을 수 없어도, 거칠고 서툴어도 저만의 색깔을 지닌 글을 쓰는 게 저는 더 좋아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글이요. 그런데 어느새 다른 사람의 글과 말을 흉내내고 있을 때가 많더라고요.

프레이야 2015-07-17 10:03   좋아요 0 | URL
즐독하실거에요. 이분의 사유와 문장은 쉽게 흉내낼 수 없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