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그려본다. (중략) 

소리로 먼저 익히고 철자로 자꾸 베껴쓴 내 주위의 모든 것.

지금도 가끔, 내가 그런 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게 놀랍다. (10p)

 

 

- <두근두근 내 인생>의 첫 문장

 

 

 

 

 

 

 

우연히 북캘린더를 보게 되었다. 새해 들어 유심히 달력을 쳐다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남들처럼 새해 새 결심을 한다고 해서 지켜내리란 자신이 없었거니와 그냥 흐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오늘은 김애란이 제37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날이라고 적혀 있다. 소소한 기록이 누군가에겐 큰 기록이 되겠구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재작년 부산만남 이후 세실님이 선물한 책이다. (세실님 고마워요)

그때 리뷰를 쓰지 못했지만 재미나게 읽었던 책, 특히 말(언어)과 말의 청춘, 말의 늙음을 생각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들추어 본다. 벤자민 버튼은 아니지만 아름이의 조로증을 소재로 한 기이한 이야기에 덩달아

삶의 수수께끼같은 조각들에 속으로 웃고 울었던 기이한 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의 말을 빌자면) 유독 말과 글을 빨리 깨쳤다고 한다. 암기력도 좋아서 말이 아직 더딘 나이일 적에

업고 길을 가며 간판글자를 보고 가르쳐주면 단번에 글자는 물론 순서까지 그대로 외우더라는 말씀을 하실 때

엄마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기까지 한다. 어린 생명은 이렇게 모두 누군가의 자랑이고 기쁨이지 않을까.  

말이 운명이 될 줄은 아직 모르는 거지.

 

한 곳의 주간에게 전화를 받았다. 싹싹한 그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살갑지만 한 대 얻어맞은 듯했고 부끄러웠다.

일 년 전의 제안을 다시 건넸고 나는 또 막막해졌다. 달갑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다시 거부하기도 납득되지 않을 상황이라

난감하기도 하고 갑자기 다소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나 스스로에게 감동스럽지 못한 말들의 허무한 잔치가 아닌가 하는 수줍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신작 청탁 앞에선 그동안 살아오며 몸에 익힌 말들이 어딘가에 갇혀서 글로 나오기 쉽지 않은 지경이란 걸 고백할 수 없었다. 너무 손을 놓고 있었던 듯, 병이 얕지 않게 든 것 같다. 좋지 않은 기운에 세뇌당한 느낌도 들고.

 

인생을 사랑하는, 육체만 노쇠한 열일곱의 아름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11p)

 

 

 

김애란은 아름의 말을 빌어, 말들은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다고 회억한다.

조로증에 걸린 말들에 대한 반성, 혹은 질타!  사랑 또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다.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양상으로 지리멸렬하게 전개되는. 그건 이런 뜻일 거다.

무수한 말들, 다감한 말을 포함해 화를 불러일으키는 무책임하거나 무분별한 말까지 어느 것도 또렷이 생각나지 않는

어릴 적 시절이 있듯이 사랑의 기억도 또렷이 생각나지 않는 희미해져가는 연기자국 같은 것이다.

아름이는 이렇게 그 시절을 복기한다.

 

물론 그 시기에 한 말이 무엇인지 또렷이 생각나진 않는다.

언어의 한정된 어떤 부분, 그러니까 동심원의 가장 안쪽과 접촉한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아니, 그건 너무 일찍 도착한 맨 가장자리 원일지도 모르니까.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사람이 언어와 조우한 첫 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신의 섭리가 궁금할 따름이다.

만나되 만나지 않게 하신 것. 먼저 배우고, 잊어버리게 한 뒤, 다시 배우게 하신 것.

그런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71p)

 

 

 

언어와 사랑, 사랑과 언어. 구원의 수단으로는 최상일 거라고 희망하는 그 기이한 세상과 조우한 첫 순간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다시 배우게 만들고 좌절하거나 다시 기뻐하거나 일련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들게 만들고

다시 구제 또는 화해하게 만드는 신의 섭리가 나는 궁금하다.

그렇다면 한 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말들도 사랑도 매번 젊은 게 아닐까.

성장을 거부하는 양철북 소년처럼, 고착된 그 세상이 좀 낯뜨겁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첫'일 수밖에 없는, 영원히 두렵고 설레고 고통스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는. 

나는 오늘도 내일도 생소하고 생경한 말들, 날것의 감정, 조야한 것들과 좀더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배우기 위해서. 이성적이지 않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운명, 당신, 깊이를 알 수 없는 편평함,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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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8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8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1-09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님 새 글 기다렸어요.
이 글 읽고 자러 갈게요.
꼼꼼 읽고나면 늦게 일어나게 생겼네요. 책임지시와요.^^*

프레이야 2013-01-09 14:22   좋아요 0 | URL
팜님, 이렇게나 늦게 주무세요? 전 새벽에 깨서는.ㅎㅎ
좋은하루 보내세요^^

2013-01-09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3-01-1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저질러요........ 저질러요!
화이팅!!!

프레이야 2013-01-13 11:46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도 화이팅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