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화창한 얼굴을 보이던 하늘이 봄비를 다시 내려주시고,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아침, 창비시선 신간알리미로 마음에 확 들어오는 시집이 선물처럼 내게 왔다.
신간알리미가 와도 곧바로 잘 담지 않는데 이건 장바구니로~
김중일 시인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
김경주 시인의 추천사도 못지 않게 유혹한다.
: 김중일의 시는 허수와 같은 호명으로 가득하다. 그의 호명부에는 “낯선 자의 인기척”이 순열을 잃고 배회한다. 그의 언어들은 어느 나라의 동화인지 알 수 없는 세계로 열기구를 타고 날아간다. 그가 만든 이 열기구의 마법에서 “고양이는 새의 그림자”로 호명되기고 하고 “단 한번도 슬픔이 지나간 적 없는 새의 얼굴”이나 자신의 “무릎에 물을 주는 아이”나 “달의 주요성분” 같은 망중한의 이름을 얻기도 한다. 그의 마법에 걸려 ‘세계’로 들어온 화자들은 한번도 잠들지 못한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으로 불쑥 우리를 불러들일 줄 아는 이 호명술을 가진 시인은 자신에게 지금까지 들려준 적 없는 이야기의 주형을 지어놓고 그들이 스스로 꿈틀거리기를 기다린다.
(알라딘, 김경주 시인 추천사에서 일부 가져옴)
지난 주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 3권, 이것들 야곰야곰 맛보고 있다. (각각 문학과지성, 창비시선, 문학동네)
지난 토요일 하루종일 몹시도 내리던 봄비, 그 탓만은 아니지만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팠는데
그 시간에 고의로 내 마음을 후벼파고 내 마음을 우롱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더라.
어리석게도 믿으려 무던히 애썼던 수많은 시간이 일순간 하찮은 것이 되고
용서하지 않아야할 일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서 내치는 것으로.
홀가분하다. 충분하다. 나를 온전히 믿고 오래 바라보며 지켜준 대상들에 계절처럼 화답할 일만 남았다.
버려서 빈 공간에 시(詩)를 좀 채워야겠다.
언젠간 주검(屍)이 될 시(時)를. 있어도 없었던 많은 '시'를.
[내 생의 중력]은 좋은 시 엮음시집이다. 홍정선, 강계숙, 엮은 이 두사람의 취향이 작용했겠지만
엄선한 것이라 대체로 어긋나지 않는 것 같다. 익히 아는 시와 시인도 있고 아닌 것도 있더라.
이렇게 통속미 당당한 뜨끈한 시도 있다. 류근의 '반가사유'.
좋다. 이 시 담긴 류근의 시집 [상처적 체질]도 장바구니로.^^
반가사유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류근, [상처적 체질](375)에서
[내 생의 중력] 중, 100-10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