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이정록 

 

원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뭘 써도
좋다 원고지 다섯 장만 채워와라! 다락방에 올라 두근두
근, 처음으로 원고지라는 걸 펼쳐보니 (10x20)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럼 답은 200! 구구단을 뗀 지 두어 달,
뭐든 곱하던 때인지라 원고지 칸마다 200이란 숫자를 가
득 써냈다 너 같은 놈은 교사생활 삼십년, 개교 이래 처음
이라고 교문 밖 초롱산 꼭대기까지 소문이 쫙 펴졌다 그로
부터 십오년, 나는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글이 콱 막힐 때
마다, 그 붉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른다
그때 나는, 이백과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는 막연한 운명
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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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내 인생의 키워드'라는 물음이 던져진 적이 있다.
그때 난 '글쓰기'라는 답을 떠올리긴 했는데 좀더 확연한 대답을 못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정쩡한 상태의 나를 발견했고 내 모자란 열정과 부족한 무엇에 때론 역으로 더 느긋해져버린다. 
변명하자면, 머리 좀 정리하고 곧 다시 심지를 당겨볼 생각이다.


내가 글로 처음 입상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교내 백일장에서 난 운문 '산길'이라는 시를 원고지 4-5장에 썼고 상장을 받았다. 
그때 내가 바랐던 건 엄마의 무조건적인 칭찬이었는데 엄마는 꼭 비평을 곁들인다. 
그후 날마다 썼던 일기글도 그렇고 시조대회 나갔던 일도 그렇고 칭찬에 비평이 곁들여지니 맛이 없다.
작은딸이 쓴 산문이 교내 학예전에 시화로 전시되어있다. 곧잘 쓴다.
나는 칭찬에 무능하지는 않았는지...  그건 그렇고,
나로 말하자면 누구처럼 막연한 운명을 적어넣었던 건 아닐 테고
누구처럼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르는 '붉은 우물'은 아니어도 검은 우물 하나는 있는데
그 우물 하나 내 안에 웅숭한 아가리 딱 벌리고 있는데... 

막연한 운명?
생은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막연한 운명, 뭐 그 비슷한 그림자는 감지하게 되는 게 또 생 아닐까.
큰아이가 수능을 치고 구술면접과 논술을 보고 돌아왔다.
일단은 성적표 나오기 전까지는 후련해하고 편히 있어도 좋을 듯하면서도
나나 아이나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아이가 원하던 곳에 합격할 수 있기를 빈다.
그래도 이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자.
당장 퍼머에 염색에 화장까지 하겠다고 야심차다. ^^
그 얼굴이 너무 깨끗해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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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11-2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4학년 때였던것 같아요 ^^
그땐 쓰는 게 참 재미났었어요
방학 숙제 중에 글짓기 숙제가 가장 좋았고 가장 먼저 했는데
지금은 쓰는게 먹고 사는 일이 되어서 쓰는 즐거움이 사라졌네요

프레이야 2011-11-22 08:41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도 4학년 때군요.^^
일이 되고 의무가 되면 즐거움이 덜한 거 맞아요.^^
그래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봐요 우리!
뭐든 신이 나서 해야 결과도 더 좋겠지요.

순오기 2011-11-22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을 가하는 어머니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주춤~~
검은 우물~~~~~~ 지난 번 아버지 이야기에 읽었던 거군요.^^
열심히 노력한 따님에게 좋은 소식 날아들기를 기원해요.

프레이야 2011-11-22 08:49   좋아요 0 | URL
어릴 땐 그게 참 야속하게 들리고 많은 부분 의기소침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애들한테 안 그러려고 하는데 저도 가끔 저질러요.ㅎㅎ
좋은 소식, 언니네 아들도요.!!
그동안 마음이 불안하여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서재에도 안 왔네요.ㅠ

양철나무꾼 2011-11-2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정록 시인하면 '불주사'가 기억나요.
프레이야님, 오랫만이예요.
참 반가워요, 와락~^^

프레이야 2011-11-22 17:45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동시에^^
'정말'이란 시집에 실린 시들이 모두모두 좋더군요.
걸쭉한 입담에 삶의 포용과 해학이 묻어나요.
몸은 다 나으셨나요? 전 다시 감기로 골골 머리가 깨질 듯합니다.
이번달 써야할 글들 하나도 못 쓰고 그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