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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폴오스터의 책 세권을 세트로 구매했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이다. 책이라기보다 무슨 사진첩, 아니 비밀 일기장 같기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정도의 하드커버가 그 옛날 살며시 펼쳐서 독백을 하곤 했던 일기장을 닮아있다.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자신과 25년 이상을 동행한 타자기에 바치는 독백과도 같다. 글의 분량이 많지는 않다. 그저 이 책을 독특한 느낌으로 만드는 것은 샘 메서의 유화 그림이다. 살아움직이는 근육으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한 타자기의 그림이 각양각색의 색채와 율동으로 그려져있다. 물감을 덕지덕지 찍어 그리기도 하고 활자들이 날아가기도 한다. 폴 오스터의 캐리커쳐 또한 개성만점이다. 타자기 자체로도 도시의 어둡고 밝은 분위기가 교차하며 묻어난다.
이 작은 책을 보며 수동식 타자기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된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타자를 배우려고 타자학원에 갔다. 수동 타자기가 작은 교실의 책상에 한 대씩 놓여있고 나는 그중 한 곳에 앉아 그 타자기란 녀석과 첫대면을 했다. 무척 딱딱하고 둔탁한 느낌을 주며 무뚝뚝하게 버티고 있는 그 녀석은 어디 해볼테면 해 보라는 식으로 눈을 껌벅이며 있었다. 첫날 그 녀석을 치는데 손가락에 오는 감각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틱특틱틱.. 이런 소리가 탁탁탁탁... 경쾌하고 리듬감있게 울리게 될 때까지 한 달 정도가 걸렸다. 쉬운 영문타자부터 학원에서 배우고 한글타자는 타자기를 집으로 대여해와서 혼자서 연습했다. 한여름에 그 무거운 녀석을 들고 버스를 타고 집까지 와서 한 달을 연습했다. 그리곤 돌려주었는데 돌려주는 날 다소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따로 연습할 타자기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진 않았나싶다. 그 해 여름날의 땀이 그 녀석에게 배어있었을테니 말이다.
한 줄을 치고 나면 오른쪽에 있는 바를 돌려밀어서 행을 넘기고(철커덕~) 타닥타닥 또 글자를 친다. 요즘 문서작성의 글자체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때 그 타자기의 글자체는 홀로 매력이 있다. 가늘게 아래로 흐르는 직선의 느낌이 강하면서 어딘지 불균형의 인상을 준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에서의 글자도 이 타자기체로 되어있다. 하얀종이를 옆에 쌓아두고 종이 한 장에 글자를 다 쳤으면 다른 종이를 끼워가며 글자를 치는 재미도 있다. 좌측 라인을 잘 맞추어 끼워야 비뚤게 나오지 않는다. 먹끈을 가는 것도 재미있다. 먹끈을 새로 갈고 나면 글자가 갑자기 진하게 보이며 선명하다. 잘못 끼워서인지 어떨땐 시커멓게 번지기도 한다.
대학 3학년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던 그 사람은 논문을 쓴다며 우리집에 자기의 수동타자기를 가지고 와서 하룻밤을 꼬박 작업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아끼던 언더우드 수동타자기였다. 밤새 토닥토닥 두런거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예리하게 가르던, 그런 풋내 나는 열정의 시절이었다. 나도 그 타자기가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왠지 푸근하니 정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사람같이 말이다. 원래가 곰살스럽지 못한 나는 별로 애정의 손길을 주진 않았지만 결혼을 하고 몇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그 타자기를 계속 데리고 다녔다. 쓰진 않고 골동품처럼 방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어디 치웠는지 이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거의 일 년 동안 무심히 잊고 있었던 게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은 우리가 무언가 몰두하고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것에 대한 단상이다. 종류는 다소 다르지만 20년전 남편이나 내가 망망한 대해를 헤쳐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작업으로 대면했던 수동타자기에 대한 회상을 참으로 오랜만에 해 준 책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오디오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해서 카메라에도 남다른 애착과 조예를 보인다. 그런 열정과 집요함, 물건에 담긴 혼과도 소통하는 영혼이 사람을 좀 달리 보이게 하는 요인이라면 나의 그런 대상은 무엇일까? 나의 동반자격인 그 무엇을 지금부터라도 찾는다면 그만큼 나의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게다. 그 대상에 몰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