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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과 탐정들 ㅣ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26
에리히 캐스트너 글, 발터 트리어 그림, 장영은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케스트너는 나치에 반발하고 현대인과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글을 썼던 지식인으로 독일에서 알려져있다. <로테와 루이제>에서도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작가인데, <에밀과 탐정들>은 1920년대의 작품이지만 전혀 뒤떨어진 시대감각을 느낄 수 없는 언어감각과 유쾌한 사건전개가 읽는 이를 적당한 긴장감과 만족감으로 끌고 간다.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유머가 깃들어 있고 재치도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들어가는 말을 독특한 방식으로 쓰고 있다. 가상의 두 사람을 등장시켜서 동화의 글감을 찾아내는 방식과 동화를 쓰고 읽는 방식에 대하여 대화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으로 책읽기를 시작하게 한다. 작가 자신의 동화에 대한 소신이나 철학 정도로 파악하면 좋을 것 같다. 에리히 케스트너는 간단히 책으로 만날 수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캥거루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고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곁에서 늘 볼 수 있는 어린이(우리 자신이 어린이이기도 했으니까)에 대하여 쓰는 것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방바닥에 누워서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말로 관점이나 눈높이를 조정하여 모든 걸 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워서 보면 서서 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파 밑에 처박혀있는 잃어버렸던 양말 한 짝 같은 것이다. 그리고 꼼짝 않고 누워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기억을 붙들어야한다. 쉽사리 움직여서 움켜잡으려하지말고 가만히 조심조심 그것들의 목덜미를 잡아야한다. 이제는 그렇게 모은 기억들을 순서에 맞게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동화를 쓰기 전 해야할 일들에 대한 재미있는 비유였다.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작가는 비중있는 장면 10가지의 삽화를 먼저 보여준다. 연필선만으로 그려놓은 삽화도 개성있다. 10장면의 삽화를 보며 이야기를 요약하며 꾸며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작가는 에밀이라는 호감가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에밀은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일하여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는 엄마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모범생이다. 꽉 막혀 자신의 일에만 안달하는 모범생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자기주도적이고 용의주도하며 예의도 바르고 자존심도 강한 아이다. 엄마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리고 의젓하게 행동하는 아이다. 엄마가 힘들게 마련해 준 140마르크를 자신의 실수로 잃어버리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찾으려고 범인을 추격하는 에밀은 낯선 베를린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의 힘을 얻어 범인도 잡고 거액의 상금도 받는다.
독일이 한창 재건을 하던 시절에 태어난 이 동화는 군데군데 현대문명과 현대인에 대한 예리한 지적도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에밀과 탐정들의 쾌거에 촛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덜 부담스럽겠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의외로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선 우정과 거액의 상금으로 대변되지만, 아이들의 일상에서 어려운 수학문제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머리를 짜내어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이란, 뭐든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과실이다. 결과가 다소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소소한 기쁨들은 반드시 있다.
일명 '에밀작전'으로 불린 에밀과 탐정들의 이야기는 신문에 대서특필 되고 에밀과 그의 어머니는 유명인사가 된다. 에밀의 외할머니는 이번 사건으로 얻은 교훈은 다름아니라 '돈은 전신환으로 보내야 된다'는 것이란다. 작가는 자칫 강요될 수 있는 자신의 의식이나 드러내고 싶은 교훈을 이런 식으로 살짝 비켜나간다. 독자를 이야기라는 강의 흐름에서 유유히 또는 거칠게 떠다니게하다가 어느새 강가에 다다라 배에서 내려 옷을 툴툴 털고 가볍게 웃고 걸어나오게 한다.
에밀이 돈을 잃어버린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는 대목은 흐뭇하기까지 하다. 낯선 곳에 무작정 내려 그곳에서 전혀 모르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우정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돕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아이들. 이들은 아이의 얼마 안 되는 돈을 훔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못하고 거짓말을 하며 발뺌하는 파렴치한과 대조되어 비친다. 엄마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대화는 많이 하지 않는다는 '교수'라는 아이는 너무 엄격하지도 않고 허용적인 에밀의 엄마를 부러워한다.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를 생각해보게 한다.
자신의 고장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에밀도 베를린의 풍경에서 좋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낯선 곳, 낯선 경험들이 에밀을 자라게 하고 있다. 탐정이야기만으로도 솔깃한 내용이지만 재치있고 거리낌없는 대사와 사건전개가 작가의 동화쓰기에 대한 기본 생각을 잘 드러내주면서 적당히 가벼워서 더 재미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