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자명한 산책] 중

 

김형경이 '사람풍경'에서 의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인용한 황인숙의 시 '강'의 전문이다. 

사랑이나 우정의 가면을 쓰고 행하는 상호의존 혹은 공의존 관계,
그런 방식은 서로 병적으로 의존하는 상태여서 두 사람 모두에게 위험한 관계였다고,
그런 관계에 고착되면 내면의 좋은 성향을 발현시킬 수 없고, 성장을 향해 노력할 수 없고,
내 삶을 추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끝에서 피면담자가 느끼는 감정에 '고립무원의 느낌'이 있다고 한다.
"아무한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의존성이 극복되는 지점,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할 때 맞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 [사람풍경]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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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11-09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잘 읽었습니다. 라깡선생님도 황인숙 시를 좋아하나 보군요

프레이야 2010-11-09 23:09   좋아요 0 | URL
자명한산책님 오랜만이에요.
라캉 선생도 강에서 만나면 우리 모른 척 하자, 이러며
네힘으로 굳건히 서라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거에요.ㅎㅎ

blanca 2010-11-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을 펼치면 줄이 좌악좍 그어져 있어요^^;; 고립무원, 맞아요. 이 대목에도 줄을 그었던 것 같아요. 의존은 사실 친밀함이 아니라 결국 관계가 어그러지는 지점이 되는 것 같아요...황인숙님의 시가 참...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0-11-10 01:08   좋아요 0 | URL
밑줄 좍좍 정말 그래요. 맞아그래 이러며요.
홀로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 때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합당하고 일그러지지 않을 것 같아요.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나 가서 말하라죠.
사람은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죠.

꿈꾸는섬 2010-11-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풍경>을 꼭 읽어야겠네요.^^

프레이야 2010-11-11 17:26   좋아요 0 | URL
김형경은 정신분석을 받았대요.
스스로도 어떤 땐 일그러져 있다고 느껴지는 내면의 정체와 뿌리를
알게 해주는 책이에요. 조근조근 나직하게 이야기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