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은 굴욕적인 항복문을 찢었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자 의관을 벗고 대궐 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고 나서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조참판 정온도 칼로 복부를 찔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는데, 사관은 국치를 맞아 "강상과 절의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는데 이를 꺼린 자들이 김상헌을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보지 않겠는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뒤 김상헌은 안동의 학가산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그는 장령 유석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풍악문답>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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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를 "어가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에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의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나라님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역시 신하의 의리이다. 옛 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 " 하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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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상헌은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그는 시 한 수를 지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난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심양으로 끌려간 김상헌은 이후 6년 여를 청에 묶여 있었는데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64 - 66쪽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