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리운 이여」
최명희
나는 봄의 밤 강물을 보았다.
달도 없는 야청 하늘 검푸른 등허리에, 몇 점 별빛, 새로 돋는 풀잎부리 여린芽(아)처럼 눈 뜬 밤.
물 오른 어둠을 깊숙히 빨아들여 숙묵(宿墨)보다 더 검어진 산 능성이 반공에 두렷한 마루를 긋고
있는데, 그 산 그림자 품어 안은 밤 강물이 소리 죽여,
제 몸의 비늘을 풀며, 아득히 가득히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제 몸의 비늘을 풀며, 아득히 가득히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돌아오는 강물이었다.
언제라고 강물이 한자리에 서 있으랴만,
가을의 강물은 뒷모습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멀리 떠나가는 강물이요,
겨울 강물은 쓸쓸히 남은 그 물의 살을 벗고,
오직 뼈만으로 허옇게 얼어붙어 극한(極寒) 속에서 존재의 막투름을 견디는 얼음이다.
지난 여름, 무성하게 푸르러 눈부시게 젊고도 풍요로운 강물이
제 온몸을 수천 수만 수십만 개 은비늘로 찬연히 부수며,
물의 살 끝 끝에까지 차오르던 환희를 어찌 잊으리.
목숨이 누리는 영화에 여한이 없었다.
흰 돛 달고 두둥실 구름같이 배 띄우는 수면에 바람은 불어와 황금빛 노를 젓는데,
솟구쳐 뛰노는 은어떼, 비단고기, 자멱질이 숨 막히었지.
이윽고 해가 지면 밤이 익어 꽃술 터지듯 함성을 지르며 쏟아지던 저 별들의 무리.
살아서 아름다워, 이만한 충만이 어디 있으랴.
돌아보아 부러울 것 하나 없던 뜨거운 여름이 만월(滿月)이라 보름달같이,
시위 당긴 활만큼 넘치게 부풀어 아슬아슬한 고비 정점에 이르면,
이 어인 일이가, 아차,
한 순간 놓친 것이 그만 쏜살처럼 뒷모습 보이며 저만큼 흘러가 버리는 가을 강물.
가을 강물이 설명도 없이 투명하게 씻고 가는 모세혈관에,
그 여름의 잔정(殘情)은 이미 자취를 거두고,
이제는 온기 식어 텅 빈 실핏줄 메마른 굽이마다
홀로 남아 여윈 뼈가 쓸쓸히 일어서는 겨울이 왔었다.
그 여름의 휘황한 갈채 은비늘이 뒤집히어,
이제는 비늘마다 시퍼렇게 날 세우며 얼어붙는 겨울 강은, 침묵의 비수였다.
수천 수만 수십만 개 단도로 앙상한 제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겨울 강의 빙판 저 언저리에,
아아, 어느 날인가, 문득 연두 물빛 번지면서 소살소살 소살소살 발소리 들린다.
돌아오는 강물의 발소리인 것이다.
한꺼번에 다는 못 돌아오고 아주 조금씩, 강 언덕 가장자리 눈치 못채게 숨결로 스미다가,
드디어는, 날 세운 비수도, 거꾸로 박힌 단도도 고단하게 돌아오는 손으로 다 녹이어
깊이깊이 풀어주는 발소리가, 비어있던 온 강에 가득 차는 봄 밤.
이 강물은 과연 어디만큼이나 멀리 멀리 다리가 아프게 헤매어 흐르다가,
지금 이렇게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일까.
웬일인지 봄날의 강물은 눈물겨웁다.
눈물 섞인 강물이 제 몸을 적시어 일깨우는 산하(山河) 대지에
어찌 새 풀 돋지 않고, 새 꽃 피지 않으랴.
세우(細雨) 내린 언덕에 버들은 아스라지게 애달픈 연두 머릿단 감아 빗고,
더 못 숨길 마음 같이 봄의 가슴 문지르며 피어나는 무리무리 연분홍 진달래,
보라색 제비붓꽃, 노란 민들레, 풀섶에 패랭이꽃, 장다리, 배추꽃, 홍자색 산철쭉,
논에는 자운영, 밭에는 쑥부쟁이, 들에도 피어나고, 산등에도 피어나고,
응달진 골짜구니, 흥건한 물가에도 얼마든지 피고 또 피는 봄꽃들의 저 황홀한 잔치는,
천지를 오색 교성(嬌聲)으로 자지러지게 한다.
돌아온 안도의 저 빛깔들이여,마음놓고 어우러져 서러울 것이 없구나.
봄 하늘에 새 울고 나즉히 일렁이는 아지랑이 꿈결같은데,
그 갈피 간질이며 고개 젖혀 색색깔로 웃는 꽃들의 향기와 짙어지는 풀빛들은,
모두 다 새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들이다.
겨울 강은 봄 물을 나무라지 않는다.
홀로 빈 겨울을 묵묵히 견딘 저 해토(解土)의 대지 또한.
네가 나를 무참히 버리고 가, 내가 너를 이토록 기다리게 하였으니. 보라.
꽃 진 자리 멍든 상처, 길고 긴 회한을 내보이며 원망하지도 않는다.
겨우내 얼어터진 발등과 오래오래 기다리다 메마른 앙가슴을 두드리며,
포원(抱寃)진 설움에 목을 놓아 울지도 않는다.
그저 다만 그 돌아오는 강물이 촉촉하게 스며든 대지의 젖은 살은,
긴 겨울의 무거운 비늘을 벗고, 꽃비늘 벗고, 다투어 다투어 흐드러지게 피어날 뿐이다.
그러나, 이 봄이 무르익어 여름이 넘치면 가을은 또 뒷모습 보이며 흘러가고,
꽃도 지고 잎도 지고 낙목한천, 다시금 겨울이 강물과 대지의 세상을 혹한에 내던지겠지.
그 도취와 상실과 아픔, 그리고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들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은,
흡사 약재 숙지황(熟地黃)처럼 느껴진다.
이 봄날의 장독대 언저리에 막 잎사귀 돋아나는,
숙근초(宿根草) 다년생 풀뿌리 지황은,
엄지손가락만씩한 뿌랭이를 조롱조롱 줄조롱으로 달고 있는데.
생지황 그대로 먹어서 혈증(血症)을 다스리기도 하지만,
구증구포(九烝九曝), 아홉번 찌고 아홉번 말리어 숙지황으로 만들면,
이것은 허손증(虛損症)에 쓰이는 보혈(補血), 보정(補精)의 소중한 한약재가 되었다.
허손증이란, 사물에 허기를 느껴, 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가지고자 덤비는 것이라 하던가.
약성이 무거운 숙지황은,
알갱이 빠져버린 헛껍데기 빈 몸에 허기를 가라앉혀 잡아주고, 피와 원기를 만드는 데 긴요한 약이다.
그러나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다.
축사밀(縮砂密)의 씨 사인(砂仁)을 넣은 술 사인주에 생지황 뿌리를 취하도록 담갔다가,
햇볕에 꺼내어 바싹 말린 다음, 이번에는 뜨겁게 찌는 숙지황.
그것도 그냥 찜통이나 솥에 넣고 잠깐 찌는 것이 아니라,
불가마를 만들고는 거기에 쌀알만큼씩 굵은 모래를 채운 뒤, 모래 속에 지황을 묻어놓고,
그 위에 자갈을 무겁게 덮어서 함봉을 하여, 나뭇가지 정하게 꺾어 오래오래 공들여 뜨겁게 쪘으니.
지금이야 그리 하기 어찌 쉬우랴마는,
옛날에는 산 속에서 약 짓는 노인들이 도(道) 닦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똑같은 순서를 아홉 번씩 되풀이했다 한다.
한 번으로 끝난대도 결코 수월치 않을 것을,
지황은 묵묵히, 소스라치게 독한 술에 담그어졌다가,
폭건(曝乾)으로 묵어 목이 타게 말려졌다가, 한중보다 더 무섭게,
마지막 수분이 다 빠지도록 쪄졌다가, 다시 처음부터 단 한치 달아날 길도 없이
그 일을 당하면서 조금씩 약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것을 어찌 하루에 다 할 수 있으리오.
지황으로 태어난 한 세상을
그렇게 오직 온 몸뚱이 목숨을 찌고 말리는 일에 다 들여야 했으니,
지황이 만일 사람처럼 생각 있어 문득 돌아본다면,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기품을 자랑하는 왕후장상 소나무도 아니요, 뜨락의 군계일학 모란꽃도 아닌,
일개 풀뿌리로 태어나 별로 누린 것도 없이,
무슨 좋은 날 기약된 것도 아니면서 어이하여 이와 같은 곤욕 과정을 견디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그가 약재(藥材)로 난 탓이다.
약재 아니더면 그러할 리 천만 없는 혹독지경을 숙지황은 몸소 겪으며,
긴긴 나날, 취하고, 울고,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처럼 제 몸 트고 쪼개져 저 실핏줄의 마지막까지 다 마르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불덩어리 불가마 한복판에 이글이글 파묻혀 뜸질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그 몸에 점점 술(滿)이 없어지는 지황은,
본디의 물 많고 노르스름한 살덩어리를 벗어가고, 조금씩 독성을 거르고,
드디어는 쫀득쫀득 정혈만 남아 새까맣게 엉긴 약재로 값지게 태어나는지라. 잡티와 한숨과 허상도 다 버린.
한 번 찔 때마다 흑칠 같은 윤택이 단맛과 함께 자르르 깊어지는 숙지황은,
또 한 번, 다시 한 번, 찌고 찔수록 약효가 더욱 신묘해진다.
장독대 언저리의 하찮은 풀뿌랭이 하나도,
제가 가진 약성(藥性)을 제대로 발휘하게 하려면 이와 같을진대,
사람이라면 그 어찌할 것인가.
사람이 제 값나게 살아서, 눈빛만 맞추어도 약이 되고, 소리만 들어도 허기가 가시며,
그가 다만 목숨 가진 이승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온기 도는,
그러한 날을 이룰 수 있으려면 과연 몇 증 몇 포를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이 일생에 모진 일을 세 번만 당하여도 그만 다 늙는다 하는데. 풀뿌리만 못할 리 있으랴.
아무러면 사람같이 오묘한 것 하늘 아래는 다시 없을 터인즉. 약이라면 사람만한 약 어디 있을까.
그대, 괴로운 이여.
누구의 아픔과 허손에 쓰이려고, 그토록 제 몸을 약으로 달이고 있는가.
그러나, 꿈에라도 슬플 일 없는 이를 부러워 말라.
낮도 밤도 없이 너무나 밝은 태양만 내려쪼이면
제 아무리 기름진 옥토라도 부스러져 사막이 되고 마는 법이니,
나를 찌며 번민으로 구증구포,
눈물이 나를 적시우는 불면의 밤이야말로
나의 대지에 스스로 내리는 단비가 아니랴.
술 보다 더 독한 인연에 대취(大醉)하여 고꾸라진 이여.
내가 바라는 생의 소망 그 무엇이 아직도 발소리를 풀지 않는 침묵의 봄날,
견딜 일 많은 시름을 잠시 놓고, 저 흐르는 물, 피는 꽃을 바라볼 일이다.
'사랑이여, 이제 너도 돌아오라.'라고 부르던 어느 시인의 노래 한 소절 손짓을 간절히 마음에 담고,
이 봄의 밤, 숙지황같이 검은 강물 돌아오는 물비늘 이랑을 나는 보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내 이 가슴에 약이 덜 차 아직 이 봄이 약(藥) 봄이 아니어든.
천지에 난만한 꽃 피어나 독하게도 휘황하여 아득한 어질머리 일으킬지라도.
그대여, 내 아직 약 아니 되었거든 더디 더디 오시라. 조금 더 홀로 두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