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지나 재독. 기존 밑줄과 메모에 다른 것들이 더 보인다. 오스틴의 표현대로 2인치 상아에 입힌 섬세한 세공, 부자연스러운 시작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 라는 말에 공감. 세상을 뜨기 2년 전 1815년에 초고 “엘리엇 가 사람들”로 집필 시작, 이듬해 초고를 완성하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 1817년 언니 커샌드라와 윈체스터로 치료를 위해 거처를 옮기나 두 달 후 영면에 든다. 완성작으로는 마지막 작품.
다른 작품과 비슷하게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 주인공으로 하여금 인물들의 참모습과 위선을 알아채게 하고, 남녀간 진실한 이해와 소통의 노력이 이루어내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첫장면부터 구체적 연도를 내용에 기술한 점이 특이하고 섹슈얼리티와 계급, 권위를 부여받은 자의 펜으로 적히지 않은 미시사를 거론한다. 여성의 삶, 가족과 떨어진 선원으로서 가난한 가장으로서의 삶. 갈등을 종결하고 사건의 해결을 맞게 하는 여성끼리의 솔직함과 유쾌한 우정이 부각되는 점은 비슷하다. 후반부에서 하빌 대령과 나누는 앤의 낮은 목소리에 독자는 웬트워스만큼이나 귀를 쫑긋하게 된다. 오스틴이 낮추거나 숨겨서 냈던 목소리로 들린다.

"제가 말했듯이, 우리는 결코 이 문제에서 합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아마 어떤 남녀든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역사를 봐도 그렇고, 산문이건 운문이건 모든 이야기들도 당신에게 불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싶군요. 벤윅처럼 기억력이 좋다면 당장에라도 제 주장을 뒷받침해줄 인용구를 오십 개쯤은 댈 수 있을 텐데. 제평생 여자의 변심을 거론하지 않는 책을 본 적이 없어요. 노래도 속담도 모두 여자의 변덕을 얘기하지요. 하지만 아마 당신은 이 모든 게 남자가 쓴 거라고 하시겠지요 "
"아마도 그렇겠지요. 네, 그래요. 책에 나오는 예를 드는 일은 삼가해주셨으면 해요. 남자들은 자기들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어느 모로 보나 우리보다 유리했던 거지요. 높은 수준의 교육도 펜도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어요. 책으로 뭔가를 증명하려는 건 안 될 일이지요."
"그럼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요?"
"결코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 문제에 대해 뭔가 증명할 수 있다고 기대하시면 안 되죠. 증거로 판가름할 수 없는 견해의 차이니까요. 어쩌면 남녀 모두 처음부터 각자의 성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 P310

이 모든 것, 남자가 자기 삶의 보배인 존재를 위해 견뎌낼 수 있는 모든 일들, 성취해낼 수 있는 모든 위업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전 다만 심장을 가진 남자들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감정에 복받쳐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아!"앤이 열렬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지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고 당신 같은 남자들이 느끼는 모든 것을 온당하게 대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따뜻하고 신실한 감정을 하찮게 본다면 벌받을 일이겠지요. 제가 감히 진실한 애정과 절개는 오로지 여자들만의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경멸받아 마땅할 겁니다. - P311

"…… 저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눈을 질끈 감은 채 당신을 이해 하려고도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누렸던 축복은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는 만족감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명예로운 노고와 정당한 보상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지요. 인생의 패배를 겪은 다른 위대한 인물들처럼."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저도 제 의지를 누르고 운명을 따르도록 해야겠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몫 이상의 행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요." - P328

그녀라면, 절대적으로 부유하고 완벽하게 건강하면서도 여전히 행복할 수있었을지도 모른다. 스미스 부인의 지극한 행복감이 활기찬 성격에서 비롯되었다면, 앤의 경우엔 따스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앤의 성품은 온유함 그 자체였고 그러한 성품은 웬트워스 대령의 사랑 안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그의 직업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온유하고 섬세하지 않았으면 하고 친구들이 바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있을지 모를 전쟁의 두려움만으로도 햇살 같은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져버릴 수 있었다. 앤은 선원의 아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국가적인 중요성보다 가정적인 미덕으로 더 돋보이기도 하는 직업에 속한 탓에 그녀는 마치 세금을 지불하듯 만약의 일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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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4 1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평이 너무 좋으신거 아닌가요? 저 오스틴 이제 그만 읽으려다가 수하님이 <설득>이 제일 좋다고 해서 지금 읽으려고 줄세워놨거든요. 근데 프레이야님 이런 평 보면 진짜 기대만발하게 된다고요. ^^

프레이야 2022-11-14 19:38   좋아요 2 | URL
세 자매 중 둘째 앤 엘리엇이 주인공인데요 다른 작품처럼 구도가 비슷하지만 다르고요.
오스틴의 좁은 공간에서의, 최선의 역사의식 같은 게 분명히 보입니다. 여성의 입장만 강요하지 않고 남성의 진심도 내치지 않네요. ^^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작품을 더 썼을까 싶어요

다락방 2022-11-15 09:33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저도 제가 읽었던 오스틴 중에선 [설득]이 제일 좋았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11-15 09:51   좋아요 0 | URL
다코타 존슨이 앤으로 나온 영화를 봤는데 역시나 그 시대 자연풍경이 저는 참 좋아요. 영화엔 스미스부인은 뺐네요. 레이디 러셀이랑 찰스 가 사람들 모두 아프리칸으로요^^

다락방 2022-11-15 10:23   좋아요 0 | URL
네 저 다코타 존슨이 좋아서 영화를 봤거든요. 오래전에 설득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없게 읽었고 오만과 편견과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영화 좋아서 책 다시 봐야지, 하고 보니 책이 엄청 재밌더라고요!! ㅎㅎ
그리고 다코타 존슨 너무 예쁘지 않나요. 설득에서도 너무 예뻤고요 설득은 그리고 영화음악도 엄청 좋았어요!!

프레이야 2022-11-15 10:56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다락방님. 그죠^^ 앤을 화자로 한 점도요. 아내 잃은 벤딕 대령이 침울한 얼굴로 바이런 시를 시작하자 바로 이어서 읊으며 시만 읽어선 안 된다던 똑똑한 여자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