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변화의 코드를 읽어라 - 시장을 지배하는 법칙, 글로벌 스탠더드
전성철 지음 / 청년정신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21세기가 열리고 나니, 자동차는 하늘을 나는 대신에 아직도 땅으로 쌩쌩 달리고, 사회보장이 실현되어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온한 삶,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삶이 준비되었는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일을 하며, 시간에 쫓기지만 항상 불안한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세계화로 인하여 물질적인 풍요가 더 해져 만인이 행복을 누릴 줄 알았는데, 몇 몇의 극 소수가 한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불균형은 심각해졌다. 이런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의 코드'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글로벌 스탠더드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국적중립, 인종중립, 성별중립, 연령중립적인 개념이다. 무조건 떡을 빨리, 잘 키우기만 하면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인 것이다(19쪽)' 아울러 세계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하고 있다.
지은이는 변화의 코드와 앞으로의 다가올 세기(31쪽) 등을 예언자적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는 지구는 하나의 '촌(마을)'으로 가속화되어 갈 것이며, 이는 무한 자유 경쟁 시장 논리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무조건 떡을 빨리, 잘 키워'야만 살아 남을 수가 있다. 하지만 시장이 죽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71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복잡화되고 있으며, 지금 현재 시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더욱 인식시키는데, 어떠한 논리로서 조절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울러 시장을 '욕심쟁이가 되도록 해주는 제도', '남을 해치지 않는 이상 마음껏 자유를 주는 제도'라는 정의는 우물안 개구식 정의이다. 견물생심이라 했든가? 앉고 나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남을 해치지 않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의 논의는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논의 되어야할 문제를 다시 꺼집어 내어, 새 코드인냥 이야기를 건낸다.
문화를 떡으로 보는 시선은 시장 만능주의를 채택한 지은이의 사고관이 아닐까 한다. 혹 그렇기 때문에 문화를 통한 삶의 행복 추구가 아닌 눈에 급급한 수익을 추구하지 않는가? '자유와 욕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을 하게 하며, '인류의 떡이 자연스럽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록 커(69쪽)'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미국민들이 비만으로 인해 소비하는 돈을 다른 빈민국가에 나누어준다면 그들은 곤궁에서 벗어난다고 했다. 지은이의 말대로 인류의 떡이 커진다 하여도 이는 통계에 의한 것이지, 인류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는 하지 못한다.
그는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으며, 무한 세계의 경쟁이 인류의 떡을 키워준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가져야 한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논의가 너무 단순하며, 깊은 성찰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을 했지만 참고문헌이나 통계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듯해 매우 실망스럽다. 그의 사고적 깊이로 인하여 보완이 된다면 별 문제이지만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 된 이유를 봉건제도가 해체되면서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봉건제도의 해체가 산업발전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었는지 몰라도 '아니 전 세계에서 시민에게 자유를 가장 먼저 허락한 나라(75쪽)'라는 점에서는 의구심이 드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이는 지엽적인 문제 일 수도 있지만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때에만 그의 모든 논의가 신빙성을 얻을 것이다.
차라리 변호사였으면 적어도 숨겨진 이미지로 인해 신비감을 얻었을테지만 어설픈 글쓰기로 무엇을 얻을려고 했다면, 그는 불성심함과 단순한 사고관에 대한 확신을 나로 인해 얻었을 것이다. 더 읽을 가치가 없기에, 절반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여담: 동아일보 1,26일자 신문에 '로드릭'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美 하버드大 교수의 스탠다드 신봉에 대한 기우(조언)가 나와있다. 아쉽게도 한 장의 신문면이 더 가치있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