맬서스를 넘어서
레스터 브라운 지음 / 따님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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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안을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뿐이다.

간혹, 바다 건너 나라를 티비나 책으로 보면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산업화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로 설정하고서는 앞 만 보고 달립니다. 여기에는 "00님이 너희를 특별히 사랑하사"라는 우월의식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닌 뫼를 올라서 정복하듯(登頂), "자연을 정복하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든 그들이 하나둘씩 변화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연을 무시한 개발은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할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큰 변화는 아니지만 조금씩 자연에 대해 우월이 아닌 동등 의식을 지니고 같이 지낼려고 하는 듯 합니다.(하지만 그들이 진정 인간의 오만함을 벗고서 자연에 대한 동경을 지녔는지 아니면 소나기를 피하 듯 일시적인 돌파구로서 자연과의 동침을 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러한 동등의식은 기계의 난개발을 막으며, 인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모색을 하게 합니다. 아스팔트 위에 돌을 깨고서 나무를 심는가 하면, 베란다에 화분을 놓아두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수고를 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극적인 반전"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즉 기계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한 일 백 년 전의 기계파괴운동이 일시적인 노동자들의 생존투쟁있다면, 지금 기계를 보는 눈은 나라에 큰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제가 아닌 질의 문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중,후진국들은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 기계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선진국들이 던져준 사탕에 길들여저 그것을 쫓을려 합니다. 분명 사탕을 받아 먹을 수 있는 나라가 몇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은 받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선진국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 내 안의 금덩어리는 반으로 나누어 가질려고 하지 않기에, 인류는 극을 향해 무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기계만이 인류에게 문제인가? 지은이는 기계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인류의 증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인류는 기하급수적을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은 현재에 많이 부정됩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텍스트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즉 지은이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에 대한 식량의 산술급수적 문제만이 아닌, 인구의 증가로 통한 19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식량생산, 수자원, 생물다양성, 에너지, 해양 어획량... 등등 이러한 문제는 맬서스가 제기한 텍스트에 갇혀진 것이 아닌 좀더 광의의 의미를 지닙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맬서스의 관점에서 다시 문제제기하여, 확장된 사고로,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 대한 우려를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꼭 기하급수적 증가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비교하며 현시점의 문제를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분석을 내어놓습니다. 이렇게 내어 놓는 분석이 어느것 하나 장미빛 미래가 없으니, 걱정일뿐입니다. 이런 걱정과 더불어 책을 읽는 내내 제 머리를 무겁게 한 것이 흔히 말하는 개도국에 관한 점입니다.

"국가들이 물공급 한계에 다가섬에 따라서 분야간의 물 경쟁이 가열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농업 분야는 물사용의 효율이 떨어진다. 값어치는 200달러에 불과한 1톤의 밀을 생산하려면 1,000톤의 물이 소비되는데, 그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하면 생산고를 1만 4,000달러 늘릴 수 있다. 이러한 70:1의 비율은 공업과 농업이 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할 때 왜 공업용수가 우선권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증가하는 수요가 공급한계에 부닥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농업용수를 전용하여 늘어나는 생활용수 수요를 만족시킨다. 그리고는 농업용수의 부족으로 감소된 식량생산을 벌충하기 위해 곡물을 수입한다. 1톤의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0톤의 물이 필요하므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은 곧 물을 수입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인구증가가 매우 빠르고 나라마다 물부족에 직면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1990년대에 곡물수입이 가장 빨리 늘어난 지역이다.(34쪽)"


ㅜ.ㅜ
단순히 무역을 통해 물물교환의 발달형식으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는 말이 농촌에는 나돕니다. 불과 20~30년 전 만 하더라도 똥을 밭에 뿌리고, 벼 짚단을 논에 갈아업고 하여 농사를 짓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똥은 돈주고 버리고, 벼 짚단을 불살라 버리고 그 자리에 농약과 비료를 줍니다. 이렇게 길들여진 농촌은 농약과 비료 아니고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사고의 전환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약과 비료는 아주 쪼끔 아주 쪼끔의 문제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식량난과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얻어지는 막대한 부를 거머지고 위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중동 국가는 선진국들이 흘리고 간 고철에 입맛이 길들여져 다시한번 농사를 포기할 것이고, 그때에는 식량 주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추석이 다가오기전 벌초를 하러가곤 하면, 뫼 마다 오동나무가 많은 이유를 아버지는 지겹지도 않은 듯이 해마다 들려 주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일본 사람들이 오동나무를 많이 사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은 순진해서인지 일본사람들이 정말 오동나무가 많이 필요하여 사가는 줄 알고, 일본에 팔려간 오동나무(묘목)를 비싼 돈 주고 사오는 것이다. 너도나도 오동나무가 돈이 되는 줄 알고, 일본사람들이 파는 오동나무 묘목을 사왔지요.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급급하여 일본의 상술을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순간 오동나무를 많이 사는 것처럼 보여, 오동나무 묘목으로 우리나라에 되팔은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에 팔아서 부자가 되려는 환상에 사로잡힌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빚만 지게 되고, 오동나무를 사 가져 안으니 뫼 마다 오동나무일 수 밖에요. 오동잎 하나 떨어지면 온 천지에 가을이 옴을 느낀다 했든가요? 하지만 내게 오동나무는 순진한 우리 어머니아버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난 그 환상을 지금도 보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는 선진국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산업국가와 개도국을 가릴 것 없이 결핵.이질.HIV/AIDS를 포함한 많은 전염병의 발병률은 빈곤과 나쁜 건강상태에 시달리는 도시 빈민가에서 매우 높게 나타(55쪽)"나지만 남을 침략하기 위해 살상 무기를 만들기 위해 투자하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단순히 인구 증가에 따른 문제가 인류의 총체적인 문제를 낳을 수도 있지만 가장 피해를 보는 곳이 선진국을 제외한 우리라는 점입니다. 낯은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선진국을 견제하고 새로운 대안을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쪽 수에서 짐작할 수가 있듯이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2~3장에 하나의 문제제기를 하다보니, 이미 정해진 답을 쫓는 듯합니다. 이런 점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다른 문제와의 상관관계는 어떻는가에 대한 분석은 없습니다.

두번째, 앞서서 말했지만 단편적인 편린은 19의 문제를 유기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하나하나 때어놓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씩 나열된 문제는 우리는 너무 어두운 구석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물에 빠진이는 어떻게든 살려고 하지 "아이고 나 이제 그냥 죽는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아직 우리는 물에 빠졌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너무나 한 곳 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되기를 단정짓는다고 해야할까요, 미래라는 것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회이며 우리가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제게, 너무나 굳은 사고를 보여줍니다.

세번째. 과연 이 모든 문제가 인구의 증가로 인한 문제인가라는 점입니다. 인구가 증가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제 생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진국들의 기계문명에 대한 환상, 개도국을 인류의 공존문제로 보는 것이 아닌 약탈 내지 신식민지화하려는 사고에 기인한다고 보여집니다.

지은이들의 인구 문제에 대한 제기를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선진국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점은, 시선이 다름을 느낍니다. 아울러 어떤 지은이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을 믿으며, "신좌파의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연대가 결성되 인류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것이라 믿습니다.

작은 책이지만, 그 문제제기와 시선, 그리고 생각의 다양성은 감히 쉽게 깊이를 논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또한 조금의 시선이 다른 점은 새로운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것이라 생각을 가집니다.

덧붙임:..위의 책은 절반 정도 밖에 읽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내용적 깊이가 앞의 연장 선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다면 겸허히 수용합니다. 아울러 다 읽지 못하고 성급하게 올렸다고 비판을 하시더라도, 존중합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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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 지식인과 그 사상 1980 - 90년대 당대총서 13
윤건차 지음, 장화경 옮김 / 당대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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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어릴 적 부터 하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항상 누구를 존경하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나는 쉽게 대답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내 오만함이나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지에서...ㅜ.ㅜ 조금은 여유롭게 혹은 부모님들의 열성적인 교육적 환경에 자란 아이라면 집에는 위인전기가 장식장처럼 좋은 자리에 모셔져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바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내게,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의 기준이자 전부였습니다. 그분들의 부지런함과 사람을 대함은 진실로 본받을 만 하지만 세상을 좀 더 알고 싶은 내 욕심은 채우지 못했습니다. 아울러 옛 위인의 이름이 친구들의 입에서 줄줄, 장마비처럼 쏟아질 때면, 난 부끄럽지 않다라고 자위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먼산을 보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하나둘 만나는 위인의 글, 한 줄 정도를 읽고는 전부 읽은냥 자랑스러워하며 떠들곤 했습니다. 학교 공부에 몰두하지 못하고 책을 쪼끔씩 읽은 동안 말재주는 늘어 났으며, 이제 역전환이 되어 아이들은 나를 다른 눈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 이런 착각도 스스로의 짐을 벗겨내지는 못합니다. 즉 난 말을 타고 산천을 주유한 것이지, 걸어다니면서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와 풍경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간혹 친구들에게 비판을 받는 것이, "너는 너의 생각이 없으며, 온세상의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니 생각을 말하라."라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아직 체계화 되지 못하고 한두개의 언어를 외워서 이야기 하고, 내가 말을 옮기는 사상가들의 가치관을 깊이 있게 거슬러 내지 못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간혹 머리에 스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난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을 보고 싶은 욕심에 빠졌고, 찾는 책 중에 하나가,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입니다. 4여년 전에 신문을 통해 잠시 보았지만, 지금에서 내 곁에 온 책. 난 지은이의 눈으로 본 한국의 사상을 읽으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좀 더 체계적으로, 내 생각을 말해야지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읽기를 하여야겠지요. 그럼 내가 비판적으로 읽은 지은이의 세계관을 따라가 보실레요?

3일이 지난 다음,
책은 3일 동안 계속 읽었습니다. 공장에는 출석수업이라는 좋은 핑계를 되고서, 방통대학교 출석수업에 참석하여 책만 읽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다 되어, 지금 마무리를 짖지 않는다면 언제 될지 몰라서, 교수님의 열성적인 강의를 배반하고 고등학교 때 처럼 덩치 큰 사람의 뒤에 앉아서 계속 읽어나가섰습니다. 3일 동안 열심히 읽은 책을 조금 풀어 낼려고 하니... 몇 번이고 망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책에 대한 글쓰기를 하여야 할까? 몇 번을, 몇 시간을 두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답은 하나입니다.

나를 위한 글쓰기이지 남을 위한 글쓰기가 아닌 이상, 나 자신에게 솔직하자!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지식인과 내가 친구들에게 듣는 말 중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과연 누구를 본보기로 삼았냐 하는 점입니다. 선진지식을 받아 들임에 나라의 관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사회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선보이는 혹은 낯설어 보이는 몇 몇 외국 이론을 최신이론인냥 토해내는 듯한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럽의 몇 몇 나라와 아메리카의 나라, 우리는 제3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환상을 읽는 듯해 많이 씁쓸해졌습니다. 스스로의 고뇌에 찬 비판이 아니기에, 개구리밥처럼 그들의 이론들도 강물에 이리저리 뜨 다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즉 그들과 난, 사회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해답을 찾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여쭙쟎은 지식 하나로 무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은이의 노고에 의함이겠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민중(시민)에 대한 따스한 배려와 그들의 사상 설전을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자기 배가 부른데, 굳이 남을 챙기는 모습에서 과연 지식인이란 저런 모습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음에 말하겠지만 지은이는 지식인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불안해 보이지만, 계속적인 탐구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오늘날의 지식인이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고 진보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위의 말은 관념론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다시 생각을 되내여보지만, 과연 내 머리에 얼마 만큼의 지식이 쌓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지은의 탐구에 대한 저의 개인적 시간차가 심했습니다. 서기 1970년대 생(生)인 제가 80~ 90년대의 사상을 읽어내고 비판한다는 것 자체는 아직 무리였습니다. 몇몇 낯익은 이름이 나와 기분이 좋았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아울러 작은 책에 많은 이름들이 거론되다 보니, 그들의 사상을 지은이의 핵심적인 몇 몇 단어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과연 한 사람의 잣대를 단 몇 줄로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점은 저에게 의문점이며, 내가 처음 만난 사람을 이런 금(線)을 긋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라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몇 몇 아쉬운 점은 지은이는 과연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그리고 앞서서 말한 지은이의 개념 설정을 하였는가라는 점입니다. 제가 잘못 읽지 않은 이상, 그는 이 책에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평소에 마음으로 잣대를 긋어 놓은 금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나는 지은이가 말하는 진보의 몇 몇 지식인을 무작정 수용하여야 하며, 보수를 인정해야 합니다. 언어의 정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설정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점이 책을 덮고 나서 들었습니다.

지은이의 치열한 노고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하지만 1980 ~90년대의 지식인에 대한 개념 설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은이가 거론하는 인물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공부가 결여되어서, 수박겉핧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성급하게 책을 접하지 않았나 생각을 가져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로 인해 좀 더 성숙한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다음에 다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한동안 친구들에게, 니는 남의 이론을 빌려와서 그럴 듯하게 이야기한다는 말을 더 듣을 듯 합니다.

추신: 1980년 ~90년대의 한국 지식인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서술했다고 말하면, 너무 단순화시켰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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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메이의 일기
에스메이 코델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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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고전으로 남을 작품. 왜 난 여태 몰랐을까? 그의 마음이 설레임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인생에 대한 완숙미가 조금은 부족하다 하더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을 하며 자기를 잃어갈 때에 다시 한번 집어 보아야 할 책 임에 두 말할 나위가 없다하겠습니다!!

한 때 나도 선생님을 꿈 꾼 적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 열심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선생님이 되고자 한다면, 고등학교 때 까지의 성적이 중요하지 뒤에 나이가 들어서 찾아온 꿈에 대해서는 엄청난 노동이 뒤따릅니다. (그림 클릭)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나요?

이 메모장에 적는 바람에...복사가 되지 않아서 그림파일로 저장을 하여, 이미지 올리기를 했습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세요. 참...너무 교장을 구박하는 듯한 마담 에스메이의 행동. 교장 선생님이 더 불쌍해 보이네요~~

안보이신다구요? 그렇다면 노란 바탕을  클릭 한 번 해 보세요. 원 화면이 다시 하나 뜰꺼에요^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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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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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래의 서평은 부분적 고찰임을 밝힙니다.

영웅으로서의 인류학자(110~128쪽)"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진지한 사유 대부분은 실향失鄕의 정서에 맞서 싸우고 있다.(110쪽)

그렇다면 과연 실향의 정서는 무엇이며,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이러한 정서를 지은이는 레비스트로의 [슬픈 열대]에서 찾아낸다. 레비스트로는 과거 지향을 꿈꾸는 낭만적 철학자 혹은 인류학자이다. (비인간적인 속도로 변해가는 역사는 정신적 구토감을 선사해준다.)

이들은 치유할 방도를 더 악화시키는 일-"타자 안에서 자기를 구하는 것(110쪽)"이라 생각을 하고 "아시아에서, 중동에서, 문자 사용 이전의 종족 가운데에서, 신화 속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곤해진 이성은 성적 환희나 약물이 주는 비인간 에너지(111쪽)"에서 갈구한다. 이러한 구원을 레비스트로는 서기1938년 브라질의 열대에서 본다. 그는 섬세하고 자신의 체험을 사용-풍광에 둘러싸인 자연, 신체의 고달픔, 구세계와 현대의 도시, 여행에 대한 생각, 일몰, 현대성, 학계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사색-하여 글쓰기를 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지은이의 눈에 엄청난 믿음을 선사하고, 책의 가치를 한없이 더 높인다. 레비 스트로스는 호기심 강하고 야망에 찬, 지적 카타르시스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원(119쪽)"으로 비춰진다.

지은이의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헌사는 "[슬픈 열대]는 우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책에 들어간다. 이 책은 엄격하고 섬세하며, 그 사유는 힘에 넘친다. 이 책은 아름다운 필치로 쓰였다(113쪽)"고 감탄한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지적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그의 책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철저히 억제된 정념(126쪽)"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념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1915년경에 발가벗고 궁핍하지만 잘생긴 유목민 부족 남비콰라족의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938년, 그가 방문할 때에는 고작 2천 명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 증인"자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장 증인은 분노를 할 줄 알지만 분노를 하지 않는 절제를 가져야 한다. 스스로의 객관성을 잃어 버린다면 그가 보는 시선은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주관성을 뛴다. 이러한  주관성이 과격해지면 선동성과 결합할 위험이 다분하다.(물론 지은이는 선동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거나 너무 빠져들면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허탈한 웃음을 멍하니 짓다가 지치면 웃음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즉 울음을 운다는 것은 고통을 외부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외부적 고통이 쌓이게 되면 사람은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너무나 너무나 슬픈 열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증인"이라는 어려운 길을 낯서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여기서는 논외(論外)로 합니다.)

"제목부터가 아주 억제된 표현이다. 열대의 사람들은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 신음한다. 강간에 대한 공포,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선사 부족의 붕괴-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책이 다룬 진짜 주제였다-가 일정한 거리, 15년 전이라는 개인적 경험의 거리를 둔 채 논의된다. 단호한 견해, 독자들이 좀더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수많은 사실들과 더불어, 그러나, 나머지 저서를 보면 그 학문적 심각성 때문에 저 투명하고 고뇌하던 관찰자는 결딴 나 추방당하고 없다.(126쪽)"

지은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냉철하고 정확성을 지는 관찰자로서의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찰자에 대한 콩깍지는 다른 여타의 사상가를 쉬이 나누어 버립니다. 

"사르트르는 사상만이 아니라 감수성 전반을 보더라도 레비스트로스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단주의자요, 지칠 줄 모르는 창의성과 복잡성의 소유자인 사르트르는 언제나 (대개 나쁜 태도인) 열광자의 태도를 지녀 왔다. 장 주네, 즉 자기 도취 때문에 모든 객관적 서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이하고 설교적이며 거들먹거리는 작가요, 수음手淫을 일삼는 주인공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은유와 기상奇想으로 가득 찬 터무니없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스타일을 사용하는 유희와 책략의 대가인 장 주네야말로 사르트르가 가장 열광하는 작가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조와 감수성에는 또 다른 전통, 즉 초연함, 혹은 기하학적 정신을 숭배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주네와는 너무나도 다른 전통으로서, 끊임없이 정확성을 추구하고, 될 수 있는 한 건조하게 자신들의 주제를 다루며, 현미경처럼 냉정한 문체를 사용하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126쪽)"

즉 글을 표현하는 수단을 지은이는 위와 같이 이분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감정을 거름종이로 거스르지 못하고 발산하는 류와 그렇지 않고 안으로 싹이며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모습의 글쓰기로! 이러한 이분법의 시선만으로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연, "냉정한 문체"를 쓰는 것 만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사르트르 등이 "자아 도취"에 빠져 있다할지언정 "객관성"이나 "정확성"을 잃어버리고 글쓰기를 한다고 나는 믿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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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성 주네], 나탈리 사토르의 소설(144쪽 ~171쪽)" 중심으로

"우리 시대에 도래할 소설은 예술의 '진보'라는 생각, 전위라는 은유가 보여주는 방약무인할 정도로 공격적인 이데올로기 같이 일체의 미심쩍은 관념들에 연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독자들이 산문으로 된 허구에서 새로운 즐거움-가령, 문제를 해결하는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이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독자층이 제한될 것이다(예컨대, 우리는 눈으로가 아니라 입으로 큰 소리를 내며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소설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이를 평가할 자격이 되려면, 몇 번을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진지한 시, 그림, 조각, 음악이라면 몇 번씩 다시 읽거나 듣거나 본다는 것이 이미 일반적인 생각이 됐다). 또한, 소설은 형식을 진지하게 실험하기 원하는 모든 이를 자의식 강한 미학자, 훈계를 늘어놓는 탐험가로 만들 것이다('현대 moden' 예술가는 모두 미학자다). 술술 읽힐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미덕, 오래 지속되어오던 시대에 뒤떨어진 미학을 소설이 이런 식으로 포기한다면, 틀림없이 지루하고 잘난 체하는 책들이 양산될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왕년의 자의식 없던 시절이 되돌아 와주기만을 빌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가는 치러야 한다. 독자들은 새 세대의 평론가들이 우리를 현혹시키는 어느 정도 기만적인 미사여구를 통해서라도 이 꼴사나운 시기의 소설을 억지춘향으로 밀어붙이면서, 이런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강요하는 상황을 겪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158쪽)"


 이러한 평가는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평가하는 점 에 나타난다.

지은이는 이 그림을 "자연의 형상을 연속되는 동적인 단면으로 쪼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목적 이외(153쪽)"에는 아무것도 없다한다. 작품을 내어놓고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즉 작가들은 쉬운 글쓰기를 통해, 쉽게 접근해야한다고 누누히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함정에 지은이의 글도 포함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읽고나면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한번 큰 소리를 읽는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지전능한 작가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읽는 사람을 연민에 차 눈물 글썽거리게 만드는 것이나, 소란스러운 풍자, 자신의 주인공들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 그리고 독자인 나 역시 그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162쪽)"

 

또한 지은이는 위와 같은 점을 멀리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레비스트로를 보는 시선과 동일하다. 레비 스트로스가 흥분하여 [슬픈 열대]를 "기쁜 열대"로 만들자고, "예술을 정복한 교훈주의라는 새로운 양식(153쪽)"으로 고함을 질렀다면 그는 위와같이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은이는 세 가지의 색체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흥분을 통하여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멀리한다. 어떠한 주관적 경험에 놓이더라도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두번째로는 진보나 개혁이라는 무늬아래에 "교훈주의"로 위장한 "권위주의"를 멀리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에 지식은 상대적이다. 즉 어떤 이가 지식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상대적이고, 불확실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전부 옳다'는 명제를 가질 수는 없다. 세번째는 쉽게 글이 쓰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자칫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은이는 사람의 가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과 포용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강요나 주관적 흥분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서 흥분에 쉽쌓이면 무조건 좋은 책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는 책이 실로 좋은 책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끝>

나름대로 이 책에 대한 접근법을 정리하자면...
1. 해석학에 반대한다/ 스타일에 대해(19쪽 ~68쪽)을 읽은 다음에,
2. 차례에서 어느 부분을 골라 읽는다. 물론 자기가 읽은 책이 있다면 비교하며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책은, 여러 책이나 글쓴이에 대한 견해를 지은이가 밝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말합니다. "교훈주의로서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분명이 교훈주의적 색체를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은이가 말하는 책을 읽지 못하였기에 긍정적 수긍을 하여야 하며, 글을 어렵게 적었기 때문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책은 171쪽 까지 읽고, 책장을 덮었습니다.
생략, 지은이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상통하는 부분이 많으며,
          앞부분에서 글쓰기에 대한 견해를 충분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읽지 않은 책을 계속 거론하는 지은이의 시선이 나와 엇나갔으며,
          쉽게 글이 쓰여지지 않았기, 의미를 이해하는데 대한 수고가 엄청나다.
          모든 것은 이해하더라도, 어렵다는 점에서 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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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스모그 -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데이비드 솅크 지음, 정태석 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작정하고 논의를 들어갑니다.  (@u@)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을 두고 "정보의 바다"라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무한 정보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 무엇이든 다 만들 수가 있습니다. 간혹 티비로 보여지는 사건사고속의 뉴스는, 누구누구가 인터넷상에서 자료를 구해서 폭탄을 만들어 폭발을 시켰다느니 창고에 완성품의 탱크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흘려 보낸다. 이렇게 보여지는 모습에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절대시하게 되었으면, 어느 노랫말 처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환상에 사로잡혀져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일방적 사고가 장미빛 미래로 비쳐줬기 때문입니다.

"일단 당신이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을 비동시적으로 만든다면, 또한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정보)고속도로는 마술처럼 묘사되는 능력들을 가능하게 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 쉽게 좋게 만들기 위해 작동하는 기술을 대변한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리키기만 해라. 그러면 빠르게! 당신은 그것을 얻을 것이다(152쪽)"

하지만 지은이는 이러한 장미빛 미래에 딴지를 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한면만 본다고 안타까워한다. 그가 이렇게 안타까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의 경험적 세계관에서 축출된 사고에서이다. 그는 정보가 힘이라는 생각에, 정보기기 판매업자의 "정치, 문화와 관련된 주요 사건들의 핵심 내용을 문서 형태로 제공하는 연방 뉴스 서비스Federal News Service(18쪽)"를 받지만, 그가 원하는 만큼의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원하는 기사를 스크렙 하기 위해서 간단한 버튼 조작을 하였지만 "한 문단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 프린터는 12개의 사본을 인쇄해 놓(20쪽)"았습니다. 즉 기기는 "내 능력이 자신의 성능과 같아지기"로 설정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의 편리성을 위해서 기기를 설치 해 놓았지만 사람이 읽어 내려가는 속도보다 더 많은 정보의 양의 인쇄하는 프린터는 또다른 스모그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과연 인터넷(주1)이라는 무한 정보가 가지는 질적인 면이 무조건 옳은지에 대한 검증을 합니다.(주2)

우리는 지금 정보 비만이라는 경고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데이터 스모그라 하여야 하는가? 이런 점에서 지은이는 조금 어슬프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했고 환영받지 못하는 우리 주변 환경"="정보 시대의 유해한 쓰레기들을 표현하는 것(33쪽)"이라 합니다. 즉 예기치 못했고 환영받지 못하는 정보 시대의 유해한 쓰레기들을 데이터 스모그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일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전부터 정보는 존재해 왔으며 우리에게 모두 환영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은이가 말하는 정보 시대의 유해한 쓰레기들을 표현한다는 자체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정보 시대라는 말도 그럴듯한 이미지의 포장에 불과합니다. 정보가 어느 한 순간에 소중하지 않거나 힘이 안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지금은 다른 점은, 거시사에 대한 논의를 하던 이론가들이 미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혹은 물건을 하나더 팔아먹기 위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정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으며 이러한 접근이 쉽다는 점입니다. 즉 정보의 쉬운 접근성이 데이터 스모그를 만들어 낸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쉬운 접근성에는 쉬운 창조성을 포함됩니다. 인터넷은 상방향성을 지향하면서, 스스로를 창조자 내지 발견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문단에 등단하거나 높은 창작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편안하게 적으면 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장면이나 자연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고가(高價)의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용돈이 있으면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여 누구든지 사진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즉 쉽게 표현하는 자유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기준점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통제로서의 정보가 악용(?)되었다면-이는 권력자들의 통치 수단으로 보는 단편적 세계관입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정보를 표현하게 하여 스스로를 정보 속에 가두는 전략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주3))

옛날에는 정보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거나 이렇게 표현의 욕구가 충만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문화가 크게 자랐다. 즉 누구든지 작가가 되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표현의 자유는 다양성이라는 일면을 얻었지만 어느 기준점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표현을 하되, 그 표현을 평가하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문단에 등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워버렸으며, 사진사는 비싼 기계로써 사진을 찍어야만 되는 것이 아닌 아담한 현실을 아름답게 포착해 놓아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정보의 양적인 생산이 데이터 스모그라는 이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앞서서는 평가 기준으로서의 정보를 말하였지만 그 가치의 진실성에 대한 점으로 본다면 분명 데이터 스모그를 읽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러한 정보를 읽어내는 눈을,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버립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신호의 자격을 갖췄고 또 무엇이 단지 잡음일 뿐인지 결정하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다. 각 개인들이 무엇이 잡음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개인적인 여과 기제를 고안해야 한다. 그러나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스모그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또 그 속에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질식될 것(236쪽)"이라는 판단은 너무나 쉽습니다. 모든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냉철한 시선은 정보의 진위 여부와 어느 것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지은이는 너무나 많은 정보의 표현과 그 속에서 가치 여부를 몰라서 방황을 한다는 명제에서 비켜서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는 수많은 정보를 스스로의 주관적 판단으로 취득을 하면 그만이겠지만-여기에는 정보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황을 나타낼 뿐이다-지금의 상황은 그 금(線)을 넘어섰다. 내 주관적 판단으로 정보를 골라내지만 그것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 가치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기에 얼마만큼의 유용성을 지는가는 또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의 세계관은 일방적인 정보의 흐름으로 보았습니다. 연방 문서 서비스를 쉴새 없이 해 주는 기계적 가치는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흘려보내는 정보를 프린터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공인들이 펼치는 정보에 대해서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앞서서 말했지만 누구나가 작가인데, 그 신뢰성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고, 원하는 것만 골라라고?

지은이는 이러한 대안으로, 사람들의 도덕성에 호소를 합니다. "정보화 시대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장황하거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정보를 사회로 뿜어내는 사람들은 정지 신호에서 자동차 문을 열고 도로에 쓰레기를 내버리는 몰상식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하지말자 합니다. 그는 획일성과 통일성으로 다양성을 죽일려고 하는가? 정보화 시대의 명제는 일방적인 정보의 흐름에서 상방향성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가 정보 제공자가 될 수 있으며, 이를 가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공하는 방법은 하나의 수단이며, 제공자의 취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표현될 수가 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장황하거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정보'만 없어진다면 데이터 스모그가 사라지게 된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는 순진합니다.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가서 넓은 시야로 깊은 성찰을 이루어내었으면 하는데, 지은이의 고찰은 강물위의 배처럼 상당히 붕 떠 있는 느낌입니다.

지은이는 몇 몇 대안을 내어놓지만 진부하기만 합니다.(231쪽 ~263쪽)

<끝>

주1)지은이는 인터넷이라는 특정한 매체를 선정하여 데이터 스모그 현상을 분석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위의 인터넷이라는 설정은 잘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한 정보의 인터넷에 처한 저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 보다 더 적절한 환경이 없을 듯 하여, 재설정을 하였습니다.

주2) 연인간에 헤어지면, 많은 아쉬움도 남겠지만 그 사람의 하나하나가 미워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에 우리는 또다른 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은이 역시, 누구보다 먼저 정보에 대한 힘을 믿었으며, 여기에 환상을 가지고 접근한 다음에 콩깍지가 벗겨진 것입니다. 고슴도치의 사랑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 세계관도 한 면을 지향한다고 인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정보의 환상과 데이터 스모그를 스스로 조화시켜, 자기만의 색깔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3)위의 논의는 상당히 무서운 표현입니다. 어떠한 논증도 없이 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정보를 통치 수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분명 멀리해야 할 부분입니다.


덤입니다 ^^;

첫째 : 지은이는 이러한 테이터의 스모그 현상이 이루날 수 있는 이유는 2*4효과(124쪽)로 설명을 하지만 조금은 부족하다. 이런 표현을 조금더 쉽게 설명을 나름대로 설명을 한다면 '티핑(Tipping :균형을 깨트리는 것)포인트'라는 개념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티핑포인트 가기 ->(http://www.aladin.co.kr/catalog/book.asp?UID=1142832195&ISBN=8988295528)

둘째 : 데이터 스모그에 대한 환상이 나와 지은이 사이에 조그마한 강이 있음을 느낀다. 내 관심사가 인테넷이기 때문에 여기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에 지은이는 아직 이러한 기술적인 발전의 시기에 놓여져 있지 않고 선상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터넷보다는 일상사에 피어나는 스모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너무나 깊은 강을 만들어 내며, 스스로 인터넷에 피어나는 데이터 스모그를 정리하도록 만든다.

우리앞에 펼쳐진 인터넷은 무한 정보의 양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인터넷상의 도메인 갯수를 80억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이 보다 더 많이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랭키닷컴 기준에 의하면 인터넷뉴스 사이트가 77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종합지나 스포츠 신문, 컴퓨터 관련 신문은 제외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 몇 개의 신문을 보면서 정보를 얻고 있나요? 다른 신문을 보지 못해서 불안하지는 않으신가요?

지금 인터넷을 통해 티핑 포인트를 먼저 설명해 보겠습니다. 싸이월드나 도깨비 뉴스, 엠파스 블로그 등이 엄청난 잠식력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싸이월드는 수익 모델이 없다하여 한동안 전전긍긍을 하였지만 네이트와의 합병을 통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도깨비 뉴스는 기존의 식상한 신문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발빠른 뉴스를 보도하여 불과 생긴지 반 년(年) 정도 밖에 되지가 않았지만 순위 200 안에 들었습니다. 엠파스의 블로그는 용량의 무제한으로 인하여, 네티즌들은 벽이 없는 블로킹blocking을 통해 무제한 스크렙을 한다. 즉 개인의 블로그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스크렙을 하는 것이다. 싸이월드의 인기나 도깨비 뉴스의 잠식율은 분명 일정 수준의 곡선을 그리다가 기하급수적(-이 부분이 티핑 포인트가 된다)으로 발전한 상황이다. 엠파스의 블로그는 처음에는 많은 정보가 돌아다니는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복-스크렙 기능-됨이 넘쳐난다.

아래의 그래프 참조

데이터 스모그

 

 

 

 

 

 

 

 

위의 그래프에서 보여지듯이 일정 기간 동안 그 변화는 미비하지만 티핑 포인트 지점을 지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즉 시간과 정보의 관계가 정비례 관계를 넘어서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변변히 일어나고 있으며, 개인의 성장이나 성숙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하자면, 싸이월드와 도깨비 뉴스가 그들만의 차별성으로 존재한다면 그 가치는 인정되며, 높은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엠파스의 블로그 처럼 무제한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에 접속을 하여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거나 정보를 얻어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된다. 아울러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더미에서, 급기야 손이 떨리는 불안 증세를 느끼게도 될 것이다.

예전에도 데이터 스모그는 존재했다. 하지만 지은이의 말처럼 주관적인 판단으로 선택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정보에 대한 가치가 묵시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상방향성이 아닌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정보를 얻든 그것은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돈을 벌었으며, 공부를 한 사람든 학자가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정보 제공자라는 점이다. 과연 정보에 대한 가치 평가를 어떻게 내리는가와 수많이 접하는 정보를 어떻게 선택할 것이라는 갈등에 놓여져 있다라고 보여집니다.

지은이의 기여는 "데이터 스모그"라는 실체를 알린 점에서는 분명 큰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7여 년 전(前)의 정보는 그 가치를 많이 잃었다고 보여집니다. 데이터 스모그에 대한 명확한 실체를 다시 설정하고 이를 극복하는 대안을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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