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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ㅣ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아래의 서평은 부분적 고찰임을 밝힙니다.
영웅으로서의 인류학자(110~128쪽)"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진지한 사유 대부분은 실향失鄕의 정서에 맞서 싸우고 있다.(110쪽)
그렇다면 과연 실향의 정서는 무엇이며,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이러한 정서를 지은이는 레비스트로의 [슬픈 열대]에서 찾아낸다. 레비스트로는 과거 지향을 꿈꾸는 낭만적 철학자 혹은 인류학자이다. (비인간적인 속도로 변해가는 역사는 정신적 구토감을 선사해준다.)
이들은 치유할 방도를 더 악화시키는 일-"타자 안에서 자기를 구하는 것(110쪽)"이라 생각을 하고 "아시아에서, 중동에서, 문자 사용 이전의 종족 가운데에서, 신화 속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혼곤해진 이성은 성적 환희나 약물이 주는 비인간 에너지(111쪽)"에서 갈구한다. 이러한 구원을 레비스트로는 서기1938년 브라질의 열대에서 본다. 그는 섬세하고 자신의 체험을 사용-풍광에 둘러싸인 자연, 신체의 고달픔, 구세계와 현대의 도시, 여행에 대한 생각, 일몰, 현대성, 학계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사색-하여 글쓰기를 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지은이의 눈에 엄청난 믿음을 선사하고, 책의 가치를 한없이 더 높인다. 레비 스트로스는 호기심 강하고 야망에 찬, 지적 카타르시스 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원(119쪽)"으로 비춰진다.
지은이의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헌사는 "[슬픈 열대]는 우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책에 들어간다. 이 책은 엄격하고 섬세하며, 그 사유는 힘에 넘친다. 이 책은 아름다운 필치로 쓰였다(113쪽)"고 감탄한다.
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지적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그의 책이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철저히 억제된 정념(126쪽)"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념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
1915년경에 발가벗고 궁핍하지만 잘생긴 유목민 부족 남비콰라족의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938년, 그가 방문할 때에는 고작 2천 명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현장 증인"자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 현장 증인은 분노를 할 줄 알지만 분노를 하지 않는 절제를 가져야 한다. 스스로의 객관성을 잃어 버린다면 그가 보는 시선은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주관성을 뛴다. 이러한 주관성이 과격해지면 선동성과 결합할 위험이 다분하다.(물론 지은이는 선동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거나 너무 빠져들면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허탈한 웃음을 멍하니 짓다가 지치면 웃음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즉 울음을 운다는 것은 고통을 외부적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외부적 고통이 쌓이게 되면 사람은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너무나 너무나 슬픈 열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증인"이라는 어려운 길을 낯서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여기서는 논외(論外)로 합니다.)
"제목부터가 아주 억제된 표현이다. 열대의 사람들은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고통 속에 신음한다. 강간에 대한 공포,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선사 부족의 붕괴-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책이 다룬 진짜 주제였다-가 일정한 거리, 15년 전이라는 개인적 경험의 거리를 둔 채 논의된다. 단호한 견해, 독자들이 좀더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수많은 사실들과 더불어, 그러나, 나머지 저서를 보면 그 학문적 심각성 때문에 저 투명하고 고뇌하던 관찰자는 결딴 나 추방당하고 없다.(126쪽)"
지은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냉철하고 정확성을 지는 관찰자로서의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관찰자에 대한 콩깍지는 다른 여타의 사상가를 쉬이 나누어 버립니다.
"사르트르는 사상만이 아니라 감수성 전반을 보더라도 레비스트로스와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독단주의자요, 지칠 줄 모르는 창의성과 복잡성의 소유자인 사르트르는 언제나 (대개 나쁜 태도인) 열광자의 태도를 지녀 왔다. 장 주네, 즉 자기 도취 때문에 모든 객관적 서술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이하고 설교적이며 거들먹거리는 작가요, 수음手淫을 일삼는 주인공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은유와 기상奇想으로 가득 찬 터무니없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스타일을 사용하는 유희와 책략의 대가인 장 주네야말로 사르트르가 가장 열광하는 작가라는 사실은 전적으로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조와 감수성에는 또 다른 전통, 즉 초연함, 혹은 기하학적 정신을 숭배하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주네와는 너무나도 다른 전통으로서, 끊임없이 정확성을 추구하고, 될 수 있는 한 건조하게 자신들의 주제를 다루며, 현미경처럼 냉정한 문체를 사용하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126쪽)"
즉 글을 표현하는 수단을 지은이는 위와 같이 이분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감정을 거름종이로 거스르지 못하고 발산하는 류와 그렇지 않고 안으로 싹이며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모습의 글쓰기로! 이러한 이분법의 시선만으로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연, "냉정한 문체"를 쓰는 것 만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사르트르 등이 "자아 도취"에 빠져 있다할지언정 "객관성"이나 "정확성"을 잃어버리고 글쓰기를 한다고 나는 믿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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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성 주네], 나탈리 사토르의 소설(144쪽 ~171쪽)" 중심으로
"우리 시대에 도래할 소설은 예술의 '진보'라는 생각, 전위라는 은유가 보여주는 방약무인할 정도로 공격적인 이데올로기 같이 일체의 미심쩍은 관념들에 연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독자들이 산문으로 된 허구에서 새로운 즐거움-가령, 문제를 해결하는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이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기 때문에 독자층이 제한될 것이다(예컨대, 우리는 눈으로가 아니라 입으로 큰 소리를 내며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소설 하나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이를 평가할 자격이 되려면, 몇 번을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진지한 시, 그림, 조각, 음악이라면 몇 번씩 다시 읽거나 듣거나 본다는 것이 이미 일반적인 생각이 됐다). 또한, 소설은 형식을 진지하게 실험하기 원하는 모든 이를 자의식 강한 미학자, 훈계를 늘어놓는 탐험가로 만들 것이다('현대 moden' 예술가는 모두 미학자다). 술술 읽힐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미덕, 오래 지속되어오던 시대에 뒤떨어진 미학을 소설이 이런 식으로 포기한다면, 틀림없이 지루하고 잘난 체하는 책들이 양산될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왕년의 자의식 없던 시절이 되돌아 와주기만을 빌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가는 치러야 한다. 독자들은 새 세대의 평론가들이 우리를 현혹시키는 어느 정도 기만적인 미사여구를 통해서라도 이 꼴사나운 시기의 소설을 억지춘향으로 밀어붙이면서, 이런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강요하는 상황을 겪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158쪽)"
이러한 평가는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평가하는 점 에 나타난다.
지은이는 이 그림을 "자연의 형상을 연속되는 동적인 단면으로 쪼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목적 이외(153쪽)"에는 아무것도 없다한다. 작품을 내어놓고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즉 작가들은 쉬운 글쓰기를 통해, 쉽게 접근해야한다고 누누히 말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함정에 지은이의 글도 포함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읽고나면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 다시한번 큰 소리를 읽는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전지전능한 작가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읽는 사람을 연민에 차 눈물 글썽거리게 만드는 것이나, 소란스러운 풍자, 자신의 주인공들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 그리고 독자인 나 역시 그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162쪽)"
또한 지은이는 위와 같은 점을 멀리한다. 이러한 가치관은 레비스트로를 보는 시선과 동일하다. 레비 스트로스가 흥분하여 [슬픈 열대]를 "기쁜 열대"로 만들자고, "예술을 정복한 교훈주의라는 새로운 양식(153쪽)"으로 고함을 질렀다면 그는 위와같이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은이는 세 가지의 색체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흥분을 통하여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멀리한다. 어떠한 주관적 경험에 놓이더라도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두번째로는 진보나 개혁이라는 무늬아래에 "교훈주의"로 위장한 "권위주의"를 멀리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에 지식은 상대적이다. 즉 어떤 이가 지식이 많다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상대적이고, 불확실성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전부 옳다'는 명제를 가질 수는 없다. 세번째는 쉽게 글이 쓰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자칫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은이는 사람의 가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과 포용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에 어떠한 강요나 주관적 흥분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서 흥분에 쉽쌓이면 무조건 좋은 책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는 책이 실로 좋은 책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끝>
나름대로 이 책에 대한 접근법을 정리하자면...
1. 해석학에 반대한다/ 스타일에 대해(19쪽 ~68쪽)을 읽은 다음에,
2. 차례에서 어느 부분을 골라 읽는다. 물론 자기가 읽은 책이 있다면 비교하며 읽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책은, 여러 책이나 글쓴이에 대한 견해를 지은이가 밝히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말합니다. "교훈주의로서 어떠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지만 제가 읽기에는 분명이 교훈주의적 색체를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은이가 말하는 책을 읽지 못하였기에 긍정적 수긍을 하여야 하며, 글을 어렵게 적었기 때문에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책은 171쪽 까지 읽고, 책장을 덮었습니다.
생략, 지은이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상통하는 부분이 많으며,
앞부분에서 글쓰기에 대한 견해를 충분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며,
읽지 않은 책을 계속 거론하는 지은이의 시선이 나와 엇나갔으며,
쉽게 글이 쓰여지지 않았기, 의미를 이해하는데 대한 수고가 엄청나다.
모든 것은 이해하더라도, 어렵다는 점에서 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