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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김훈,
몇 번의 눈 맞춤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낯설다. 그리고 왜 이렇게 자기를 숨기려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는 언제나 초연한 듯 하면서 철저하게 위장을 한다. 지금 권 70여 쪽을 읽어가지만 그의 자리가 눈앞에 다 그려지는 듯해,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그 깊이가 앞서 들어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혹시 처음 부분은 많이 어색했는데 일취월장(日就月將) 하여, 책을 덮는 순간에는 상상도 못할 반전을 가져다주는 장면은 아직 기대 속에 갇혀있다. 내 기대치가 너무 높게 설정되었나 보다. 책을 읽으면서, 정리에 정리를 하면서 메모 등을 한다. 이렇게 정리가 되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다 그려지게 된다. 읽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칼의 노래』 역시, 이 길 위에 비켜 서 있지 않다. 물론 내 짧은 지식에 의한 오만함으로 무장된 것일 수 있지만……. 난 내 믿음에 대해 거짓을 던질 수가 없어, 지금 기억을 하고 읽어가다 틀린 부분이 나오면 고치겠다. 분명 말하건대, 지금 적히는 글은 -책이 덮히는 순간에 고쳐질 수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감정이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에 크게 달라지지 않는 믿음도 놓치지 않겠다. 그러면 몇 쪽 읽지 않았지만,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드라마를 보면서 "재는 안 돼"하고서 혀를 차다가 거리에서 마주치면, "참 못 땠다"라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조선시대 소설이 읽혀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비분강개하여 그를 칼로 찔려 죽였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그렇기에 지은이가 말하는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면 소설이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특히 산인물(-人物)을 재창조하는 경우는…….
산인물을 재창조하는 경우는, 하나의 잣대가 있다. 그것은 옳든 그러든 '영웅(英雄)'이라는 군상이다. 시대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다시 불러내어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숨을 불어 넣어주는 이는 작가인데, 치열한 정신이 녹아든다. 하지만 자칫 소설 속의 주인공과 지은이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사람을 찔러 죽인 경우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즉 지은이의 자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창조하는 자리여야 하는데, 엉뚱하게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시(同一視)하는 경우가 일어난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자기 자신의 삶이 다르지 않다며 위안을 삼거나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함인데, 어떠한 경우이든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김훈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소설 속 이순신이 아닌, 현실 속 '김훈'의 자화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는 현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현실은 잘못되었으며,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혼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기보다 깊은 곳에서 '독야청정(獨夜淸淨)'하기를 바란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했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써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지은이의 말 가운데에서)
김훈은 이 짧은 글에서 스스로를 드러냄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나'라는 언어를 효율적으로 자리매김하여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강한 자의식을 나타냄이다. 강한 자의식은 세상과 물러섬에서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이라는 겸손함으로 오만함을 감춘다. 정말로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에 왜 그는 물러나는가? '희망'이 없기에!! 희망은 그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세상, 그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다. 싸우지 않고 물러섬으로써, 그는 지지않고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즉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글쓰기를 통해, 한 발짝 물러서 있으며,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인물이며,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정면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 인물을 그릴 수가 있다. 이러한 싸움은 이순신의 눈을 통해 '정의로운 세상'이 투영된다. 그가 보는 정의로운 세상의 단면은 다음과 같다.
조정(18쪽) -"그들은 헛것을 ?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다"
원균(27쪽)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끝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
승려(30쪽) -"승려는 함장한 자세로 영불을 외면서 칼을 받았다"
권률(32쪽) -"도원수 권률은 군관과 나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말은 살찌고 기름졌다"
아전(40쪽) -"나는 내륙지방 관아를 돌면서 징모부정 사건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버린 아전들도 있었다"
임금(49쪽)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정철(50쪽) -"정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김훈의 수사(修辭)는 임금의 수사보다 '장려(壯麗)'하다. 정철을 농부와 같은 부지런함을 살육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수사는 가히, 내가 이해 못할 언어이다. 더구나 그림을 보다 문득 생각나 살육을 지시하는 임금이 과연 임금인가? 조정의 신하들은 헛됨을 쫓고 있으며, 도원수 권률은 전쟁의 참담함과 괴로움 속에서 살찐 말 위에 올라서 있다. 이렇게 한 발짝 물러서 던지는 수사는 솔직히 아니꼽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단 한 줄로 무참히 살육하는 그의 수사는 참혹하다.
김훈은 철저하게 세상을 파편내고 있다. 이는 객관적 진실성보다, 그가 보는 세계관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눌려있다. 즉 그가 보기에 세상은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숨 쉴 수가 없으며, 정처 없이 떠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고 없어 뒤채이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38쪽)
김훈은 불안한 자아로 인해, 정처 없이 떠돌지만 바닷가 가운데 마음을 놓일 수 있는 섬이 있으니, 이는 여자이며 어머니이다. 그가 여진(40쪽)과 어머니에게 보여지는 깊은 애정은, 다음 아닌 마음의 안식처이다. 여자, 어머니를 안식처로 삼고, 나 아닌 모든 것은 '그릇되다'라고 한다. 이는 임금, 즉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34쪽)"
김훈은 임금의 무능마저도 '이해'할 수 있지만, 국가는 저버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국가를 저 버릴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조정에 불려가 심문을 당하지만, 헛된 싸움에 불과하며, 그들이 결국에는 내 발 아래 무릎 굻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60쪽)"
무서움은 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고, 무지는 가벼움과 다르지 않다. 임금의 무지가 가엾고 무서울뿐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한다.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61쪽)"가 됨은 '내가 임금'이 됨을, 아니 임금을 초월한 신성한 이가 됨을 의미한다. 이로써 임금 위에 신성한 이가 존재하며, 모든 실체는 거짓이며 사람들은 여기어세 옳고 그름을 찾는 가여운 짓을 하고 있다.
김훈은 이순신 속에 자기를 투시함에 머무름이 없다. 즉 어떤 특정 인물에 자기를 숨긴다. 이 인물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큰일을 한 사람이다. 이로써 자화상을 완성된다. 사람들이 그를 미워해도-나처럼-그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홀로 존귀'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세상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철저하게 스스로를 숨긴 지은이가 서 있다. 세상이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산야에 숨어, 홀로 고귀한 척 하는 모습 또한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인사-임금, 조정, 원균, 권률, 아전 등등-는 도를 넘어서 있다. 스스로를 숨김과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언사, 어머니에 대한 동경. 나는 이 모습에서 여섯 살짜리 꼬마아이를 본다. 그는 힘이 없지만 자존심이 강하며,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하지만 거리에는 나 보다 더 큰 아이들이 있기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치고 빠지기'식의 전략을 구사하며, 언제나 엄마의 치맛자락으로 숨는다. 어머니는 그의 영원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지은이의 글이 다름 아닌,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스스로를 철저하게 숨길까? 솔직하지 못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