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 하는 바람에 지금처럼,
다시 보기를 종종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처음인데^^;
진행자가 바뀌면서 진행도 바뀌게 되었는지....

초청식 이야기로 흘러가네요.

예전에는 다른 견해가 다른 이들이 나와서 서로 조율을
해 나가는 듯 했는데... 이번에는 일방적이네요.

정수일씨의 책은 『실크로드학』과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보고 얼마나 다양하고 깊이가 있고,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선생님의 모습에 존경을
표합니다. 아울러 놀라운 것은 선생님은 우리에게
은둔의 나라에서 교류의 나라로 확장시킵니다.
즉 지금까지 조용하고 숨죽인 웅크린 나라에서
수천년전부터 실크로드에 주류였다고 합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관 - 교과서적인 세계를 180도로 바꾸어
버리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기존의 틀을 바꾸어 버리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외워온 역사는 거짓인가?

상대적 혼란이 분명히 일어나는데.....

일방적으로 정수일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기존의 역사를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학자가 있을터인데... 이런 분을 모셔셔 다양한 시야를
보여주었으면 했는데...

스스로 정수일씨를 높이고는, 가만히 듣고 있는게.....

과연 비판적 글읽기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정수일 선생님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것이 아닌, 진행이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았나 하는 점에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정수일 선생님의 시선은 정말, 180도의 시선을 돌려버렸는데... 아마
이렇게 독보적이고 이단적인 발언을 할 수 있었던게...

식민학자의 스승을 모시지 않고, 외부에서 독학으로 하셨기에
학벌이나 지연에 얽메이지 않음에 의해서일까 혼자 생각해봅니다.
아마 선생님의 이야기는 분명 새로운 시선이 될 것이며,
엄청난 틀을 바꾸어 놓거나 이야기를 끌어올릴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스무해전에 나온 김성호씨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기원』과
같은 충격적인 이야기가 풀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의 집필에 욕심을 바라며, 글을 마무리 할까 합니다.

두서 없는 글 읽어 주셔셔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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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1-20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첩으로 사형수 판결까지 받았던 사람이죠. 학문한 사람은 쉽게 죽이면 안되는데 전향까지 한 사람을 사형 구형하는 검사도 과한 것 같아요. 그 검사 이름은 아마 몇십년 지나면 사라지지만 정수일씨가 짓고 번역한 책들은 그보다 훨씬 오래 남을 겁니다.

열린사회의적 2006-01-2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명 깐수라 불렸죠. 이 분의 열정은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를 보면 인생 역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메튜 베틀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넥서스BOOKS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먹는 것을 생각만해도 입에 군침이 도는 아가 있는데, 거 아 앞에 없는게 없이 다 차려진 상이 있다면...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질라 칼 정도로 한상 차려져있다면... 아마, 두번 생각안하고 두손으로 마구 집어삼킬끼다. 근데... 먹다 본, 이게 아이다 싶다. 와그럴까? 와 맛이 없는기고?

몇 몇 상을 대접 받아 본 것은 아니지만, 색두인(色頭人)들이 차린 상은 너무 포장이 심하다. 저거 좋아하는 음식을 몇개 올려놓고 세상 모든 음식을 다 올렸심다칸다. 이제는 얘교로 바 줄 수도 있다. 예전에는 뻥이 심하다 캤는데, 이제는 마 그럴수도 있지머칸다. 심심하면, 쪼깨 차리고는 세상 모든 음식을 다 차렸다카는게 어디 한두번이라야지. 우예보면 오만방자하고 우예보면 지잘났다카는데, 마 대꾸하몬 같은 놈이 될끼고... 이제는 그냥 글나카고 넘어가뿐다.

암튼, 한 상을 차려주긴 ?는데, 이게... 영 입맛에 안맛네, 아마도
간이 들 베ƒ…나 보다. 다양한 채소로 음식을 장만했는데, 쩝 간이 조화를 이루지가 못하니 영 아니다. 머시 먹을라카 맛도 보기 전에 목구멍으로 너머가 버리는게, 피가 되고 살이 될는지 영 모르겠다. 마!

건데, 어디서 주어모았는지 벼레별 음식이 다 있긴 있다. 다만 지동네에 나는 산나물만 모아서 그렇지... 말하자마면
지동네산나물모음상이라 캐야하나. 떨뜨름한게... 모르겠네.

음식이라카는 건 먹고 피가 되고 살이 되야하는긴데. 무신 돌도 아이고 그냥 올려나만 되는가... ?. 머라카기에 상당히 부담스럽다. 중요한건, 영 내 입에 안맞다는기다. 또 모르지 다른 아 이에는 맞을런지...

아 그라고 한마디 주저리주저리 한다면..

"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책 속에 존재한다"(23쪽)

이 명제는 진실과 거짓을 모두 담고 있다. 이래도 흥이고 저래도 흥인기라. 세상의 모든 기 단순히 '진리'나 '진실'만 아니고 '거짓'도 되는깅께. 기냥 '책=진리'라고 잘못된 만남을 주선하는기는 한쪽만 보는 기라. 이는 책을 우상화시킬 수가 있다카이. 이렇게되몬 지은이의 헤게모니를 읽지 못하는 수가 생긴다카이.
사람과 책은 밥과 그릇이라 칼 수가 있는데, 책은 밥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기라. 밥그릇에는 밥만 담길 수도 잇꼬, 꽁보리밥도 담길 수가 있는기라. 이를 먹음으로써 내몸에 보약이 되는기제. 책이든 밥이든 꼭 꼭 씹어무야 하는거는 잔소리고!! 책을 너무 만이 읽고서는 지가 양반인줄 알고 양반다리가 하고서는 생각만 하면 그 자리에서 똥삿뿐다. 지가 '허생'이가 아닌 담에야, 책을 읽고는 움직이야 하는기라. 옛말에도 지행합일이라 안카나. 책 속에 모든게 있다. 와 없는게 없겠노. 있으면 머하노, 쓰먹을 줄 알아야지. 부뚜막에 소금도 지버너야 짜고, 구슬이 시말이라도 께메야 보밴기라. 하모하모!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거는 밥 대신에 밥그릇을 신주단지 모시는거하고 머가 다르노. 책 속에 모든게 존재한다카이... 머라 말은 못 카겠고. 중요한거는 아는게 아니라 쓰먹는기라. 부뚜막에 소금 그거 놔두가 똥만들끼가. 암, 암!!

덧붙임 : 책은 반 정도 읽고, 고이 장농에 모셔심더. 담에 언제 필치게 되몬 다시 몇자 갈겨보겠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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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조 2006-11-0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습니다.
 

모년모일에, 대통령이 쫓겨났다. 시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시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을 쪼까냈다. 명분은 언제는 시민이였다. 물론 그들을 뽑은 사람이 시민이기에 그들의 논리는 일견 합당해보인다.


대통령은 탄핵을 받고서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시절을 조용히 돌아보며 책을 한 권 집었다. 너무도 바쁘게 살아온, 또한 열심히 산다고 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중압감은 그를 힘들게 하였고 그는 지인이 추천하는 책을 집었다.

지인은 수 만권의 책을 읽었다. 그는 어떤 책이 좋을지 고민고민을 했다. 지금은 자리에 물러나있지만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를 불러 들이기 위한 전략도 필요했다. 그는 이 책 저 책을 고르고 골랐다.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서고, 외롭게 적들과 싸움을 벌어는 그가 모시는 분에 대한 이미지와 자연스레 연결될 그런 책....


옳거니!!


그는 두껍지도 않고, 이 부분은 중요하다. 왜? 책이 너무 두꺼우면 너무나 책을 좋아하는 시민들이 집에 고이 모셔놓고 읽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읽지 않게 되면 대통령과 함께 책을 읽었다는 공감도 얻지 못하고, 책 속의 주인공에 대한 이미지를 대통령으로 전이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껍지 않아야 한다. 어렵지 않아야 한다.


밤샜네 밤샜네, 고르고 고른 책. 이건 아냐, 이건 아냐. 그래,


불의 노래!!!!!!!!





『불의 노래』는 반 천 년 앞서, 와나라는 나라가 대도무문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앞뒤 가리지 않고 처들어왔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앞서 몇해 앞서 두 사람의 신하를 와나라에 보내, 염탐을 보냈지만 일상의 편안함에 물든 비대해진 권신들은 그들은 그들이 믿으려하는 것만 옳다고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다른 이야기였지만 조정에 올려진 보고서는 "
전쟁무(無)"였다. 놀다 지쳐 잠이 들곤하는 평온하는 일상을 이백년이나 가꿔온 조정으로서는, 이 편안함이 백만년 갈 것이라 생각을 하였나 보다.


한편 백두산 밑에서 나라를 지키다, 이제는 남쪽바다에 선 이가 있었다. 그는 칼 찬 무장이면서 글을 쓸 줄을 알았다. 남쪽으로 와서는 우선 배를 만들고 수리를 하며, 무장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했다. 무장의 칼이 녹슨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조정이 편안함에 취해 잠드는 반면에
남쪽은 거침없는 훈련 소리가 바다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러고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와나라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침략을 해왔다. 와나라는 암(暗)나라를 치러가니깐 비키라켔다. 하지만 조정은 암나라의 우의(友意)를 내세워 안된단켔다. 솔직히 안된다카기전에 다 나라가 쑥대밭이 되뿟따. 한번 휘두른 칼이 집에 들어갈 줄을 모르고 춤을 추니,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사람 목심이 달나났뿟따.


한편 와나라는 우리나라가 70%의 산과 백두대간이 있기에 함부로 식량을 나르기에는 곤란한 것을 진작부터 알고는... 걸어서 부산에서 서울갈라카몬, 백두대간 문경새재를 지나가야 하는데, 이 길이 장난이 아니다.
한 두사람도 아니고, 수 많은 병졸과 무기, 식량을 지고나르고 칼라 케바라. 얼마나 와나라가 똑똑한지 알끼다. 아무튼 손자의 말처럼, "승병(勝兵)은 먼저 이긴 후에 싸움을 시작하고 패병(敗兵)은 먼저 싸운 후에 승리를 원한다"카더니 딱 그 꼴이아이가.


와나라가 두 패로 나나가주고, 한핀은 땅으로 한핀은 바다로 갔는데... 마, 그들도 몰랐는기라. 거기에 이순신이라는 이가 있다카는걸... 바다에 길을 터야 그들도 먹고 전쟁을 할 수 있을낀데, 이순신이 탁 버텨가주고 내 쥑이고 갈테면 가바라카이~ 와놈이 미치고 환장하겠는기라, 저게 비켜줘야가는데... 그들도 이순신이라는 복병은 몰랐는기라, 암튼 만사불여튼튼이라고. 이래서는 안되겠다시픈 와나라는 손자책을 또 디비가주고 "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다"라는 것을 찾아가주고 계교를 부려가주고 이순신을 혼쭐 내 뿐다 아이가. 고구려가 망한 이유가 왜 망했노. 나쁜 놈들이 형제간을 이간질하이 그렇지. 암튼 배가 부르면 귀가 얄바지는가보다.


조정에서 이순신을 불러가주고, 궁디를 때리면서 와 니 내 말안듣노, 앞으로 내말 들어라카고는 그를 남쪽으로 내려 보낸다 아이가. 솔직히 이순신이 없으면 안되는 것을 조정도 알고, 이순신 지도 아는기라. 둘 다 자존심 싸움핸기제.


뒤돌안 돌아보고 남쪽으로 오이, 백성들이 와는교카며 안 반기는기라. 그는 조정보다 백성이 더 가여워 보이는기라. 암튼 여기서 이바구는 시작된다 안카나.


와나라놈은 처들어오제, 백성들은 배고파서 죽어나가제 우야겠노. 지 위에 있는 권율도 와 가주고 우야꼬카고, 조정에서도 우야꼬카는 기라. 하지만 이순신은 깨가 있다면 잠잠코 있으라 안 카나. 우얄끼고 믿을게 가 밖에 없는데... 암튼 이순신은 남쪽으로 내려와가주고
홀로 와나라와 싸우는기라. 그는 이때아는기라. 조정도 사리사욕에 눈이 벌개가 있고, 지 위에 있는 아는 지 보다 못하고, 지방의 아전들은 없는 이 등쳐먹고, 지하고 같이 칼 찬 아들은 죽어가 있는 이웃의 머리를 잘라가주고 와놈이다 카고, 차마 불쌍한거는 백성인기라. 이를 우야겠노. 백성들이 불쌍한기라. 이에 칼 차고 달밤에 노래를 읊는데, 얼마나 구슬픈지...


그라몬, 지인은 와 이 책을 골라줬나카몬... 내 가만~생각해보이~, 아마 이런게 아닐까 십따.


잘해 볼라꼬 대통령이 됐는데, 국회가 빙신이라가주고 지를 쪼까 냈는기라. 기가 얼마나 차겠노. 하지만 이건 숨기야한다. 나는 게안타 나는 게안타 가민서,
백성이 불상타 백성이 불상타 안카나. 이를 대나놓고는 못칸다 아이가, 와, 쫓겨났는데 가만히 있어야지. 하지만 가만히 있어가 누가 알아주나, 얼라도 울어야 젖 물리지 가만 있어바라 엄마가 젖 주나?


그래가주꼬, 『불의 노래』를 읽고 있심더 안 카나? 나하고 다른 높은 자리에 게시는 분이 읽는 책인데, 어떤 책인가 싶어가주꼬 시민들아 너도나도 다 사 보게 될 게 아니가? 그라몬 반은 성공핸기라. 와? 책을 읽으면서 나도 니 편이다라는
동정이 깔린기라, 아무리 지가 잘 나 바라. 내 이런 책을 읽고 있다칸다고 읽나? 불쌍하고 에처로워 보이니깐 따라 읽는기지. 암튼 책을 읽으니깐 겹쳐지는 인물이 있는기라. 알겠나?


와, 이렇게 약았노. 대나놓고 내가 이순신이 카지는 못하고... 암튼 말 못하는 대통령도 쏙이 만이 타겠제. 암튼 이래가주꼬 소설 속의 주인공은 대통령으로 자연스레 겹쳐지는기라. 물론소설 속 주인공을 대통령하고 겹치는 건, 읽는 사람 목이제. 겹치고 안겹치고는 우얄수가 없는기라. 조용히 그렇게 되길 바래야지.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안뎄다는 생각이 드노.


그가 하는 모든 몸짓, 말짓이 세인의 관심이 될끼고 자라는 아이는 보고 배울낀데... 두껍지도 않은 책 하나 일고는 내 일었따고 떠더는게 불쌍코, 수백건의 책 속에 고작 골란게 그건지 참 불쌍타.


얼마전에 대학 시험 치고 노는 아 한테, 『전략』이라는 책을 던져졌다. 그 아가 그걸 읽고 다 이해했다카몬 순 거짓말이겠지만...
무조건 왜우라켔따. 와, 나중에 알게된다.


『전략』은 우에 보면 고사성어 모음인데, 우에보면
모든 변수들의 집합인기라. 이를 다 알고 있으몬 극적상황에 벌어질 때 요령꺼 대처할 수 있는기라. 갑자기 불이 나가주고 불이야케바라, 우왕자왕하제, 이게 예행연습이나 준비가 없는기라. 불이 안날때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안된나. 20대에 『전략』을 읽고 왜운 담에 커가면서 실생활에 응용하는기라. 아마 지천명에 되기전에 그는 모든 변수들을 다 알게 되고, 어떠한 싸움에도 안밀릴끼다. 그리고 지천명에 되가주고 느긋하게 말하는기라. 『전략』을 읽고 있심더카몬. 다 이 책을 읽을꺼 아이가. 그라몬 생각은 수만갈래로 퍼진다. 나이 어린아들은 뭔내용인지 모를끼고 조금 살았다카는 어른들은 알듯말듯할끼고, 전략을 구사하는 이들은 해심의 미소를 질 끼다.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던져주야하는데, 내가 이순신인데 카몬 그게 대통령이가. 참, 한심스럽다.


내가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를 함밨는데, 전씨가 노씨를 나두고 지 마누라한테,
'노 정말 저거는 알다가도 모르겠다'카이 마누라라 ''카이, 전씨가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는기 병신갓기도 하민서 속을 도저히 모르겠다'카든데, 울나라 대통령은 너무 말을 만이 해 가주꼬 미치겠다. 차라리 실실 웃거나 가만히 입을 다 물고 있으면 속을 알 수가 없을낀데, 너무 말을 많이 하면서 '함 뜨자'카이 '그래 함 뜨자'카며 맞장구친다 아이가. 나라에서 할 일이 '함 뜨는 일 밖에 없나' 내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암튼 『불의 노래』는 대통령 땜에 많이 팔리긴 팔렸는데, 참 읽을 책이 그렇게 없는지... 불쌍타, 대통령이나 시민이나.
책이 옷도 아니고, 아이고 모르겠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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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1-1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속을 드러내지 말라는게 권력과 관련된 중요한 충고라고 합니다. 한비자에서 비슷한 맥의 글들이 많습니다.
또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가만히 자신의 말을 줄이면 주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더군요.
 
칼의 노래 2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싸움은 늘 혼자. 김훈의 말처럼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122)"을 지닌 인간의 놀이다. 집단적 광기는 군중심리를 불러일으키며, 냉철한 이성을 감성 앞에 잠재운다. 그리고서 개별성을 숨긴 체 싸움을 나서지만, '혼자임'은 분명하다. 이를 인식하는 것은 싸움에서 죽음을 쉬이 인식할 수 있으며, 절대 고독에 갇히게 됨을 나타낸다. 개별성을 집단성에 던져 넣으면 무지가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고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듯 한 착각에 휩싸인다. 여기에는 철저하게 '개별성'을 인지하는 존재는 없다. 근데 이 개별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가 있다. 그가 눈을 뜨을 때 "온천지의 적들에게 포위되어(134쪽)"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적들의 두터울수록 칼의 울음소리는 거칠어 간다. 그는 칼의 울음소리를 통해 두려운 적들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

이순신, 그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32쪽) 말을 무시로 내뱉으며, 몸부림을 치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에 늘 서 있다. 이 가엾고 무서움 앞에 홀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적은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내 안의 적은 희망을 빼앗아 가고,

"희망은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절망의 앞에 절대 고독에 갇히게 되며 목숨 건 싸움을 한다. 희망이 없는 세상에, 무서움 앞에 나서는 것이다. 이 싸움은 무지와의 싸움이며, 그 무지는 조정과 임금, 신하, 명군 장수 등이다.

조정은 전장의 안위에 있으면서 지휘권을 남용한다. 적과 칼을 하나 주고받으며 목숨 건 싸움을 하는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만이 존재하는 구중궁궐에 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근본부터 다른 싸움이 된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51쪽)

"임금은 멀리서 보채었고, 그 보챔으로써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92쪽)

임금이 가엾고, 조정이 가엾지만 그는 싸운다. 이순신은 싸움에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적이 죽어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33쪽)

오직 비움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경지, 유(有)와 무(無)가 이무런 의미가 없어지며, 살아서도 죽어있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신선 같은 인물이 된다. 나를 버림으로써 싸움은 최전선에 설 수 있고, 힘찬 칼놀림을 마음껏 휘두를 수가 있다.? 무지의 벼랑 끝에서 홀로 싸우는 이순신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어찌 이리도 가여울까? 한 인간이 절대 무지(無知)와 싸울 때 -"온 천지의 적들에 포위되어"(134쪽) 있으면서 나를 버릴 수 있는 용기,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싸움이 있기에 싸움이 있는 건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순신은 '임금'과 싸우고 있다. 왜군과 싸우면서 '무지의 임금'과 싸운다. 왜군은 도구적 구실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와 전쟁터에 서 있는 사람은 '조정'이며, '임금'이며 '권력자'들이며, '세상의 중심에서 언어'로서만 싸우는 무리들이다. 조정은 가엾고, 처음부터 울음을 걷치지 않고 있으며, 무능할 뿐이다.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언어의 울음'(44쪽~58쪽)은 임금의 무능에 대한 장계(狀啓)이다. 왜 이 부분에, 이 글이 필요한가는……. 내 적이 왜군이 아닌, '임금'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어린아이 마냥 '멀리서 보채'기만 한다. 임금이 나를 믿지 못할 때, 즉 국가가 나를 믿지 못할 때 내가 느끼는 비애는,

"희망이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23쪽)

라고 술회한다. 세상에서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곽재우처럼 시선이 되지 못하고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다시 묻는다. 왜? 왜, 나는 신선이 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32쪽)

이 무서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싸우는 이유는? 앞서도 말했지만 이 싸움은 이순신과 왜군의 싸움이 아닌, 이수신과 임금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자기애의 믿음이 강하며, 자기의 병법으로 전략으로 구사하여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이순신과 임금의 싸움은 종지부를 찢게 되며, 무지와의 싸움에서 또한 승리하게 된다. 그는 고독한 싸움을 벌였지만 절대 고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싸움에서 이겼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문득문득 스치는 의문,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칼의 노래』를 듣었을 때 부터, 그리고 어제 읽기 시작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아니 책을 덮고도 소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근데, '오직 소설로서' 읽으라고 못 박는 이유는 뭘까? 여느 소설책을 보았지만……. 나는 어제부터 품은 생각의 실마리를 이제서야 풀었다.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고",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엽"워서이다. 세상에 무지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무지의 힘이 살아남고, 오직 힘만이 힘을 억누를 수가 있다. 세상에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으로 잠식 되었으며, '알맹이'와 '내용'이 없다. 어쩌면 이는 '신선'과 함께 깊은 산속에 살고 있을는지 모른다. 이 책 또한 소설이 아닌 전기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빌어먹을……. 세상이 무지로 덮여, 읽는 내 무지에 대한 강한 경계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 부분은 감정이 앞선다. '소설로서'읽어라. 그럼 내가 '전기'를 읽는다고 착각하는걸까?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이름이 역사 속 이름과 같다하여, 소설 속 사건을 역사적 기록, 주인공의 고뇌를 이순신이라는 이의 인간적 고뇌로 본다는 말인가? 즉 '무'와 '유'를 구분 못하는 내 무지에 대한 금심으로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직 소설'로 읽기를!!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이의 감상평처럼, '허무, 의미 없음과의 싸움'인지 세상에 대한 오만함인지…….

김훈은 책머리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그리고 정의로운 자를 역사 속에 불러내어,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에 다시 나왔다. 그가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무지와의 싸움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착각이 살짝 스친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미문(美文)의 과(過)함'과 '임금에 대한 병적인 파괴',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에 대한 집착', '중립적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지은이의 모습' 등 여러 가지가 스친다.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많은 미문이 필요하고 그렇게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내어야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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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김훈,

몇 번의 눈 맞춤이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낯설다. 그리고 왜 이렇게 자기를 숨기려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는 언제나 초연한 듯 하면서 철저하게 위장을 한다. 지금 권 70여 쪽을 읽어가지만 그의 자리가 눈앞에 다 그려지는 듯해,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그 깊이가 앞서 들어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혹시 처음 부분은 많이 어색했는데 일취월장(日就月將) 하여, 책을 덮는 순간에는 상상도 못할 반전을 가져다주는 장면은 아직 기대 속에 갇혀있다. 내 기대치가 너무 높게 설정되었나 보다. 책을 읽으면서, 정리에 정리를 하면서 메모 등을 한다. 이렇게 정리가 되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다 그려지게 된다. 읽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칼의 노래』 역시, 이 길 위에 비켜 서 있지 않다. 물론 내 짧은 지식에 의한 오만함으로 무장된 것일 수 있지만……. 난 내 믿음에 대해 거짓을 던질 수가 없어, 지금 기억을 하고 읽어가다 틀린 부분이 나오면 고치겠다. 분명 말하건대, 지금 적히는 글은 -책이 덮히는 순간에 고쳐질 수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감정이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에 크게 달라지지 않는 믿음도 놓치지 않겠다. 그러면 몇 쪽 읽지 않았지만,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생각들을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드라마를 보면서 "재는 안 돼"하고서 혀를 차다가 거리에서 마주치면, "참 못 땠다"라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조선시대 소설이 읽혀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비분강개하여 그를 칼로 찔려 죽였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가 않다. 그렇기에 지은이가 말하는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면 소설이 지니는 의의는 무엇인가? 특히 산인물(-人物)을 재창조하는 경우는…….

산인물을 재창조하는 경우는, 하나의 잣대가 있다. 그것은 옳든 그러든 '영웅(英雄)'이라는 군상이다. 시대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다시 불러내어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숨을 불어 넣어주는 이는 작가인데, 치열한 정신이 녹아든다. 하지만 자칫 소설 속의 주인공과 지은이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사람을 찔러 죽인 경우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즉 지은이의 자리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창조하는 자리여야 하는데, 엉뚱하게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시(同一視)하는 경우가 일어난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자기 자신의 삶이 다르지 않다며 위안을 삼거나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함인데, 어떠한 경우이든 올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김훈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소설 속 이순신이 아닌, 현실 속 '김훈'의 자화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는 현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현실은 잘못되었으며,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혼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기보다 깊은 곳에서 '독야청정(獨夜淸淨)'하기를 바란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했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써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지은이의 말 가운데에서)

김훈은 이 짧은 글에서 스스로를 드러냄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나'라는 언어를 효율적으로 자리매김하여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강한 자의식을 나타냄이다. 강한 자의식은 세상과 물러섬에서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이라는 겸손함으로 오만함을 감춘다. 정말로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에 왜 그는 물러나는가? '희망'이 없기에!! 희망은 그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세상, 그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다. 싸우지 않고 물러섬으로써, 그는 지지않고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즉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글쓰기를 통해, 한 발짝 물러서 있으며,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인물이며,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또한 정면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조차 가지지 못한 인물을 그릴 수가 있다. 이러한 싸움은 이순신의 눈을 통해 '정의로운 세상'이 투영된다. 그가 보는 정의로운 세상의 단면은 다음과 같다.

조정(18쪽) -"그들은 헛것을 ?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다"

원균(27쪽)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끝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

승려(30쪽) -"승려는 함장한 자세로 영불을 외면서 칼을 받았다"

권률(32쪽) -"도원수 권률은 군관과 나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말은 살찌고 기름졌다"

아전(40쪽) -"나는 내륙지방 관아를 돌면서 징모부정 사건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버린 아전들도 있었다"

임금(49쪽) -"중국 산수화를 들여다보고 있던 임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옥에 갇힌 자들을 끌어내서 죽였다"

정철(50쪽) -"정철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민첩하고도 부지런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근면히 살육했다"

김훈의 수사(修辭)는 임금의 수사보다 '장려(壯麗)'하다. 정철을 농부와 같은 부지런함을 살육과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수사는 가히, 내가 이해 못할 언어이다. 더구나 그림을 보다 문득 생각나 살육을 지시하는 임금이 과연 임금인가? 조정의 신하들은 헛됨을 쫓고 있으며, 도원수 권률은 전쟁의 참담함과 괴로움 속에서 살찐 말 위에 올라서 있다. 이렇게 한 발짝 물러서 던지는 수사는 솔직히 아니꼽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단 한 줄로 무참히 살육하는 그의 수사는 참혹하다.

김훈은 철저하게 세상을 파편내고 있다. 이는 객관적 진실성보다, 그가 보는 세계관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눌려있다. 즉 그가 보기에 세상은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숨 쉴 수가 없으며, 정처 없이 떠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고 없어 뒤채이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38쪽)

김훈은 불안한 자아로 인해, 정처 없이 떠돌지만 바닷가 가운데 마음을 놓일 수 있는 섬이 있으니, 이는 여자이며 어머니이다. 그가 여진(40쪽)과 어머니에게 보여지는 깊은 애정은, 다음 아닌 마음의 안식처이다. 여자, 어머니를 안식처로 삼고, 나 아닌 모든 것은 '그릇되다'라고 한다. 이는 임금, 즉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 없었다. 내가 가진 한 움큼이 조선의 전부였다.(34쪽)"

김훈은 임금의 무능마저도 '이해'할 수 있지만, 국가는 저버릴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국가를 저 버릴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조정에 불려가 심문을 당하지만, 헛된 싸움에 불과하며, 그들이 결국에는 내 발 아래 무릎 굻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60쪽)"

무서움은 무지와 크게 다르지 않고, 무지는 가벼움과 다르지 않다. 임금의 무지가 가엾고 무서울뿐이다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한다.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61쪽)"가 됨은 '내가 임금'이 됨을, 아니 임금을 초월한 신성한 이가 됨을 의미한다. 이로써 임금 위에 신성한 이가 존재하며, 모든 실체는 거짓이며 사람들은 여기어세 옳고 그름을 찾는 가여운 짓을 하고 있다.

김훈은 이순신 속에 자기를 투시함에 머무름이 없다. 즉 어떤 특정 인물에 자기를 숨긴다. 이 인물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큰일을 한 사람이다. 이로써 자화상을 완성된다. 사람들이 그를 미워해도-나처럼-그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홀로 존귀'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세상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앞에, 철저하게 스스로를 숨긴 지은이가 서 있다. 세상이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산야에 숨어, 홀로 고귀한 척 하는 모습 또한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인사-임금, 조정, 원균, 권률, 아전 등등-는 도를 넘어서 있다. 스스로를 숨김과 상대방에 대한 무례한 언사, 어머니에 대한 동경. 나는 이 모습에서 여섯 살짜리 꼬마아이를 본다. 그는 힘이 없지만 자존심이 강하며, 똑똑하다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하지만 거리에는 나 보다 더 큰 아이들이 있기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치고 빠지기'식의 전략을 구사하며, 언제나 엄마의 치맛자락으로 숨는다. 어머니는 그의 영원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지은이의 글이 다름 아닌,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스스로를 철저하게 숨길까? 솔직하지 못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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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 2006-01-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을 부러 읽지 않는 사람입니다만, 읽지 않아도 그 이유가 분명하게 짚히는 글이네요. 훌륭하십니다. 저는 그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이길 원하는지 모르지만,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저널리스트로도 작가로도 이해하지 않습니다.

sayonara 2006-02-0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혹스럽지만 매혹적인 리뷰... 이제 막 '칼의 노래'를 읽으려 했는데... 정작 리뷰가 원작보다 좋은 것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_-;;;